소설리스트

158화 (158/328)

“오래전부터 그분께서 저를 부르시는 소리를 들었으나 세속의 연을 끊지 못하여 외면해 왔던 바, 이제야 겨우 당신 앞에 무릎 꿇고 속죄합니다.”

요슈아가 천천히 검을 받쳐 올렸다.

“번민하던 마음을 다잡고 하나의 결심을 세워 그분 앞으로 나아가려 하니, 사도이시여, 못난 저를 꾸짖고 책망하시어 저로 하여금 당신을 지킬 수 있도록 하십시오. 저는 생명의 불을 수호하는 검이요, 불의 뜻을 이어받은 사도의 방패가 될지니.”

“요슈아 페임하른!”

“세속의 굴레를 모두 끊어 더 이상은 요슈아 페임하른도, 요슈아 발데마르도 아닌 그저 한 사람의 요슈아로서 당신께 검을 바칩니다.”

어서 검을 받아 달라는 듯 요슈아가 한쪽 눈을 찡긋했다.

못내 얼떨떨한 기분을 떨치지 못한 차라는 악귀처럼 무시무시하게 달려오는 이리니 페임하른을 슬쩍 훔쳐보았다. 이상하게도, 그 모습에서 하나도 닮은 점 없는 빌헬미나 3세의 우아한 자태가 겹쳐졌다.

알리오나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바로 섰다.

그렇다면 요슈아, 이것이 속박에서 벗어나려는 너의 방법이구나.

결심한 차라가 요슈아의 검을 받아 단호히 그의 양어깨에 검날을 올렸다. 그리고 조용히 읊조리길.

페임하른의 아들이자, 발데마르의 아들 요슈아.

“그대를 교회의 기사로 임명한다.”

“안 돼!”

이리니가 처절하게 절규했다. 현실을 부정하듯 막무가내로 병사들을 밀어 헤치던 그녀가 별안간 허리춤을 부여잡으며 피를 한 움큼 토했다. 선혈로 젖은 자신의 손을 멍하니 들여다보던 이리니가 갑자기 휘청했다.

“각하!”

희게 질린 호위 기사들이 정신없이 달려왔다. 잠시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던 전장이 다시금 출렁이기 시작했다. 의식을 잃은 이리니가 호위 기사에게 업혀 실려 나가자, 병사들을 밀치며 달려온 탐보프의 기사가 다급히 도미에 변경백을 붙들고 속삭였다.

“변경백! 이 틈입니다! 어서 남은 적들에게 공격 명령을 내려 주십시오!”

“철수한다.”

“…예?”

반문하는 기사를 차갑게 쏘아본 변경백이 사위를 둘러보며 우렁차게 외쳤다.

“전군, 철수하라!”

“벼, 변경백!”

기사가 황망히 그를 말리려 들었다. 그런데 말 머리를 돌리며 후미의 병사들을 재촉하던 변경백이 불현듯 전광석화처럼 고개를 돌렸다.

엷은 잿빛으로 충만한 하늘 아래, 홀로 허공을 가로지르는 새 한 마리가 아리도록 눈에 박혔다. 느닷없이 변경백이 심각한 얼굴로 남쪽 하늘을 주시하자, 병사들도 어리둥절하여 먼 하늘을 관찰했다. 독수리 아니야? 그렇다기엔 좀 큰데….

때에 안 맞게 유유하던 속삭임은 곧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하나둘 낯빛이 바뀌기 시작했다. 반란군은 희망으로, 탐보프 군은 절망으로. 웅성거림이 사방으로 번지는 가운데, 누군가 큰 소리로 부르짖었다.

“요, 용이다! 용이 왔다!”

펄럭이는 거대한 날개, 창공을 가르는 순백의 몸피.

그리고 광활한 평원으로 울려 퍼지는 포효.

모두가 말을 잃었다. 파도처럼 덮쳐 오는 용의 울음소리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관통하며 숨 막히는 전율이 일어났다. 마치 그대로 석고를 부어 버린 것처럼 온몸이 굳어 손끝 하나 까딱하지 못했다.

기껏해야 주먹만 하게 보이던 용은 순식간에 몸집을 불려 나갔다. 시시각각 가까워지는 용의 위용에 수만 대군이 전혀 맥을 못 추렸다. 간혹가다 쩌렁쩌렁하게 들려오는 울음소리에 머리털이 바짝 곤두서고, 쩍하고 벌어지는 아가리에 바지가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용이 지나간 길을 따라 질풍이 솟아오르니, 병사들은 삽시간에 머리 위로 당도한 용을 피할 틈도 없이 휘몰아치는 바람 속에 몸을 잔뜩 웅크렸다.

부지불식간에 멈추어 선 용이 제자리서 유연하게 날갯짓했다.

평원을 어지럽히던 돌풍이 잦아들고, 자연은 숨을 죽였다. 고요한 적막 속에 순백의 용은 차라가 있는 절벽으로 부드럽게 미끄러졌다. 물속을 헤엄치는 고래처럼 매끄러운 몸체가 허공을 유영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새하얀 비늘 위로 아스라한 빛줄기가 내려앉기 시작했다.

먼 하늘, 먹구름에 갇혀 있던 태양이 서서히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얇은 장막에 가려진 등불처럼 은은한 빛무리가 구름 너머로 뚜렷하게 번져 왔다. 그리고 마침내 눈부신 빛이 먹구름을 가르며 단 한 사람에게로 쏟아져 내렸다.

광휘를 두르는 이 세상 유일무이한 존재.

차라는 숨이 멎을 듯한 기분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누군가는 무기를 떨구고, 누군가는 철퍼덕 주저앉았다. 평원에 모인 수만 대군이 감히 숨소리조차 내지 못했다. 살면서 단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한 아득한 경외감이 그들의 사지를 엄숙하게 짓눌렀다.

바야흐로 사도의 재림이었다.

***

양군은 일시적으로 전투를 멈추고 물러났다. 온몸의 힘이 쭉 빠진 차라는 요슈아의 부축을 받아 반란군의 진영으로 들어갔는데, 마침 뒤처졌던 용 기병대가 속속들이 도착하고 있었다.

멀리서부터 위태롭게 날갯짓하던 열댓 마리의 검은 용들은 거의 추락할 듯 땅으로 주저앉았다. 혀를 길게 빼문 용들에게로 병사들이 황급히 달려가 물을 먹였다. 용의 등에서 내려오는 용 기병대 단원들 역시 지친 기색이 다분했다.

예후르는 반란군 중진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보고를 받는 중인지 분위기가 꽤나 심각했다. 차라는 섣불리 다가가지 못하고 멀찍이서 그 모습을 지켜보기만 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또 무슨 말을 들을지 몰라 내심 전전긍긍했다.

그때, 예후르의 곁을 지키던 막시모가 차라를 발견하곤 예후르의 귀에 무어라 작게 속삭였다. 예후르가 휙 고개를 돌렸다. 부지불식간에 그와 눈이 마주친 차라가 표나게 움찔했다.

예후르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머릿속이 새하얘진 차라는 되는 대로 말을 내뱉고 보았다.

“그, 그게, 예후르, 내가 원래 이러려던 게 아니라, 원래는 그냥 얌전히 너한테 오려고 했는데….”

눈이 빙글빙글 돌아가고, 심장이 마구 두방망이질했다. 차라는 차마 그의 얼굴을 마주하지 못하고 질끈 두 눈을 감았다. 제발 뺨 한 대, 아니, 두 대로만 끝내 줘.

그러나 뺨에 불이 나는 대신, 너른 품으로 와락 끌어당겨졌다. 차라는 번쩍 눈을 떴다. 믿을 수 없게도 그는 예후르에게 꼭 안겨 있었다.

“예, 예후르?”

단단한 가슴팍에 코가 뭉개진 차라가 황망히 중얼거렸다. 양팔로 차라를 옭아맨 예후르가 깊은 숨을 토해 내듯 억눌린 목소리로 읊조렸다.

“…너마저 잘못되는 줄 알고 걱정했어.”

“내, 내가 왜 잘못돼. 가일도 있고, 요슈아도 있는데….”

더듬더듬 변명을 이어 가던 차라는 불현듯 들이닥친 깨달음에 말을 멈추었다.

너마저.

페기가 그렇게 되고 너마저.

북방을 횡단하는 데 바빠 까맣게 잊고 살았던 서글픔이 밀물처럼 쏟아져 들었다. 그 애가 죽고 난 뒤 한없이 잠식되었던 애수의 바다로, 어쩌면 그는 여전히 침몰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코끝이 시큰해진 차라가 어설프게 그의 등을 쓸어내렸다.

“…걱정시켜서 미안해.”

왜 네깟 게 감히 내 계획을 망쳤다고 화내는 예후르만 상상했을까. 이렇게나 날 염려하는 사람인데. 그와 함께 보낸 시간이 길진 않아도 그때마다 늘 내게 잘해 주지 않았나.

“아, 잠깐만, 예후르.”

꼼지락거리며 그의 품에서 벗어난 차라가 우물쭈물 고민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가늠이 되질 않았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전쟁을 일으켰냐고 캐물어야 할지, 아니면 동부는 이만 놔주고 성도로 돌아가자고 빌어야 할지.

하지만 제대로 결정을 내리기도 전에 병사가 황급히 달려와 고했다.

“저, 전하. 적진에서 도미에 변경백이 찾아왔습니다.”

차라와 요슈아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부딪혔다. 고민할 겨를도 없이 차라는 병사를 따라 걸음을 돌리려는 예후르의 옷자락을 무작정 잡아챘다.

“예후르. 도미에 변경백은 적이 아니야. 너는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더듬더듬 말을 잇던 차라가 슬그머니 눈을 들어 올렸다. 예후르는 감정이 전혀 드러나지 않는 얼굴로 물끄러미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늘 그렇듯 그의 사고가 어디에 닿아 있는지는 불분명했다. 예후르는 곧 옷자락을 쥔 차라의 손을 떼어 내곤 조용히 발길을 돌렸다.

차라는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멍하니 응시했다. 슬금슬금 다가온 요슈아가 무어라 지껄이는 것도 같았지만 귀에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차라는 잘근잘근 이를 깨물었다. 주먹에 힘이 꽉 들어간다 싶더니, 벌써 멀찍이 가 버린 예후르를 쫓아 힘껏 달리기 시작했다.

멀지 않은 병영 입구에서 도미에 변경백의 모습이 보였다.

“엘피도 공작 전하.”

변경백이 가슴 위로 손을 올리며 간략한 인사를 했다. 애매하게 합류한 차라가 얼굴에 철판을 깔고 고집스레 예후르의 옆에 붙어 섰다. 다행히 예후르는 차라가 어찌하든 크게 신경 쓰는 기색이 아니었다.

고개를 까딱하며 인사를 받은 예후르가 변경백이 끌고 온 무리를 훑어보았다. 소수의 호위 기사들 뒤로 제법 번듯한 마차 한 대가 서 있었다. 예후르의 눈길이 얼마간 마차에 머물렀다.

“어린 바도비체 후작은 어디 있습니까?”

“…각하께서 몸이 불편하신 바람에 제가 임시로 군을 이끌고 있습니다.”

예후르는 물끄러미 변경백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속을 꿰뚫는 눈빛에 변경백은 어쩐지 죄책감이 일어나 슬며시 시선을 피했다. 탐보프 군은 유디트가 세도파의 소식을 듣고 화병으로 쓰러진 줄 알지만, 그게 사실이 아니라는 건 그가 제일 잘 알았다.

예후르가 말이 없자, 침묵을 견디다 못한 변경백이 못내 초조한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휴전을 제의 드리러 왔습니다. 페임하른 공작이 쓰러졌으니 동부 군도 당분간 전쟁을 계속할 여력이 없으리라 사료됩니다만.”

“페임하른 공작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예?”

예상치 못한 소리에 변경백의 얼굴에 당혹감이 드러났다. 예후르는 여전히 뜻 모를 눈으로 유심하게 그의 얼굴을 뜯어보고 있었다.

“미에투넨으로 떠났다고 들었는데, 어찌 이곳으로 돌아왔습니까?”

“그건….”

유디트에게 이른 대로 거짓된 변명을 읊으려던 변경백이 문득 멈칫했다. 차라가 시퍼렇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마구 휘젓고 있었다. 변경백은 목덜미가 서늘해진 기분으로 느릿하게 대답을 이어 갔다.

“볼파르트에서 도피 중이시던 황태자 전하와 황녀 전하 그리고 여기 계신 사도님을 우연히 만나 뵈었습니다. 세 분과 함께라면 동부의 파국을 막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대는 동부인이 아닌 것으로 아는데.”

“제가 지키던 땅입니다.”

변경백의 시선이 멀리서 이쪽을 지켜보는 방벽 수비대원들을 향했다.

“저와 함께 싸우던 전우들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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