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우우.
뿔피리 소리가 연달아 울렸다. 그에 부응하듯 북소리가 긴장감을 고조시키더니, 곧 수만 병사들의 함성 소리가 하늘을 찌르기 시작했다. 무섭게 진동하는 지표면에서 자글자글 끓는 기름처럼 모래 자갈들이 튀어 올랐다.
그에 차라를 업고 달리던 가일이 우뚝 멈추어 섰다.
“시작되었습니다.”
질문을 던질 틈도 없이, 멀지 않은 곳에서 요란한 쇳소리가 빗발치기 시작했다. 깨지고 부닥치는 온갖 산란한 소음들이 뒤섞였다.
“가일…?”
차라가 멍하니 중얼거리자, 가일은 업고 있던 차라를 말없이 땅에 내려놓았다. 얼결에 두 발 딛고 선 차라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갑자기 왜….”
“도련님, 그만 포기하십시오.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말문이 턱 막힌 차라가 연거푸 마른침을 삼키며 가까스로 목소리를 냈다.
“그… 러니까 지금이라도 가서 말려야죠. 탐보프 쪽에는 변경백이 있으니, 반란군만 설득하면 되는데….”
“엘피도 공작 전하께선 지금 이곳에 계시지 않습니다.”
가일이 먹구름 가득 낀 하늘을 눈짓했다. 용 기병대의 흔적은 그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렇다고 여기까지 왔는데 멈추라고요? 이제 코앞이잖아요! 되든 안 되든 일단 시도는 해 봐야…!”
“엘피도 공작 전하께서 왜 전쟁에 참여하셨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요!”
“그분께 깊은 뜻이 있으리라곤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뒷머리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차라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입술을 달싹였다.
“왜… 왜요. 예후르가 방해하지 말래요?”
“그런 말씀은 없으셨습니다.”
“그럼 왜!”
“전하의 계획이 어그러지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을 수는 없으니까요.”
가일이 성큼 다가왔다. 어느새 눈에 띄게 늘어난 복면 쓴 사람들이 천천히 그를 에워싸기 시작했다.
차라는 이를 깨물며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털을 곤두세운 고양이를 포획하려는 사냥꾼처럼 가일이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양팔을 뻗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번 전투가 끝나면 전하께로 모시겠습니다. 우선은 안전한 곳에 계시고, 황태자 전하만을 보내 주시면 됩니다.”
“하지만….”
차라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자, 요슈아가 슬그머니 앞으로 끼어들었다. 차라가 황망히 그를 불렀다.
“요슈아?”
“가.”
요슈아가 씩 웃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내가 막을 테니 가라고.”
차라는 멍하니 그를 응시했다. 산뜻하게 웃고 있는 요슈아의 어깨 너머로 점차 일그러지는 가일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 순간, 차라는 고민의 여지 없이 뒤돌아 달리기 시작했다. 등 뒤에서 칼날끼리 부딪치는 쇳소리가 잇달아 들려왔다. 차라는 뒤돌아보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온 힘을 다해 달음박질했다.
하지만 이해가 안 되는걸.
바스토뉴와 말도 안 되는 밀약을 체결한 것도, 미친 페임하른 공작을 회유하여 전쟁을 일으킨 것도, 이 절체절명의 순간에 자리를 비운 것도.
진실로 고통받는 동부를 위하는 마음이었다면 그럴 리가 없잖아.
너를 믿고 싶은데, 더는 너를 믿을 수가 없어. 너의 목적이 전쟁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는 끔찍한 생각을 떨칠 수가 없어.
너는 그런 사람이 아니잖아.
나처럼 부족한 사도를 이끌어야 하는 네가, 그래서는 안 되는 거잖아.
숨 가쁘도록 달렸다. 젖 먹던 힘까지 끌어모아 땅을 박차 올랐다. 귓전을 어지럽히는 소음들과 유리된 채 오직 앞만 보며 내달렸다.
그렇게 절벽 끄트머리에 이른 순간, 절벽 아래로 미끄러지려는 발을 황급히 끌어당기며 뒤로 발라당 나자빠졌다. 차라는 목 끝까지 차오르는 숨을 헐떡이며 엉금엉금 절벽으로 기어갔다. 그리고 눈앞으로 펼쳐지는 광경에 그만 말을 잃고 말았다.
야트막한 절벽 아래에서 아비규환이 벌어지고 있었다. 푸릇푸릇하게 돋아 오르던 들풀은 군홧발에 짓밟혀 형체 없이 문드러졌고, 땅은 이미 질척한 진흙밭이었다. 푹푹 파이는 진흙탕에서 베고, 꿰뚫고, 죽이고, 죽이고, 또 죽이고. 베이고, 꿰뚫리고, 죽고, 죽고, 또 죽고.
온통 진흙투성이, 소속을 알 수 없는 병사가 닳아 빠진 검을 힘껏 휘둘렀다. 무딘 날이 적의 허리춤을 후려치자, ‘억!’ 하고 쓰러지는 적의 머리 위로 근육 진 말의 앞발이 쇄도했다. 그대로 적을 깔아뭉갠 기병이 예리한 창으로 병사의 목을 꿰뚫었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창날에 눈 부릅뜬 송장의 머리만 셋이었다.
그러나 기병의 활약도 잠시, 키 작은 병사 하나가 진흙밭에 미끄러지듯 몸을 던져 말의 힘줄을 베었다. 히이잉! 말이 고통스럽게 울며 허물어지자, 중심을 잡지 못한 기병이 그대로 고꾸라졌다. 볼품없이 땅을 구르는 기병의 머리를 누군가 세게 짓밟고 지나갔다. 무거운 군홧발 아래 두골이 우지끈 무너져 내렸다.
허공으로 핏물이 흩뿌려졌다. 이곳저곳에서 단말마의 비명 소리가 솟구치고, 허옇게 눈 부릅뜬 송장들이 진흙탕 아래로 가라앉았다. 생존욕에 잠식된 수만 군사들이 짐승처럼 날뛰고 있었다.
보다 못한 차라가 토악질을 하기 시작했다. 먹은 것을 모두 게워 내고, 노란 위액까지 꺽꺽 토했다. 거듭된 헛구역질에 폐부가 꽉 오그라들며 생리적인 눈물이 맺혔다.
정의를 위한 길이라고 생각했다. 예후르라면 당연히 그럴 것이라고.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그저 파괴를 위한 파괴일 뿐이라면, 이 전쟁은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그만….”
차라는 가쁜 숨을 삼키며 중얼거렸다. 본능에 몸을 내맡긴 난전을 굽어보며 흐느끼듯 간청했다.
“제발 그만해….”
멀지 않은 곳에서 도미에 변경백이 필사적으로 적의 공격을 막고 있었다. 차라는 눈물 젖은 눈으로 망연자실 그를 바라보았다. 상대는 검은 갑주를 두른 기사였다. 한눈에 그녀가 페임하른 공작임을 알아보았다.
예후르가 없다면 공작을 설득해야 했다. 하지만 막상 그녀를 발견하자 자신감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공작은 미쳐 날뛰고 있었다. 제정신이 아닌 자들 중에 가장 실성해 있었다. 막무가내로 휘두르는 검을 막아 내며 도미에 변경백이 계속 말을 걸고 있으나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머리부터 발 끝까지 피를 뒤집어 쓴 그녀는 이미 살육에 미친 광인이었다.
도대체 여기서 내가 무얼 할 수 있을까.
레오폴트처럼 권위가 있지도, 안드레아처럼 강하지도, 하물며 페기처럼 불을 피우지도 못했다.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고, 무언가 이루어 낼 만한 능력도 없다. 처음으로 용기 내어 도전한 일이 이것이나 결국은 이 모양 이 꼴. 일을 망칠 만한 재주도 없는 자가 바로 그였다.
“…하지만 이런 저라도 선택하신 이유가 있을 거 아니에요.”
차라는 울먹이며 가슴팍을 더듬어 올라 쇄골 부근을 꽉 쥐었다.
어린 날, 아무도 모르게 성흔을 찍고 가신 분이여.
제게서 무얼 보셨기에 이 무거운 사명을 내리신 건가요. 저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어요. 당신이 제게 무얼 바라시는지도, 제가 이어받아야 하는 당신의 뜻이 무언지도 모르겠어요.
다만 저는 더 이상 이 지옥을 견디지 못하겠으니.
진실로 저를 아끼고 사랑하신다면, 하늘의 천사이시여.
부디 제게 저들을 말릴 힘을 주세요.
배 속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마치 용암이 솟구치듯 온몸이 데워지며, 격렬하게 이글거리는 불덩이가 목구멍을 타고 올랐다. 숨 막히는 압박감에 두 눈이 부릅뜨이고, 통제를 벗어난 몸이 팽팽하게 굳어 버리는 순간.
누가 잡아 벌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입이 크게 찢어졌다. 그리고 시퍼렇게 핏대 선 목에서 불덩이가 폭발하는 동시에, 먼 하늘에서 거대한 우레가 울려왔다.
쾅!
땅으로 내리꽂힌 진동에 지축이 흔들렸다. 바람결에 엎어지는 들풀처럼 병사들이 우수수 넘어지고, 진흙탕이 격렬한 파동으로 요동쳤다. 벼락이라도 맞은 듯 아찔한 감각에 휩싸였던 모두가 얼이 빠진 모습으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
전장을 휩쓴 진동은 순식간에 사방으로 번져 나갔다. 혼자서 힘겹게 예후르의 부하들을 막아 세우던 요슈아 역시 강하게 덮쳐 오는 충격파에 일순 휘청거리며 허리를 꺾었다. 가일을 비롯한 예후르의 부하들도 사정은 다르지 않았다.
그중 제일 먼저 정신을 차린 것은 가일이었다. 후려 맞은 듯 곤죽이 된 머릿속에서도 주군으로부터 받은 밀명만은 단 하나의 등불처럼 오롯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혈통에 집착하는 빌헬미나를 가장 좌절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은 핏줄의 단절이지. 하나뿐인 딸은 자식을 낳을 수도, 황위를 이을 수도 없는 몸이니 남은 것은 단 하나다.”
검을 움켜쥐고.
“기회를 엿보아 아무도 보지 못하는 곳에서.”
흔들리는 발을 내디디며.
“황태자를 죽여라.”
뒤돌아선 황태자에게로 쇄도했다.
그러나 검 끝이 살을 파고들기 직전, 요슈아가 스르르 그를 돌아보았다. 한없이 말간 시선이 마주쳐 옴에 가일은 저도 모르게 몸을 굳혔다.
얼어붙은 그를 가만히 응시하던 요슈아가 문득 엷게 웃었다.
“걱정하지 마요.”
“…….”
“당신들이 걱정하는 그런 일, 없을 테니까.”
그러곤 날아갈 듯 가벼운 몸짓으로 달려 나갔다. 연한 새싹이 돋아나는 너른 들판을 가로질러 절벽에 이른 요슈아가 경쾌한 걸음으로 차라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우두커니 넋 놓고 주저앉아 있던 차라의 팔을 끌어 올렸다.
“…요, 요슈아?”
뒤늦게 정신을 차린 차라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요슈아는 연신 휘청거리는 차라를 바로 세우곤 얼결에 전투가 멎은 평원을 휙 돌아보았다.
적과 아군이 구분되지 않는 진창에서 흙먼지와 피로 범벅된 병사들이 종전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머리를 감싸 쥐고 있었다. 이리저리 뒤엉킨 수만의 병사들 틈바구니에서 아는 얼굴 집어내기란 몹시 요원한 일이었으나, 적어도 그녀는 자신을 알아볼 수 있을 터.
역시나, 저를 귀신 보듯 응시하던 이리니 페임하른과 눈이 마주쳤다.
요슈아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감과 동시에, 창백하게 질려 있던 이리니의 얼굴이 야차처럼 일그러졌다. 이리니가 단숨에 병사들을 헤치며 달려오기 시작했다.
도미에 변경백이 황급히 외쳤다.
“황태자 전하, 피하십시오!”
그러나 요슈아는 느긋하게 고개를 돌려 차라를 마주할 뿐이었다. 도리어 차라가 불안한 눈빛으로 점차 가까워지는 이리니를 곁눈질했다. 어수선한 공기를 가로질러 요슈아의 이름을 부르짖는 노성이 당도하고 있었다.
그때, 요슈아가 갑자기 정중하게 한쪽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그러곤 가슴 위로 손을 올리며 경건하게 차라를 올려다보았다.
“심연의 천사 이슬라 님의 현신이시여.”
차라는 무슨 영문인지 몰라 눈만 끔벅였다. 아들이 무슨 짓을 저지르려는 건지 단번에 눈치챈 이리니가 흉악하게 울부짖었다.
“요슈아!”
“저는 페임하른의 장남, 혹은 발데마르의 삼남. 세속에서 불리는 이름은 많지만 하늘 아래 그분께 드리는 이름은 단 하나입니다.”
“당장 그만두지 못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