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5화 (155/328)

그는, 정말로 내가 없어도 괜찮을까. 또 그렇게 약에 취하고 술에 취하여 나를 찾는 건 아닐까. 이미 죽고 없는 사람을 보며 일평생 그렇게 공허한 환상 속을 거니는 것은 아닐까.

한때 그가 결코 무너지지 않을 신상(神像)이라 여기던 시절이 있었다.

늘 올곧았던 그는 현실을 망각하지 않을 것이며, 질서의 길을 벗어나지 않으리라고. 이미 죽어 사라진 사람 따위 진작 잊고 자신의 삶을 꾸려 나갈 것이라고.

그런데 이제는 모르겠다.

이미 그는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알 수 없는 어떠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지금은 앞만 보며 달리고 있지만, 그 목적을 이루면 진정 허물어질지도 몰랐다.

아주 먼 곳에서 과거를 잊고 살다가 어느 날 결국에 그가 무너지고 말았다는 소식은 듣고 싶지 않았다. 모든 일이 벌어지고 난 뒤에야 바람결에 전해 들을 비보는 그녀마저 무너트릴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나를 용납하지 못할지도 모르는데.

나를 그리워하는 그에게, 나를 죽이게 하고 싶진 않은데.

갈피를 잡지 못하는 마음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자신의 마음이 꼭 깊이를 알 수 없는 우물 같았다. 계속해 들여다보지만 아무것도 비치지 않는 검은 우물.

몇 시간이고 며칠이고 번민해도 도무지 결착이 나지 않자 그녀는 거의 미칠 지경이었다. 양손으로 머리를 쥐어뜯고, 갑갑한 가슴을 두드리고 소리 내어 울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모르겠다. 마음 가는 대로 선택하고 싶어도, 자신의 마음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둔탁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즈음이었다.

페기는 미열이 오르는 이마를 가만히 무릎 위에 올려 둔 채 점점 가까워지는 발소리를 들었다. 넷… 아니 다섯이다. 혹 마을 주민들인가.

그러나 시끄럽게 돌바닥을 울리며 계단을 내려오는 것은 다름 아닌 무거운 군홧발 소리였다. 페기는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고개를 들었다. 머지않아 횃불을 든 무리가 쇠창살 앞으로 다가왔다.

세르난도 만포르차였다.

“아델라이데 아가씨.”

돌아오는 대답이 없자 그는 인상을 구겼다. 기사에게서 횃불을 뺏어 들고 창살 안으로 집어넣으려 했으나, 불빛이 닿은 녹슨 창살에 커다란 지네가 붙어 있는 것을 발견하곤 짧게 비명을 지르며 물러났다.

그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페기가 찬웃음을 머금었다.

“발밑도 조심하세요. 쥐 떼가 다니니.”

“…대답이 없기에 잠드신 줄 알았습니다.”

움찔한 세르난도가 곧게 가슴을 폈다.

“이쪽으로 가까이 와 주시죠. 감옥 안이 어두워서 아가씨 모습이 보이지 않는군요.”

“굳이 제 얼굴을 보실 필요가 있나요.”

무료하게 읊조리는 소리에 세르난도가 기사에게 자물쇠를 풀라 명했다. 페기는 머리를 쓸어 넘기며 솟구치는 짜증을 억지로 내리눌렀다.

“그냥 거기서 말씀하세요.”

“그래도 얼굴을 봐야 잘 지내고 계신지 알 것이 아닙니까? 목소리도 많이 쉬셨고, 보아하니 음식엔 손도 대지 않으신 듯한데.”

“햇빛 들지 않는 쥐구멍이지만 생각보다 괜찮게 잘 지내고 있습니다.”

음식을 먹지 않은 것은 입맛이 돌지 않았기 때문이지만, 물조차 제대로 마시지 않은 것은 목소리 때문이다. 행여 사술이 풀려 본래 목소리가 드러나면 곤란한 상황이 닥칠 수도 있기에.

“그나저나 총사께서 여기까진 어쩐 일이신가요? 지금쯤 이곳을 떠나셨으리라 여겼는데.”

“…드릴 제안이 있습니다.”

세르난도가 눈짓하자, 기사들은 횃불 하나만 남기고 전부 물러갔다. 도대체 무슨 말을 꺼내려고 저러나. 페기가 지긋지긋하단 시선을 던졌으나, 그것을 알 길 없는 세르난도는 큼큼 헛기침하며 고상한 투로 말을 이었다.

“아가씨 말씀이 맞았습니다. 아주 습지 깊숙한 곳으로 이끄셨더군요. 덕분에 안개 속을 벗어나기가 여간 쉽지 않게 되었습니다.”

“마을 주민 하나 붙잡고 길잡이 노릇 하라고 명하세요. 병사들이 그리 윽박만 지르니 겁먹고 숨어드는 거죠. 차근차근 설명하면 습지를 벗어날 길을 알려 줄 거예요.”

“이제 와 습지를 벗어나 반란군을 기습하긴 늦었습니다.”

“그럼 회군하셔야겠군요.”

기계적으로 내뱉는 대답에는 고민의 흔적이 전혀 없었다. 세르난도는 굴욕감을 삼키며 입술을 열었다.

“아가씨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농담도 과하셔라.”

“농담이 아닙니다. 기습이 실패라면 다른 효과적인 수를 강구해 내야죠. 아가씨라면 알고 계실 게 아닙니까? 반란군의 약점을.”

“알고 있다 한들 그것을 어찌 총사께 알려 드리겠어요?”

페기는 무릎 위에 뺨을 올려놓으며 그를 외면했다. 지금은 그저 만사가 지겨웠다.

“물론 맨입으로 청하진 않습니다. 장사의 기본은 양자가 모두 만족할 만한 합의점을 찾는 것. 위스누아 상단의 우두머리로서 아가씨와 라발의 구미가 당길 제안을 드리려는 겁니다.”

횃불이 서서히 번져 오는 세르난도의 눈동자가 불그스름하게 번뜩였다.

“일전에 엘피도 공작을 두고 미친 사도라고 하셨지요.”

“그저 당신 듣기 좋은 소리를 읊어 줬을 뿐이에요. 엘피도 공작은 미치지 않았고, 라발은 당신의 누이동생을 지지할 생각이 없어요. 다 아는 소릴 이렇게 내 입으로 들어야 만족하고 떠나겠어요?”

“만약 엘피도 공작이 정말로 미쳤다면 어떻습니까?”

세르난도가 창살 앞으로 한 발짝 더 다가왔다.

“사랑받는 천사의 아들, 역대 가장 뛰어난 사도, 뱀을 죽인 영웅. 만약 이 모든 것이 거짓이라면 어떻습니까. 그럼에도 천사께서 만인이 보는 앞에서 축복을 내리신 알비야 공작보다 엘피도 공작을 지지하시겠습니까?”

페기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비밀을 속삭이듯 그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아가씨, 그자는 사도가 아닙니다.”

머릿골로 벼락이 내리쳤다. 머릿속을 떠돌던 수많은 잡념들이 한순간에 증발하고, 정수리까지 피가 쏠렸다. 페기는 한동안 숨만 씨근거렸다. 메말라 갈라진 밀밭처럼 바싹 졸아 버린 목구멍에서 간신히 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당신이 그걸 어떻게 알아요?”

“위스누아의 지배를 받는 인접 도시가 하나 있습니다. 거기 교회의 주임 사제가 죽기 전에 내 앞으로 유서를 남겼더군요. 밝혀진다면 교회는 물론이요, 전 대륙이 발칵 뒤집힐 진실이 적혀 있었습니다.”

“…….”

“이를테면 3년 전, 뱀을 죽이러 왔던 엘피도 공작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쇠창살 사이로 세르난도의 푸른 눈이 형형하게 일렁였다. 마음 깊숙한 곳, 치졸한 열등감에서 비롯된 희열이 타오르고 있었다.

“믿음이 가지 않으신다면 지금 바로 유서를 보여 드릴 용의도 있습니다. 보시면 아실 겁니다. 진실을 알게 된 후로 그 사제가 얼마나 괴로워하며 여생을 보냈는지. 신앙심에 눈이 멀어 진실을 덮으려 하였으나, 죽기 직전에야 겨우 회개하여 진실을 고백한 겁니다. 엘피도 공작에게 유일하게 맞설 수 있는 위스누아로.”

그는 당장이라도 유서의 전문을 읊을 기세였다. 페기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그저 폭포처럼 쏟아지는 목소리를 맞기만 했다.

예후르가 사도가 아니라니.

당연하잖아.

세상의 어떤 사도가 자유자재로 용을 다루고 상처에서 빛을 흘리나. 그런 사도는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다. 사도가 되어서 가장 초라하게 죽었던 그녀가 가장 잘 알았다.

하지만 그러면 무엇이 달라지나.

그는 여전히 그녀와 함께 자란 예후르였다. 어리고 부족한 누이동생을 따스하게 감싸 주며 무한한 애정을 먹여 주던 오라비였다. 누구보다 강대한 권능을 선보이며, 누구보다 현명하게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이었다.

그의 앞에선 한낱 사제가 죽기 전에 고백한 진실 따위는 빛을 잃었다. 잃어야만 했다. 잃지 않는다면 제 손으로라도 빛을 꺼트릴 것이었다. 고작 저런 장사치 따위가 그를 무너트리게 놔둘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사도의 자리에는 내리막길이 없으니까.

무결한 사람에겐 흠을 찾아내려 혈안이 된 날파리들이 몰리기 마련이며, 만인에게 칭송받는 영웅일수록 질시하고 깎아내리려는 비렁뱅이들이 들러붙기 마련이다. 흠결 없던 그에게 조금의 의혹이라도 생긴다면 지고의 자리에서 그를 끌어내리려는 손길이 무수히 뻗칠 것이었다. 아무리 그여도 광기 어린 손길들을 모조리 뿌리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자칫 휘청거리기라도 하는 순간, 깎아지르는 낭떠러지 아래로 곤두박질치리라. 사방이 절벽으로 둘러싸인 사도의 자리에는 완만한 비탈길 따위 없었다. 추락은 한순간이고, 자리가 높을수록 추락의 여파는 컸다.

내가 그러했던 것처럼.

절로 더운 숨이 솟구쳐 올라왔다. 상상만으로도 손바닥에 식은땀이 차오르고, 오금이 새파랗게 저려 왔다.

그 끔찍한 고통을 그가 겪게 할 수는 없다.

순식간에 돌변한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 받고, 돌팔매질 당하는 것은 그녀로 족했다. 비참하게 죽는 것은 그녀로 충분했다. 그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만약 그에게까지 그런 비극이 닥쳐온다면, 다른 누구보다도 그녀가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페기는 어렵사리 입술을 뗐다. 깊은 우물에서 길어 올린 것처럼 가라앉은 목소리가 목을 울렸다.

“…그 사실을 당신 말고 또 누가 알아요?”

“아직은 저뿐입니다. 서신으로 논의할 사안이 아니라, 이번 일이 마무리되면 직접 성도를 찾아 알비야 공작 전하와 퀴테리아 추기경에게 알릴 생각이었지요.”

“다행이네요.”

감히 그의 비밀을 파헤치려는 머저리가 너 하나라서.

페기는 벽을 짚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랜 시간 굳어 있던 자세에 관절이 삐걱삐걱 비명을 지르고, 근육이 아프게 울었다. 신음을 참기 위해 그녀는 안간힘으로 이를 깨물었다.

“알비야 공작 전하보다 아가씨께 먼저 말씀드리는 것이니 부디 영광으로 여기십시오. 지금 바로 피아제 백작과 라발의 황제 폐하께 서신을 보내셔도 좋습니다. 위스누아와 라발이 함께라면 저 빈곤한 반란군이 문제겠습니까? 이번에야말로 오만한 엘피도 공작을 땅으로 떨어트릴 절호의 기회입니다!”

열띤 목소리로 말을 잇던 세르난도가 갑자기 안주머니를 뒤지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사제의 유서를 직접 보시는 편이 좋겠지요. 여기 있습니다. 쓸데없는 인사말을 거두절미하면….”

“그만.”

가까스로 중심을 잡고 선 페기가 휘청거리며 한 발짝 앞으로 내디뎠다. 횃불이 비추는 둥근 반원 속으로 더러워진 구두 앞코가 불쑥 침입했다. 여상하게 고개를 들던 세르난도는 이해할 수 없는 광경에 순간 어안이 벙벙해졌다.

또각거리며 지하 감옥을 울리던 구두 굽 소리가 머잖아 멈추었다. 페기는 녹슨 창살을 사이에 두고 물끄러미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늘 나른하게 풀려 있던 얼굴에 혼란과 경악이 폭풍처럼 몰아치고 있었다.

페기는 화사하게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표정이 왜 그래요? 꼭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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