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아래 세 개의 깃발이 힘차게 펄럭였다.
하나는 엘피도 공작을 상징하는 용의 깃발. 반란군 일만의 열망이 모여 그 무엇보다 드높이 세워졌으나, 정작 그 주인은 온데간데없었다. 구김 없이 휘날리는 용기(龍旗)가 위태로이 주인의 빈자리를 메우고 있었다.
다른 하나는 옛 노르투그 왕국을 상징하는 검은 곰의 깃발. 그러나 언젠가부터 용에게 밀리기 시작한 곰은 눈에 띄게 일선에서 물러나 한결 초라하게 나부꼈다. 검은 곰을 짊어진 페임하른 공작 또한 툭 치면 무너질 듯 아슬아슬한 모습으로 선봉을 지키고 있었다.
“적군은?”
“유디트 바도비체가 일선에서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고 있습니다. 그리고… 확실치는 않지만 도미에 변경백으로 추정되는 자가 보인다고 합니다.”
이리니 페임하른은 투구 아래로 흘러내리는 식은땀을 거칠게 훔쳤다. 한눈에도 병색이 완연한 모습이었으나, 그 누구도 그녀에게 간언을 올릴 생각을 못 했다.
포악한 이리니 페임하른의 목줄을 죌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엘피도 공작이었다. 하다못해 그녀의 면전에서 바른말을 할 수 있는 사람도 연륜 깊은 노장뿐이었으나, 그는 이미 단칼에 갔다. 더 이상 반란군 진영에는 목숨을 걸고 이리니를 계도할 사람이 없었다.
당연히 사기는 곤두박질쳤고, 삼만 대군을 앞두고선 짙은 패배감이 내려앉았다.
후미의 병사들은 도망칠 기회만 엿보고 있었으며, 그들을 다독여야 할 기사들조차 형언할 수 없는 굴욕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반란군은 이미 자신들의 끝을 예감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들에게 승리라는 환상을 선사했던 용이 날아가 버렸을 때 이미, 오랫동안 그들을 현혹하고 있었던 미몽이 거두어진 것일지도 몰랐다.
타고난 전사로서 이리니가 군을 휩싼 모멸감을 느끼지 못할 리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머리채를 잡아끌고 온 엘피도 공작이 사라짐에 그녀의 몸뚱이를 잡아 이끄는 것은 새롭게 싹튼 복수심이었다.
그녀가 배 아파 낳은 자식.
그녀의 유일했던 희망이자 동부의 유일했던 횃불을 잃은 값을 반드시 치러야만 했다.
이리니는 꽉 동여맨 허리춤의 상처 위로 손을 올리며 이를 으득 갈았다. 이런 부상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죽은 아들의 복수를 이룰 수만 있다면, 이 평원에서 제 목이 날아간다 할지라도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광기로 끓어오르는 그녀의 눈이 서쪽 지평선을 주시했다. 엷은 안개가 어른거리는 그곳에 하늘 아래 세 번째 깃발이 휘날리고 있었다.
바로 탐보프를 상징하는 푸른 늑대 깃발.
두 개의 축을 기반으로 했되, 눈에 띄게 한쪽으로 추가 기울어진 반란군과 달리 탐보프 군은 시작부터 일원화된 군이었다. 그들은 최초로 북방을 통일한 아리페르트 6세의 신화를 마음 속 깊이 품고 있었다. 그 형체 없는 자부심과 공동체 의식이 하나의 깃발 아래 그들을 모이게 했다.
일찍이 탐보프의 방패란 영광된 소리를 듣고 자란 유디트 바도비체 역시 마찬가지였다.
“전군은 들으라!”
사방에서 들끓던 북소리가 멈추었다. 그녀는 전열 앞에서 천천히 말을 몰며 날카로운 눈빛을 쏘았다.
“황제 폐하의 땅을 훔친 도둑이 저 앞에 있다! 황제 폐하의 은덕을 뿌리치고 사사로운 이익을 탐하는 역도들이 저 앞에 있다! 감히 황태자 전하를 시해한 천인공노할 역당들이 저 앞에 있다!”
유디트의 목소리가 우렁차게 울렸다.
“역도들을 수호하던 용은 사라졌다! 더는 타락한 사도가 음해하는 소리에 현혹되지 말지어다! 우리에겐 오직 승리뿐이다!”
병사들이 저마다 무기를 들어 올리며 환호했다.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 높았다. 용이 사라진 시점에서 반란군은 더 이상 그들의 적수가 못 되었다.
도미에 변경백은 후미에서 유디트의 짧은 연설을 듣고 있었다. 평소와 다름없이 담담한 낯은 연설에 집중하는 듯 보였으나, 사실은 몹시 초조한 상태였다. 그는 주머니 안에 든 약병을 만지작거리며 계속해 등 뒤를 곁눈질했다.
오래지 않아 병사 하나가 허겁지겁 달려왔다.
“가져왔습니다!”
병사가 들고 온 것은 붉은 와인이 찰랑이는 두 개의 잔이었다. 말없이 술잔을 받아 든 변경백이 아무도 모르게 잔 하나에 약을 한 방울 떨어트렸다. 그리고 급히 말을 몰아가려는데, 발을 동동 구르며 어쩔 줄 몰라 하는 병사 하나가 눈에 띄었다.
“무슨 일이지?”
“그, 그게….”
병사가 안절부절못하며 무어라 속삭였다. 잠시 고심하던 변경백이 걱정하지 말라는 듯 눈짓했다.
“내가 전하마.”
병사는 그제야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변경백은 술잔 두 개를 들고 병사들 사이를 헤집어 전열로 나아갔다. 탁 트인 지평선 앞에, 말을 타고 전방만 응시하는 유디트의 꼿꼿한 뒷모습이 보였다.
“후작 각하.”
조용한 그의 부름에 유디트가 퍼뜩 어깨를 튕기며 뒤를 돌아보았다. 불과 어젯밤, 약식으로 작위를 이어받은 어린 후작은 가엽게도 몹시 긴장한 기색이었다.
파르라니 질린 그녀의 안색을 가만히 들여다보던 변경백이 술잔 하나를 내밀었다.
“총사령관으로는 첫 출전이시지 않습니까. 긴장 푸시지요.”
“아, 가, 감사합… 고, 고맙소.”
유디트는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 헐떡이며 목구멍으로 술을 들이부었다. 변경백도 술을 한 모금 마시며 은밀한 눈으로 그녀의 동태를 살폈다.
“그리고 후방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세도파 아가씨께서 참전하고 싶으시다며 막무가내로 말을 몰고 오셨다는군요.”
“뭐요?!”
유디트가 눈알을 부라렸다.
“그럴 리 없소! 내 분명 그년을 요새의 꼭대기 방에 묶어 두고 왔는데, 어떻게 여기까지 쫓아왔단 말이오!”
“각하의 뜻이었다곤 하나, 세도파 아가씨 역시 바도비체 후작가의 일원이시니까요. 요새를 탈출하기는 어렵지 않으셨을 겁니다.”
변경백이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세도파 아가씨께선 엘피도 공작이 곧 이곳으로 돌아오리라며, 만약 그렇게 되거든 자신이 공작을 만나 이야기를 해 보겠다고 하십니다. 분명 타협할 여지가 남아 있을 거라고….”
“타협, 타협이라니! 이제 와 타협이라니! 그 미친년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내 그년을 당장 곤죽으로 만들어 버리겠소! 그년 지금 어디 있어!”
호위 기사들이 광분하는 유디트를 말렸다.
“각하, 고정하십시오! 곧 진군하셔야 합니다!”
“이거 놔! 세도파!”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울부짖던 유디트가 갑자기 가슴을 콱 움켜쥐었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희미한 신음 소리가 새어 나왔다. 점차 고통스럽게 일그러지는 얼굴을 멍하니 지켜보던 기사들이 기겁하며 그녀를 붙들었다.
“각하! 후작 각하!”
목이 죄인 듯 꺽꺽거리는 소리만 내던 유디트가 천천히 기울어졌다. 안장에서 떨어지는 그녀를 받아 낸 변경백이 큰 소리로 외쳤다.
“군의! 당장 군의를 불러와라!”
***
페기는 어두운 감옥 구석에 무릎을 세우고 앉아 있었다. 녹슨 창살 바깥에는 병사들이 던져 주고 간 물그릇과 약간의 음식이 널려 있었다. 손도 대지 않은 접시 위론 찍찍거리는 쥐들이 야음을 틈타 오갔고, 고요한 사위에는 천장에서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만이 면면히 울렸다.
페기는 언제 잠들었는지, 혹은 언제 깨어났는지도 모를 몽롱한 기분에 잠겨 있었다.
감옥에 들어온 지 얼마나 된 걸까. 빛 들지 않는 지하에선 으레 시간의 흐름에 무감각해졌다. 죽기 전 지긋지긋하게 겪었던 감각에 몸서리치며 그녀는 자꾸만 약해지려는 마음을 다잡았다.
이번에는 죽지 않아.
가까운 죽음으로부터 잘 도망쳐 왔어.
죽느냐, 사느냐. 예후르가 반반의 확률이었다면 세르난도 만포르차는 일말의 희망도 없는 죽음이었다. 당연히 그의 곁에서 멀어져야 했고, 제 발로 달아날 수 없다면 그의 손으로 내쫓게 만들어야 했다.
다행히 계획은 성공했다. 마샤는 무사히 달아났으며, 자신은 이렇듯 안전한 곳에 갇혔다. 갈 길이 먼 위스누아의 군대는 지금쯤 떠났을 것이며, 난데없는 외부인들의 침입에 놀라 숨어들었던 마을 주민들이 다시금 옛 성터로 몰려들 것이다.
보급 부대에 합류한 뒤로 습지를 오가면서 말 못 하는 주민들 몇몇과 안면을 터 놓았다. 높으신 분들이라면 일단 기함하고 보는 이들이니 절 함부로 대하지 못하리라.
그러니 당분간 이곳에 머물며 수색대를 기다려도 되고, 제 발로 습지를 벗어나도 좋았다. 누군가 이 지하로 내려와 자물쇠만 풀어 주면 그녀는 어디든 갈 수 있었다.
어디로든, 자유롭게.
페기는 신물처럼 올라오는 비참함을 참기 위해 목구멍을 꽉 옥죄었다.
그녀는 예후르를 떠날 생각이었다. 이미 사술은 풀리고 있고, 그녀는 차마 그에게 민낯을 내보일 용기가 없으니 마침 좋은 기회였다. 이 지독한 안개를 틈타 달아난 뒤, 평생을 그의 눈이 닿지 않는 초야에 파묻혀 살 것이었다.
더는 사도도, 교국의 카타리나 공작도 아닌 그저 카니나의 페기로.
그러니 지난 과거도, 소중했던 사람들도, 빛바랜 추억도 모두 이곳에 묻어 두고 가야 했다. 다시는 보지 못할 나의 가족들. 한 번 죽음을 겪었음에도 일그러졌을지언정 사라지지 않은 연정. 한때 나의 자리였던 빛나는 성좌(聖座)에 대한 미련.
마치 간장이 끊어지는 듯한 고통이었다. 그녀는 눈물로 흐려지는 기억들을 그러안고 숨죽여 흐느꼈다.
돌이켜 보니 모두 아름다웠다. 그때는 아름다운 줄 몰랐던, 애환으로 얼룩졌던 기억들조차 모두 아름다웠다. 다시는 가지지 못할 것을 알기에 아름다운 걸까. 나는 이 모든 아름다운 것들을 버리고 가도 괜찮을까.
당연히 괜찮을 것이다.
아름다움은 삶을 보장하지 못한다. 아름다운 기억에 기대어 여생을 버틸 수는 있어도, 아름다운 기억이 코앞의 죽음을 막아 주진 못했다.
죽음. 그녀는 안간힘을 다해 죽음을 떠올렸다. 아름다운 기억에 매몰되지 않기 위해, 죽음의 순간에 느꼈던 모든 감각들을 일깨웠다. 형언할 수 없던 공포. 말로 다 못 할 혹한.
귓전을 메우던 빗소리와 아득하게 멀어지던 의식 너머로 엄습하던 한기를 떠올리자 온몸에 소름이 오스스 돋아났다. 그녀는 발작적으로 팔뚝을 세게 문질렀다. 언제부터인지 잘게 맞부딪히는 이에 애써 힘을 주며 의식적으로 머릿속에 박아 넣었다.
다시는 그렇게 죽을 수 없어.
기치가 세워지자 지금껏 고집스럽게 품고 있던 것들이 우수수 떨어져 나가기 시작했다. 안온했던 유년기, 세상 가장 높은 사도의 자리, 요정이 노래하는 듯한 피아노의 선율, 사랑하는 나의 가족들.
레오폴트, 안드레아, 차라… 그리고 예후르.
마지막 남은 하나가 도무지 떨어지질 않았다. 마지막으로 보았던 그의 모습이 자꾸만 손끝에 들러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