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병이 비딱하게 눈을 치켜떴다. 노장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헛숨을 내뱉었다.
“뭐? 그게 어떻게 상관이 없어!”
“당신들과 우리가 맺은 밀약은 그거 아닙니까? 동부가 전쟁을 끝낼 때까지 바스토뉴는 알프도르트 방벽을 넘지 않는다. 우리가 언제 방벽을 넘었습니까? 네?”
“우리가 패배하면 네놈들에게 줄 땅도 없는 것을 진정 몰라서 하는 말이야?!”
“그거야 나중에 두고 보면 알겠죠.”
빈정거리는 말에 노장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머리 꼭대기까지 노기가 치밀어 말도 못 하고 있는데, 불현듯 등 뒤에서 끅끅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허물어질 듯 의자에 기대앉은 이리니가 허리를 꺾으며 숨넘어가게 웃고 있었다.
“각하…?”
그 순간, 이리니가 검을 뽑아 들며 벌떡 일어섰다. 깜짝 놀란 노장이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각하, 진정하십시오!”
“비켜!”
이리니가 노장에게 붙들린 사이, 용병이 황급히 몸을 돌려 막사를 빠져나갔다. 이리니의 눈에 시뻘건 불똥이 튀었다. 눈에 뵈는 것이 없어진 그녀가 발광하듯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이거 놓으라고! 놔!”
긴 다리가 노장을 끌고 조금씩 앞으로 나아갔다. 목줄이 잡힌 소처럼 상체가 앞으로 기울고, 목에는 시퍼런 핏대가 섰다. 어떻게든 붙잡는 손길을 뿌리치고자 사지가 마구 뒤흔들렸다.
마구잡이로 허공을 휘젓던 장검이 푹, 살을 파고든 것은 그때였다.
살갗을 베는 익숙한 감각에 고개를 돌리던 이리니는 눈앞에서 터지는 시뻘건 핏물을 목도했다. 노장의 눈이 뒤로 넘어가고, 죽기 살기로 저를 옥죄던 힘이 떨어져 나가고 있었다. 서서히 고꾸라지는 노장의 수염이 붉었다.
“…경?”
이리니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피 웅덩이가 점점 번져 나갔다. 칼을 맞고 쓰러진 노장은 미동조차 없이 피바다에 잠겨 있다. 쥐 죽은 듯한 적막에 비로소 귀가 트였다.
“…경.”
간신히 한 걸음 내디디려던 이리니가 검 끝이 바닥에 끌리는 쇳소리에 지레 놀랐다. 그러나 검을 추스를 틈도 없이 이번엔 등 뒤에서 중얼중얼하는 혼잣말 소리가 들려왔다. 홀로 막사를 지키던 호위병이 고개를 푹 숙인 채 덜덜 떨고 있었다.
“또야. 또 죄 없는 사람을….”
짓씹듯 중얼거린 호위병이 갑자기 고개를 번쩍 들어 올렸다.
“당신은 악귀야! 동부의 피고름을 빨아먹는 악귀! 당신 같은 사람이 동부의 구원자일 리 없어!”
호위병이 시뻘게진 눈으로 달려들었다. 뿌리칠 틈도 없이 날카로운 통증이 허리춤을 파고들었다.
“큭….”
이리니가 단검이 꽂힌 자리를 붙들며 두어 걸음 뒤로 물러났다. 호위병은 피눈물을 뚝뚝 흘리며 절규했다.
“당신이 누나를 죽였어! 내 친구를, 동료를! 도대체 얼마나 더 죽여야 만족하겠어! 얼마나 더 피를 보아야 그치겠냐고!”
울부짖는 소리에 머릿골이 다 울릴 지경이었다. 이리니는 휘청거리는 몸을 간신히 지탱하고 서선 온 힘을 다해 검을 휘둘렀다. 시퍼런 칼날이 커다란 호선을 그렸다.
호위병의 목이 툭 땅으로 떨어졌다. 목 잘린 시체가 뒤이어 털썩 엎어지고, 바닥에는 또 다른 핏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이리니는 검을 쥔 채로 천천히 주저앉았다. 단검이 박힌 허리춤으로 익숙한 고통이 몰렸다. 그녀는 흐려지는 시야를 다잡으며 더운 숨을 헐떡였다.
“…클라우스.”
어느덧 눈앞에 나타난 죽은 남편의 환영이 서글픈 눈으로 그녀를 굽어보고 있었다. 이리니는 차마 그의 시선을 마주하지 못하고 고개를 떨구었다.
“내가… 내가 반드시 그대의 원한을….”
겨우 용기 내어 다시 고개를 들어 올리던 이리니가 쩡하니 얼어붙었다.
환영이 바뀌었다.
“요… 슈아.”
그녀를 닮지 않은 금발, 그녀를 닮은 짙푸른 눈, 언제나 자랑스러웠던 사냥꾼의 미끈한 몸과 동부를 빛낼 눈부신 젊음.
이리니는 엉금엉금 그에게로 기어갔다. 저도 모르는 사이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요슈아, 내 아들….”
미웠다.
배 아파 낳아 준 자신이 아닌 빌헬미나를 택한 그가. 고작 그만한 일에 앙심을 품은 그의 작은 그릇이.
동시에 후회했다.
내 상처 핥기 급급하여 너를 돌보지 않았던 지난날을. 미쳐 버린 어미 아래서 오죽이나 답답했을 너의 유년기를.
“이 어미가… 반드시 너의 죽음을 갚아 주마. 널 죽인 자들을 찾아내 수백 수천 조각으로 도륙 내어 줄 것이야.”
흐느끼며 그의 발치로 기어갔다. 끓어 넘치는 눈물을 질질 흘리며 그에게로 손을 뻗었다.
그러나 고개를 들어 마주한 아들의 얼굴에 모든 움직임이 멎었다.
아들은 어머니를 경멸하고 있었다.
“요슈아…?”
침이라도 뱉고 싶다는 듯 써늘한 눈빛이 유리 조각처럼 가슴에 박혔다. 미련 없이 등 돌리는 환영에다 악착같이 손을 뻗어 보지만, 결국에 죽은 아들은 흔적 없이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안 돼…. 안 돼, 요슈아, 안 돼! 요슈아!”
빈손이 허망하게 나부꼈다. 이리니는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
“그런데 왜 고향을 떠난 거야?”
문득 차라가 물었다.
“갑자기?”
“아니, 그냥. 궁금해서.”
가일에게 업힌 차라가 다리를 달랑달랑 흔들었다. 요슈아는 눈을 굴리며 오래된 기억을 더듬었다.
“음…. 실은 어릴 때부터 떠나고 싶었어.”
“왜?”
“답답하잖아. 엄마는 허구한 날 미쳐 날뛰지, 나만 보면 네가 동부를 일으켜 세워야 한다는 둥, 돌아가신 아버지의 원수를 갚아야 한다는 둥 화만 내지.”
“그러고 보니 탐보프가 네 아버지의 원수잖아.”
“알 게 뭐야. 얼굴도 모르는 양반.”
요슈아가 불퉁한 얼굴로 돌멩이를 걷어찼다.
“난 그딴 거 이제 다 지겨워. 노르투그인지 뭐시긴지 망한 지가 언젠데, 내가 왜 그걸 일으켜 세운다고 평생을 바쳐야 해? 좋아하는 것만 즐기다 가도 모자랄 판국에.”
“그래서 어머니를 떠난 거야?”
“…꼭 그런 것만은 아니고.”
요슈아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늘 유쾌하게 들떠 있던 얼굴이 묘하게 가라앉은 듯하여 차라는 굳이 대답을 재촉하지 않았다.
“나한테 유모가 한 명 있었거든.”
“유모?”
“어. 미친 엄마 대신에 진짜 엄마처럼 날 보살펴 준 사람인데… 유모한테 딸이 하나 있었어. 성격은 좀 괄괄해도 예뻤어. 무지.”
차라는 문득 이 이야기의 끝이 보이는 듯했다.
“어릴 때부터 걔랑 같이 자랐단 말이야. 글도 걔랑 같이 떼고, 검도 걔랑 같이 배우고. 물론 내가 훨씬 잘했지만. 어쨌든 어릴 때 나한텐 걔가 유일한 친구였는데….”
요슈아가 조금 민망한 듯이 턱을 긁었다.
“그, 열다섯쯤 되면 원래 이성에 눈을 뜨게 되잖아.”
“모르겠는데.”
“하여간에 누가 샌님 아니랄까 봐…. 어쨌든 걔랑 나랑 불이 붙어서 그렇고 그런 짓을 좀 많이 했거든. 그런데 그걸 우리 엄마한테 들켰어. 엄마는 또 화가 났고 나는 반항했지. 그때 무진장 맞았다니까? 여기 좀 봐. 흉터도 남았지?”
“많이 아팠어?”
요슈아의 팔뚝에 길게 남은 흉터를 확인한 차라가 안타까운 듯이 눈썹을 늘어트렸다. 정말로 동정 받을 줄은 몰랐던 요슈아가 급히 소매를 끌어 내리며 말을 얼버무렸다.
“아니, 그냥, 뭐… 맞는 거야 일상이었으니까.”
“…….”
“하여튼 그건 괜찮았어. 괜찮았는데, 엄마가 유모까지 건드렸어.”
“건드리다니?”
“죽였다고.”
아무렇지도 않게 툭 내뱉는 소리였다.
“유모를 단칼에 보내더니, 그 딸을 붙잡고 나한테 그러더라고. 얘도 죽는 걸 보고 싶지 않으면 당신 말만 들으라고. 더는 반항하지 말라고.”
“…그래서?”
“싫다고 했지. 욕도 엄청 퍼붓고.”
“…….”
“그런 얼굴 하지 마. 걔는 안 죽었어. …불구가 되긴 했지만.”
차라가 앓는 소리를 내며 가일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 요슈아가 너그럽게 그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우리 엄마가 원래 좀 야성적이지.”
“그게 야성적이라고 눙칠 일이야? 어떻게 사람이 그래?!”
“그러게나 말이다.”
요슈아가 킬킬거렸다.
차라는 수틀렸다고 사람을 죽이는 페임하른 공작도, 고작 3년밖에 안 된 일을 남 일처럼 이야기하는 요슈아도 이해가 안 됐다. 그랬는데.
“있잖아. 사실, 난 거기까지도 괜찮았어. 화나고 지긋지긋하긴 했는데 참을 만은 했다고.”
요슈아의 눈이 새파랗게 타오르고 있었다.
“유모는 죽고, 걔는 손이 잘려서 기절해 있는데. 거기다 대고 우리 엄마가 뭐라고 했는지 알아?”
“…….”
“내 탓이라고.”
내가 불장난을 저질러서 유모가 죽었고, 내가 반항해서 유모의 딸이 불구가 되었다고.
“그 소릴 듣자 너무 화가 나서, 엄마를 죽여 버릴 뻔했어. 도저히 못 참겠더라고. 내가 다른 건 다 참겠는데 그건 정말이지….”
찰나의 순간, 그의 눈에 섬뜩한 살기가 어렸다. 그러나 익숙하게 분노를 갈무리한 요슈아가 단숨에 말끔해진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서 나온 거야. 내 손으로 엄마를 죽일까 봐. 아니면 뭐, 덤볐다가 내가 엄마 손에 죽을지도 몰랐고.”
한참이나 말을 잇지 못하던 차라가 어렵사리 말문을 열었다.
“괜찮겠어? 이대로 돌아가도?”
“바뀐 게 없으면 나도 안 가지. 그런데 네가 가져온 엄마 편지에 사과하는 말이 줄줄 적혀 있었어. 고향으로 쫓아냈던 유모의 딸도 다시 만나게 해 주겠다고 하고.”
“그걸 믿어?”
차라는 충동적으로 물었다. 요슈아를 데려가는 것이 제일 중요한 임무란 걸 알면서도.
“안 믿으면, 언제 돌아가실지 모르는 황제 폐하 밑에서 계속 숨죽이고 있으라고?”
“…….”
“너도 알리오나 봐서 알잖아. 얼마나 잔인한 사람인지. 난 그 사람도 싫어. 딱 하나, 날 그 지옥 같은 집에서 데리고 나와 준 것만이 고마울 뿐이야.”
“내 말은, 만약 네 어머니가 너를 꾀기 위해 거짓 사과를 했다면 어떡할 거냐는 거야.”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특히 막다른 곳으로 몰린 사람일수록 그랬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을 돌아볼 여유도, 달라지고자 노력할 힘도 남아 있지 않으니까.
“걱정하지 마. 별로 기대는 안 하니까.”
요슈아가 깍지 낀 손으로 뒷머리를 받치며 빙긋 웃었다.
“게다가 난 돌아가 봤자 엄마랑 또 싸우기만 할 거야. 엄마는 또다시 나를 동부의 후계자로 세우려 들 테고, 나는 거기에 반항할 테니까. 미쳤냐, 내가? 황태자도 싫다고 박차고 나왔는데 그보다 못한 자리에 들어앉게?”
“너다운 소리다.”
차라도 그를 따라 웃었다.
“황태자도 싫다, 동부의 후계자도 싫다. 그럼 앞으로 어떡할 거야? 지금처럼 유랑하고 살게?”
“음. 사실 생각해 둔 바가 있긴 한데….”
그 질문만을 기다렸다는 듯 신나게 입을 열던 요슈아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 차라는 의아한 기색으로 고개를 돌렸다.
언덕 아래로 깔린 드넓은 평원.
그 양쪽으로 까마득한 대군이 펼쳐져 있었다.
“맙소사….”
차라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요슈아는 담담한 표정으로 검집을 세게 매듭지었다.
“다행히 늦진 않았네. 가자.”
요슈아가 앞서 나갔다. 차라는 울렁거리는 속을 참으며 재촉하듯 가일의 어깨를 두드렸다.
구불구불한 내리막길이 이어지는 가운데, 평원을 감도는 전운이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