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2화 (152/328)

“여긴 대체 또 어디야!”

요슈아가 맨땅을 걷어차며 신경질을 부렸다. 그 옆에서 차라는 힘없이 엎어졌다.

“난 이제 무리야…. 더는 못 걸어….”

“얼씨구. 반쯤 업혀 왔으면서 무슨.”

요슈아의 빈정거림에도 차라는 엎어진 그대로 미동조차 없었다. 하기야 육체노동과는 거리가 먼 도련님이 한 달이 넘는 대장정을 견뎌 왔으니 체력이 바닥날 만도 했다. 요슈아는 멋쩍게 뺨을 긁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푸릇푸릇 새싹이 돋아나는 봄이었다. 바람이 지나간 곳마다 색색의 들꽃이 흐드러지고, 크고 작은 나무들이 연한 나뭇잎을 피웠다. 고즈넉한 시골 정경에 일말의 흥미도 없던 요슈아조차 절로 마음이 평화로워지는 광경이었다.

문제는 지금 이런 곳에 있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갑갑한 심정으로 머리를 헤집던 요슈아는 문득 저 멀리서 복면을 쓴 누군가와 이야기를 주고받는 가일을 발견했다. 살육과는 한참 거리가 멀어 보이는 희멀건 얼굴에 엷은 미소가 올라 있었다.

물끄러미 그를 뜯어보던 요슈아가 툭툭 발로 차라를 건드렸다.

“야.”

“왜….”

“가일 좀 불러 봐.”

“네가 불러….”

“아, 빨리.”

요슈아는 차라를 툭툭 차며 채근했다. 한 바퀴 굴러갔음에도 요슈아가 졸졸 따라와 계속 건드리자, 참다못한 차라가 벌떡 윗몸을 일으켰다.

“가일!”

우렁찬 소리에 가일이 퍼뜩 이쪽을 돌아보았다. 다시 엎어진 차라를 대신해 요슈아가 힘차게 손을 흔들었다. 가일이 여전히 엷은 미소를 띠고 다가왔다.

“차라 도련님. 무슨 일이십니까?”

“아, 그게. 우리 왜 아직도 애먼 데를 헤매고 있나 해서.”

대답 없는 차라를 대신해 이번에도 요슈아가 해맑게 대꾸했다. 가일의 표정이 짐짓 흐려졌다.

“송구합니다. 이 일대에 저지대가 많아 안개 낀 곳을 피하다 보니 그만….”

“아니, 알리오나랑 헤어진 곳에서 그냥 동쪽으로 쭉 직진했으면 됐잖아. 당장 어제 갈림길에서 내가 주장했던 방향으로만 갔어도 진작 반란군 진영에 도착했을걸?”

“송구합니다.”

가일이 연거푸 사죄했다. 요슈아가 앓는 소리를 내며 귓구멍을 후비는데, 차라가 엎어진 그대로 불쑥 끼어들었다.

“난 오늘은 더 이상 못 가.”

“아, 진짜. 야, 너 안 일어나?”

“못 가! 못 간다고!”

“그럼 도련님께선 여기 남아 계시겠습니까?”

기다렸다는 듯 가일이 치고 들어왔다. 생각지도 못한 말에 요슈아가 멍하니 눈을 껌벅였다.

“얘를, 여기 두고 간다고?”

“물론 저희 중 일부가 도련님과 함께 남아 있어야겠지요. 전하께선 시급히 반란군 진영에 합류하셔야 하는데, 도련님께선 이미 지치셨으니 여기서 갈라지는 것이 최선책으로 여겨집니다만.”

“어….”

요슈아가 가일과 차라를 번갈아 보며 말을 흐렸다. 그때, 차라가 후들거리는 다리로 힘겹게 일어섰다.

“아냐. 나 이제 괜찮은 것 같아.”

누가 봐도 죽어 가는 얼굴이었지만.

요슈아가 눈치껏 그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맞아. 얘가 보기보다 강골….”

어깨동무를 하기 무섭게 차라의 연약한 다리가 픽 꺾였다. 다시 엎어진 차라의 모습에 요슈아가 눈알을 굴리며 은근슬쩍 손을 내밀었다.

“어…. 내가 업고 갈게?”

“응. 얘가 업고 간대.”

요슈아의 손을 붙잡고 일어난 차라가 죽일 듯이 그를 째려보며 말했다. 가일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탄식했다.

“도련님. 이 앞으론 전쟁터입니다. 지금까지 황제의 추격자들을 상대했던 것과는 비할 바가 못 됩니다. 도련님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여기 머무시는 걸 권해 드립니다.”

“하지만 난 예후르를 만나야 해요.”

“전투가 끝난 뒤에 만나 보시면 됩니다.”

“그걸 막으러 온 거잖아요, 지금!”

차라가 답답하다는 듯 외쳤다. 한 달 넘게 굴러다니며 겨우 코앞까지 왔는데, 이제 와 포기하라는 것이 당최 이해가 안 갔다.

“대체 왜 그래요? 요슈아 말대로 알리오나랑 헤어진 뒤부터 되게 이상한 거 알아요? 혹시 예후르가 나는 전쟁터로 데려오지 말라고 그랬어요?”

“아뇨, 전하께선….”

“아니면 됐네! 예후르는 내 말을 따르라고 했다면서요! 난 갈 거예요! 말리지 마요!”

차라가 씩씩거리며 가일을 홱 지나쳐 갔다. 요슈아가 그의 뒤를 따라붙었다.

“사도님, 사도님.”

“요슈아. 네가 생각해도 나는 여기 남는 게 나을 것 같아? 내가 가면 폐만 끼칠까?”

차라가 불쑥 물었다. 엉겁결에 그를 따라 멈춰 선 요슈아가 멀뚱히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음…. 그럴지도?”

“야.”

“그런데 나라고 무슨 큰 도움이 되겠어? 그냥 몇 명 더 죽이고 마는 거지.”

“…….”

“전쟁을 멈추고 싶다며. 엘피도 공작을 설득하든, 아니면 다른 방법을 강구하든, 그건 오직 너만이 할 수 있는 일이야. 천사의 사랑을 받는 너만이.”

슬며시 뒤돌아선 차라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내가… 천사의 사랑을 받는다고?”

“그럼. 네가 괜히 사도님이겠어?”

요슈아가 씩 웃었다.

차라가 그의 말을 곱씹는 동안, 뻐근한 어깨를 돌리며 고개를 틀던 요슈아는 우연히 가일을 보았다. 그는 급히 전서구를 날려 보내고 있었다. 지긋하게 그 모습을 지켜보던 요슈아의 눈이 슬쩍 가늘어졌다.

***

“전하! 안 됩니다, 전하!”

막시모가 애타게 부르짖으며 눈앞에서 휘날리는 망토를 향해 손을 뻗었다.

“아델라이데 아가씨는 무사하실 겁니다! 라발의 귀족이라는 신분을 밝혔으니 함부로 손을 대진 못… 전하!”

만류하는 손길도 뿌리치며 성큼성큼 걸어 나가던 예후르의 앞으로 백룡이 바람을 일으키며 내려앉았다. 다급해진 막시모가 무작정 그의 팔뚝을 붙들었다.

“이대로 떠나시면 안 됩니다! 이들, 반란군은 어쩌고요! 삼만 적군이 코앞인데 용들이 죄 떠나 버리면….”

예후르는 개의치 않고 백룡의 고삐를 잡았다. 그러곤 등자에 발을 꿰며 안장에 오르려는데, 소식을 들은 이리니 페임하른이 황급히 달려왔다.

“엘피도 공작…? 도대체 지금 어딜 가려는….”

예후르는 대답 없이 휙 도약하여 높은 안장 위로 올라탔다. 기다렸다는 듯 백룡이 날개를 펼치자, 돌풍이 몰아닥치며 몇몇은 버티지 못하고 맥없이 나동그라졌다.

“공작!”

이리니가 황망히 그를 잡으려 뛰어들자, 막시모가 몸을 날려 그녀의 허리를 잡아챘다.

“가, 각하! 엘피도 공작 전하께선 지금 위스누아의 기습 공격을 막으러 가시는 겁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위스누아라니!”

“위스누아에서 고용한 바스토뉴의 용병단이 빠르게 다가오고 있습니다! 아마도 탐보프 군과 합세하여 앞뒤로 우릴 공격하려는…. 젠장!”

벌써 저만치 멀어진 예후르를 따라 나머지 용 기병대도 서둘러 비상하고 있었다. 막시모는 죽어라 달려서 막 날갯짓을 하려는 용 베판타니아를 붙잡았다.

“클로디아!”

“베, 베판타니아! 잠깐 멈춰 봐!”

신나게 날아오르려던 용을 간신히 잠재운 클로디아가 고개를 내밀었다. 막시모가 더 기다리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애들 중에 네가 제일 빠르잖아! 네가 여기랑 오가면서 상황을 좀 전달해 줘! 할 수 있지?”

“알겠어요. 막시모 씨도 몸조심해요.”

클로디아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고삐를 잡아당겼다.

확 솟아오르는 용의 날갯짓에 절로 나자빠진 막시모가 반쯤 얼이 빠진 표정으로 멀어지는 용 기병대를 바라보았다. 소식을 들을 엘피도 공작의 반응이 무섭긴 했지만, 설마 이 정도일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한바탕 난리 끝에 열댓 마리 용이 모두 날아가 버리자, 반란군 진영에는 불안한 속삭임이 오가기 시작했다.

틸브레히트를 비롯한 동부의 유력 귀족들이 고꾸라지고 방벽 수비대 출신들이 수뇌부를 채우기 시작하면서부터, 노르투그의 깃발보다 엘피도 공작의 깃발이 더욱 칭송 받던 군대였다. 어느덧 반란군의 구심점이 된 공작이 별안간 바람같이 떠나자 불길한 기운이 퍼져 나가고 있었다.

예후르가 갑자기 자리를 박차고 나갈 때부터 충분히 예상 가능했던 상황에 막시모는 참담한 심정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삼만 대군을 앞둔 상황이었다. 군의 사기가 찌를 듯 높아도 모자랄 판국에 찬물을 갖다 부은 격이었다.

그러나 난데없는 이 상황에 가장 동요하고 있는 것은 이리니 페임하른이었다. 예후르가 떠난 자리에 홀로 우두커니 선 그녀는 파르라니 질린 얼굴로 손끝을 벌벌 떨고 있었다.

“죽긴 누가 죽습니까. 내가 죽으면, 누가 당신을 이끌어 준다고.”

심장이 엇박자로 뛰기 시작했다.

“당신 혼자선 아무것도 아니지만, 내가 이끌어 준다면 가능해요.”

나는 아무것도 아니야.

“오직 나만이 할 수 있습니다.”

나는 불가능해.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위태로운 그녀를 여기까지 끌고 온 것은 빌헬미나를 향한 복수심도, 죽은 자들에 대한 죄책감도 아니었다. 다름 아닌 엘피도 공작이었다. 그가, 무너지는 그녀의 머리채를 휘어잡아 여기까지 끌고 왔다. 그가 없으면 아무것도 아닌 그녀를, 여기까지.

그런데 이제는 그가 없다.

순식간에 발아래가 무너져 내렸다. 부모 잃은 아이처럼 모든 것이 막막해졌다. 그가 떠난 곳에 남은 일만 군대와 등 뒤에 두고 온 동부의 무게가 숨막힐 듯이 어깨를 짓눌러 왔다. 차라리 이 모든 것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그때, 누군가 그녀의 어깨를 꽉 잡으며 정신을 일깨웠다.

“각하!”

이리니는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머리와 수염이 하얗게 센 노장이 얼굴을 일그러트린 채 재차 고함을 질렀다.

“각하, 정신 차리십시오!”

이리니는 가까스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쉰 노장이 잇새로 빠르게 속삭여 왔다.

“지금 바스토뉴 용병단의 우두머리를 불렀습니다. 막사로 가시지요. 일단은 그자를 다그쳐 정말로 우리의 등 뒤를 노리고 있는 세력이 있는지 확인하셔야 합니다.”

그러면서 노장은 깍듯하게 고개를 숙였다. 멀거니 그의 정수리를 응시하던 이리니가 여전히 몽롱한 정신으로 발을 뗐다. 불어오는 바람에 무너질 듯 아슬아슬한 걸음걸이였다.

막사에는 이미 용병이 와 있었다. 그는 이미 이런 상황을 예상한 듯 꺼림칙한 기색을 내비치고 있었다.

이리니가 천천히 자리에 앉자, 노장이 큰 소리로 용병을 몰아세웠다.

“자네! 바스토뉴의 용병단이 우리의 뒤를 노리고 기습을 준비 중이라는 것이 사실인가!”

“그걸 제가 어찌 압니까?”

“이미 얘기 다 들었네! 도대체 위스누아에게 얼마를 받아먹었길래 이런 중요한 시점에 우릴 배신해! 바스토뉴는 우리와 맺은 밀약을 잊은 것인가! 그대들은 이토록 신의가 없느냔 말이야!”

“밀약을 잊었다니요? 그건 상관없는 얘기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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