쐐기는 오스트라트 전진 기지와 후방을 오가는 보급 부대가 박아 둔 것이 아니다. 안개 끼는 날이 많은 이 이름 없는 마을의 주민들이 외부와 통하기 위해 박아 둔 것이었다.
“좋아, 어서 가렴.”
“아가씨.”
“난 걱정하지 마. 스스로만 걱정하렴. 넌 영특한 아이니 무사히 달아날 수 있을 거야.”
울 것 같은 얼굴로 그녀를 애타게 바라보던 마샤가 눈 꽉 감고 달리기 시작했다. 이내 세르난도의 하녀들이 달려와 페기를 에워쌌다.
“아가씨! 저희들을 대동하셔야지요!”
“…마차가 너무 갑갑해서.”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저 애는 어딜 가는 건가요?”
“볼일이 급하다더구나.”
하녀들이 은밀한 시선을 주고받더니, 개중 하나가 슬그머니 마샤의 뒤를 쫓아갔다. 나머지는 캐물을 틈도 주지 않겠다는 듯 부산스럽게 그녀를 성의 안쪽으로 안내했다.
“많이 피곤하시죠? 어서 들어가세요. 요리사가 식사를 준비하고 있으니 곧 석찬을 드실 수 있을 거예요.”
페기는 마샤가 달려간 방향에서 애써 시선을 돌렸다. 극도의 긴장감으로 위장이 꽉 조여들었다.
준비된 방에 도착해서도 그녀는 긴장감을 억누를 수 없었다. 하녀들은 석벽으로 둘러싸인 실내는 오래간만이지 않느냐며 화려한 태피스트리를 걸어 댔지만, 그런 건 눈에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의자에 앉아 초조하게 아랫입술을 쥐어뜯는 것이 고작이었다.
시퍼렇게 날이 선 그녀의 기분을 눈치챘는지 하녀들도 점차 입을 다물었다. 고요한 정적 속에서 페기는 집착적으로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한번 깨닫고 나니, 나날이 변해 가는 얼굴의 모습이 더욱 눈에 띄었다. 이젠 정말로 남은 시간이 얼마 없었다.
그때, 문밖에서 단단한 군홧발 소리가 들려왔다. 얼어붙은 시선이 문가로 꽂히기 무섭게 문짝이 뜯어질 듯 열렸다.
병사들이 우수수 쏟아져 들어왔다. 그리고 벽을 따라 기립한 병사들 사이로 검은 망토를 두른 만포르차 가문의 기사가 뚜벅뚜벅 방 안으로 들어왔다.
“아델라이데 아가씨.”
몇 발짝 떨어진 곳에 멈춰 선 기사가 고압적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함께 가 주시죠.”
말없이 그를 쏘아보던 페기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기사를 뒤따르는 그녀의 주위를 병사들이 둘러쌌다. 페기는 남몰래 치맛자락을 꽉 틀어쥐었다.
기사를 따라 도착한 곳은 천장이 반쯤 날아간 커다란 방이었다. 연회장으로 쓰였던 곳인지 곳곳에 샹들리에의 잔해가 남아 있었다. 그 중앙에 앉아 기사와 용병들을 두르고 있던 세르난도가 금이 간 표정으로 그녀를 맞이했다.
“내게 할 말은 없습니까?”
늘 느른하게 풀어져 있던 얼굴이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 일그러져 있었다. 페기가 잠자코 있자, 세르난도가 주먹을 부들부들 떨며 기사에게 턱짓했다.
기사가 그녀에게 구겨진 종이를 넘겼다. 페기는 느릿하게 종이를 펼쳐 보았다.
적은 안갯속으로 밀어 넣었습니다. 당분간 습지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니 당면한 전투에 집중해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