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리엘 대성당에 성화가 꺼지는 참사가 일어났었지요. 그때 이미 사도의 권위는 크게 실추되었습니다. 천사께서 보시기에 마땅치 않으셔서 불과 2년 만에 새로운 사도를 낙점하신 겁니다. 그리고 만인이 보는 앞에 나타나 새로운 딸에게 무한한 축복을 내려 주신 거죠.”
세르난도가 양팔을 펼치며 열성적으로 말했다. 뚫어져라 접시를 내려다보던 페기가 입술을 작게 달싹였다.
“그럼 알비야 공작 전하께선 권능을 보이실 수 있겠군요.”
“…권능이요?”
“사도는 성스러운 불꽃을 일으킬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이전의 사도는 빈 성화대에 불을 붙이지 못하여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된 것이고요.”
“…….”
“거짓된 사도라면 몰라도, 천사께 무한한 축복을 받으신 알비야 공작 전하는 하실 수 있겠지요?”
세르난도는 가만히 웃기만 했다. 대답은 조금 늦게 나왔다.
“…예. 물론이죠.”
거짓이다.
남몰래 나이프를 꽉 틀어쥔 페기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기 위해 입 안의 여린 살을 깨물었다.
동시에 존재할 수 없는 같은 천사의 사도.
그러나 페기는 되살아났고, 동시대에 천사 예리엘의 사도가 둘이었다. 둘 중 하나가 거짓일 수밖에 없다면 참과 거짓을 가르는 기준은 무엇일까. 당연히 권능을 증명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로 귀결된다.
과거 권능을 증명하지 못하여 죽음의 구렁텅이로 빠졌던 그녀는 도리어 증명함으로써 제자리를 찾을 수 있다는 사실에 희열을 느꼈다. 그러나 이 모든 상상은 예후르가 되살아난 그녀의 존재를 인정했을 때만 가능한 전개였다.
들떴던 감정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그녀는 더 이상 목숨을 걸고 도박을 할 계제가 못 되었다. 제자리를 되찾고 싶은 욕망보다도 생존의 욕구가 지대했다. 죽느냐, 사느냐. 반반의 확률에 남은 생을 걸 수는 없었다.
“그나저나 아가씨는 혹 약혼하셨는지.”
불현듯 들려오는 매끄러운 목소리에 페기가 고개를 들었다. 세르난도가 거북하리 만치 열띤 눈으로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아니요. 아직.”
“보통 라발의 명문 귀족들은 성년이 되기 전에 약혼을 마치지 않던가요?”
“원래 수도원으로 들어갈 생각을 했던지라.”
세르난도가 의외라는 듯 눈썹을 치켜올렸다. 페기가 손사래를 쳤다.
“한때의 고민이었죠. 지금은 사촌 오라버니가 제 혼처를 찾고 있답니다.”
“흠….”
방만하게 의자에 파묻힌 세르난도가 턱을 깊게 괴었다. 검지로 의자 손잡이를 연신 두드리던 그가 문득 물었다.
“저는 어떠십니까?”
“…네?”
“몇 년 내로 어머니께서 물러나시고 제가 위스누아의 군주가 될 것입니다. 라발 명문가의 아가씨께서 보시기에 위스누아는 작은 도시일지 모르나, 교국이 저희 만포르차 가문의 수중으로 떨어졌지요. 알비야 공작 전하와 퀴테리아 추기경이 원탁을 꽉 틀어쥐고 있으니까요.”
예상치 못한 제안에 당황한 페기가 애써 복잡한 머릿속을 가다듬었다.
“감사한… 말씀이지만, 제가 알기로 총사께선 이미 결혼을 하셨다고….”
“아내는 몇 년째 병상에 누워 있습니다. 올해를 넘기지 못할 것이라 하더군요.”
영롱한 촛불 너머로 보이는 그의 얼굴에 와인처럼 진한 미소가 올라 있었다. 페기는 역겨움을 참으며 가까스로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외람되지만 저는 지위 고하에 관계없이 절 사랑해 주는 사람과 여생을 함께하고 싶습니다.”
확실히 피아제 가문이 탐나는 연줄이긴 하지.
페기는 당혹감을 몰아내며 냉정하게 머리를 가라앉혔다. 황태자의 최측근인 피아제 백작의 위상도 그렇거니와, 위스누아로선 라발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고 싶을 것이었다. 현재 라발은 알비야 공작 비올라가 교황이 되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기기 때문에.
“꼭 저는 아가씨를 사랑해 주지 않을 사람이라고 들리는군요.”
“틀린 말도 아니지 않나요?”
어처구니없다는 듯 피식 웃은 세르난도가 슬며시 팔을 뻗어 페기의 손을 잡았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페기가 바짝 굳었다.
“정치적인 이득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도 아가씨께 호감이 있어요.”
“…….”
“뭐라고 해야 할지…. 나날이 아가씨께서 아름다워지십니다. 이런 걸 사랑에 눈이 멀었다고 하던가요?”
농담처럼 덧붙인 말에도 페기는 웃을 수 없었다. 생전 처음 받아 보는 청혼임에도 가슴이 떨리는 대신 차게 얼어붙었다.
나날이, 아름다워진다고.
그녀는 황망히 의자를 뒤로 밀며 일어섰다.
“속이 안 좋아서… 먼저 일어나 보겠습니다.”
놀라 한마디 하려던 세르난도조차 창백하게 질린 그녀의 안색을 확인하곤 별말을 하지 못했다. 페기는 정신없이 그의 막사를 빠져나왔다.
얼굴이 나날이 달라지고 있다.
은빛 머리칼이 발견되었을 때부터 각오했던 일이나, 생각보다 변화가 빨랐다. 매일같이 똑같은 얼굴을 보고 살던 그녀나 마샤보다, 그녀를 잘 모르던 세르난도가 더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는 변화였다.
“마샤, 당장 아무 들짐승이라도 잡아….”
황급히 막사 안으로 들어서던 페기가 우뚝 굳었다. 마샤가 어색하게 일어섰다.
“아가씨….”
막사에는 처음 보는 하녀들이 있었다.
“누구지?”
마샤가 채 설명하기도 전에 페기가 날카롭게 반응했다. 예상했다는 듯 하녀들이 다가와 공손하게 인사했다.
“총사께서 보내셨습니다. 지금부터 아가씨의 수발을 돕겠습니다.”
“필요 없으니 돌아가라.”
“그리 말씀하시거든, 적어도 저희가 아가씨의 곁을 지켜야 용병들이 더 이상 아가씨를 의심하지 못하리라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입술을 꽉 깨물고 하녀를 쏘아보던 페기가 아무 말 없이 구석진 의자에 가 앉았다.
대놓고 붙인 감시자였다.
하긴 뼛속까지 장사치인 사람이 고작 보급 부대 하나 바쳤다고 낯선 사람을 그리 쉽게 믿을까.
하지만 악재가 연이어 겹치니 도저히 역정을 참을 수가 없었다. 사술이 빠르게 풀리고 있었다.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얼굴로 적진을 활보하고 다닐 수는 없었다.
만약 여기서 제 정체가 발각된다면….
상상만으로도 온몸에 소름이 돋아났다. 그녀는 카니나의 페기, 소명의 천사 예리엘의 현신. 똑같이 예리엘의 현신인 알비야 공작을 교황으로 추대하기 위해 혈안이 된 위스누아가 그녀를 가만둘 리 없었다. 예후르는 반반의 확률이라도 있지, 이곳에선 오직 죽음뿐이었다.
페기는 초조하게 아랫입술을 쥐어뜯었다. 방법을 생각해야 했다.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
이제는 마냥 안드레아를 기다릴 수만은 없게 되었다. 제아무리 안드레아가 변신의 귀재라 할지라도 이 삼엄한 감시를 뚫고 그녀와 접촉하는 것은 무리였다.
비슷한 맥락으로 그녀가 직접 사술을 부리는 것도 힘들어졌다. 당장 저녁 식사 전까지만 하더라도 행여 상황이 어려워지면 들짐승이라도 잡아다 직접 사술을 부릴 생각이었으나, 이렇듯 대놓고 감시자가 따라붙는 상황에선 그마저 불가능했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페기는 떨리는 숨을 내뱉으며 참담하게 눈가를 감싸 쥐었다.
시간이 없었다.
***
이튿날, 위스누아의 군대는 구릉을 내려가 습지로 진입했다.
날이 풀리는 봄 여름까지 안개가 기승을 부린다는 말대로, 고작 두어 시간 만에 군은 앞뒤를 확인할 수 없는 자욱한 안개 속에 갇히게 되었다. 하늘의 태양마저 어렴풋할 뿐이라 방향을 가늠하기 참으로 난감했으나, 그들에겐 보급 부대를 따라 여러 번 습지를 오갔던 페기가 있었다.
“스무 걸음마다 쐐기를 박아 두었어요. 그 쐐기만 따라가면 돼요.”
그 말대로 거미줄처럼 정신없이 교차하는 길목마다 쐐기가 박혀 있었다. 생각보다 수월한 방법에 세르난도는 흡족해했으나, 하루 이틀 시간이 흐르자 군대는 생각지도 못한 난관에 부딪혔다.
“총사. 후미의 병사들이 또 낙오되었습니다.”
잘 보이지도 않는 쐐기를 따라 이동하는 속도는 당연히 느릴 수밖에 없었고, 한 치 앞도 가늠할 수 없는 안개는 자연스레 지루함을 선사했다. 내가 보지 못한다는 것은 적도 나를 보지 못한다는 뜻이니, 처음에는 바짝 긴장했던 군사들도 점차 느슨하게 풀리기 시작했다.
열이 늘어지고 늘어지자, 앞선 병사를 잃어버리는 경우가 잦아졌다. 진군이 멈추는 횟수가 늘어나며 안 그래도 느린 속도가 더욱 더뎌졌고, 도저히 끝이 보이지 않는 안개의 향연에 많은 군사들의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그렇게 사흘쯤 지났을까.
군대는 쓰러져 가는 한 마을에 도착했다. 무너진 성터를 중심으로 옹기종기 모여든 마을이었는데, 특이하게도 주민들 모두가 벙어리였다.
“봄 여름이면 안개로 뒤덮이는 데다, 탐보프 본토와 동부의 경계라 인적도 드문 곳이니까요. 쫓겨난 사람들이 모여 살긴 안성맞춤이죠.”
그 말대로 주민들의 행색은 지극히 남루했다. 게다가 외부인에 대한 경계가 어찌나 극심한지, 모조리 숨어드는 통에 붙잡아 말을 묻기도 난감했다. 겨우 끌고 와 질문을 던져 보았자 이해할 수 없는 수화만 돌아올 뿐이었다.
병사가 말 못 하는 주민을 다그치는 꼴을 무료히 지켜만 보던 세르난도가 피로한 기색으로 손을 내저었다.
“됐다. 오늘은 여기서 밤을 보내도록 하지.”
세르난도를 비롯한 고위 기사들은 반쯤 무너진 성터로 들어갔다. 본디 동부의 국경을 경비하는 곳이었으나, 십여 년 전 황위 쟁탈전에서 승리한 빌헬미나가 의도적으로 부순 성이었다.
“하룻밤 정도는 쓸 만하겠군.”
탐보프와의 접경에 남은 동부의 성치고 멀쩡하게 남은 것이 없으니, 이만하면 성한 축이었다.
낙오된 후미의 병사들과 동행했던 페기의 마차는 그로부터 얼마 후에 도착했다. 세르난도가 붙여 둔 하녀들과 종일 동석했던 페기는 마차의 문이 열리기 무섭게 마샤의 손을 잡아끌었다. 등 뒤에서 하녀들이 급히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으나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바삐 오가는 병사들을 밀치며 후미진 성벽 아래 달한 페기가 무작정 마샤의 손에 종잇조각을 쑤셔 넣었다.
“아, 아가씨?”
“지금 당장 인적 드문 나무에 이걸 묶으러 가렴.”
“이걸요?”
“너무 눈에 띄진 않되, 의심하는 자 한둘은 네 뒤를 몰래 쫓아야 한다. 일부러 들켜야 한다는 소리야. 할 수 있겠니?”
페기의 얼굴과 손안에 든 종이를 번갈아 보던 마샤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할 수는 있는데….”
“그리고 바로 도망쳐. 안개가 자욱하니 널 오래 뒤쫓진 못할 거야.”
“네?! 그럼 아가씨는요! 제가 달아나면 분명 아가씨를 의심할 텐데…!”
“그게 목적이야. 난 여기서 잡혀야 해.”
마샤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페기가 그녀의 어깨를 붙들며 몰아붙였다.
“자세히 설명할 시간이 없어. 습지를 올바르게 벗어나는 방법. 기억하지?”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으로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