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9화 (149/328)

그때, 바스토뉴 용병단의 대장이 다가왔다. 세르난도를 비롯해 그를 에워싸고 있던 만포르차 가문의 기사들이 잡담을 그치며 거만한 시선을 보냈다.

“뒤처리는? 한 명도 빠짐없이 모두 죽였나?”

“예. 수레를 조금 살펴보니 무기를 운송하던 부대였던 것 같습니다.”

용병단 대장이 공손한 태도로 검을 바쳤다. 라발 특유의 우아하고 정밀한 세검이었으나, 세르난도는 몇 번 휘둘러 보곤 감흥 없는 기색으로 근처 기사에게 검을 넘겼다.

“그럼 결국 아델라이데 아가씨의 정보가 맞았다는 얘기군.”

용병단 대장이 낮게 헛기침하며 시선을 피했다. 세르난도가 조롱하듯 말꼬리를 길게 늘였다.

“왜. 어제 자네가 아델라이데 아가씨의 말을 따라간다면 십중팔구 복병을 만나리라 장담하지 않았나. 그런데 복병은커녕 허술한 보급 부대나 맞닥트렸군.”

“오, 오늘은 그냥 운이 좋아서….”

“그래, 운이 좋아서 이렇게 좋은 무기들을 얻고 말이야. 횡재했지. 그런데 복병을 숨겨 두려면 여기 계신 아델라이데 아가씨와 동부 반란군이 아직도 내통하고 있어야 하는데, 그건 운과는 별개의 문제가 아닌가?”

“감시를 받고 있지 않았습니까! 분명 때를 노리고 있는 겁니다!”

“때를 노리느라 우리에게 보급 부대가 이용하는 길을 알려 준다고? 억지도 정도껏 부려야지. 아델라이데 아가씨가 알려 준 길이야말로 오스트라트 전진 기지까지 이어지는 최단 경로임을 진정 모르겠나?”

세르난도가 지겨운 기색으로 죽은 반란군의 목을 걷어찼다. 그러나 평소라면 이쯤에서 물러났을 용병단 대장도 오늘만은 고집을 부렸다.

“여기까지는 그럴지 몰라도 내일부터는 후회하실 겁니다. 저 구릉 아래를 한번 내려다보십시오. 저 아래부턴 봄 여름으로 안개가 자욱하게 끼는 습지입니다. 안갯속으로 들어가면 당장 눈앞의 방향을 잡기도 힘들어지는데 이 지대에 능통한 길잡이 하나 없이 어떻게 저 습지를 관통하려 하십니까!”

“그 또한 아델라이데 아가씨가 방도를 알려 주었지.”

“다시 한 번만 생각해 주십시오. 자칫 잘못하다간 저 안갯속에서 빙빙 돌기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보단 시일이 조금 더 걸릴지라도 습지를 돌아가는 편이….”

“오늘 아침 척후병의 연락을 자네도 듣지 않았나. 이미 반란군은 서쪽으로 이동할 준비를 끝마쳤다고. 뻔히 보이는 최단 경로를 두고 멀리 돌아갔다가 기습할 때를 놓치면, 자네는 그 사달을 어찌 책임질 텐가?”

“그러니까 저 귀족의 정체를 확인한답시고 진군을 멈추지만 않았어도…!”

울컥하여 쏘아붙이던 용병단 대장이 아차 하며 입을 다물었다. 그러잖아도 그를 못마땅하게 여기던 만포르차 가문의 기사들의 눈빛이 더욱 냉랭해졌다.

느긋하게 팔짱을 낀 세르난도가 헛웃음을 머금었다.

“하여, 그것이 불만인가?”

용병단 대장이 불편하게 시선을 틀었다. 세르난도의 짙푸른 눈이 뱀처럼 그를 옭아맸다.

“그 며칠의 휴식은 아델라이데 아가씨의 정체를 확인하기 위함이기도 했지만, 강행군에 지친 병사들을 달래기 위함이기도 했다. 자네가 습지를 돌아가는 경로를 택한 덕에 밤낮없이 달리느라 다들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었거든. 이러다가 정작 기습을 앞두고 다들 지쳐 나가떨어진다면, 그보다 더한 꼴불견이 어디 있겠나?”

“…용병들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 정도 강행군에는 익숙하니….”

“글쎄. 그걸 판단하는 건 이 군의 총사인 나다. 만에 하나라도 용병들의 체력이 자네의 뜻을 따라 주지 않는다면, 내 자네에게 미리 건넨 선금만 날리는 꼴이 되지 않아?”

세르난도의 빈정거림에 만포르차 가문의 기사들이 조소를 흘렸다. 그러나 따가운 눈총에도 용병단 대장은 무섭도록 발치만 쏘아보았다.

“돈값은 제대로 할 겁니다. 전쟁터에 제대로 닿기만 한다면요.”

“…….”

“하지만 저 습지를 라발의 귀족 아가씨의 말 한마디만 믿고 들어갈 순 없습니다. 라발이 반란군의 원조를 끊으면 모를까, 지금으로선 반란군과 한패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도저히 지우지 못하겠습니다.”

확실히 이치에 맞는 말이었다. 세르난도가 골똘히 고개를 기울이자, 잠자코 상황을 지켜보던 페기가 끼어들었다.

“엊그제 피아제 백작에게 제가 풀려났다는 친서를 보냈어요. 비록 황제 폐하께서 계신 누미디아까지 소식이 닿는 데는 시일이 걸릴 테지만, 분명 오래지 않아 라발의 원조가 끊길 겁니다.”

“누미디아까진 여기서 말을 타고도 한 달이 넘게 걸립니다! 저희는 당장 내일의 경로를 정해야 하는데…!”

“그리도 내가 못 미덥다면, 총사께서 자네들은 어찌 믿으시지?”

페기의 싸늘한 눈빛에 용병단 대장이 흠칫했다.

“라발이 반란군에게 원조를 하고 있다면, 바스토뉴의 용병들은 반란군의 중추를 형성하고 있어. 내 듣기론 바스토뉴와 동부의 반란군이 서로 밀약을 맺었다던데?”

“그, 그건….”

“물론 바스토뉴의 용병들은 부자가 적으로 만나도 물러나지 않는 기개로 유명하다지만, 바스토뉴가 동부로부터 무언가 대단한 것을 약속받았다면 이번만은 상황이 조금 달라지지.”

“…….”

“어때. 나는 바스토뉴의 족장이 동부로부터 약속받은 것이 무엇일지 대강 짐작이 되는데. 자네는 어찌 생각하나?”

칼을 숨긴 눈이 슬쩍 가늘어졌다. 용병단 대장이 대답을 망설이자, 세르난도가 가볍게 양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결정은 이미 내렸다. 오늘은 이곳에서 밤을 지새우고, 내일부터 구릉을 내려가 습지를 횡단하도록 하지.”

“총사!”

“내가 아델라이데 아가씨를 믿는다. 총사인 내가. 자네는 지금 총사의 믿음을 따르지 못하겠다는 건가?”

높아지는 목소리에 점점 역정이 서렸다. 페기는 슬그머니 뒤로 물러나, 고압적으로 용병단 대장을 찍어 누르는 세르난도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명목상의 총사, 저속하게 말하자면 일개 돈줄.

군사적인 경험이 모자란다면 경험 많은 용병단에게 만사 맡기는 것이 현명한 선택일 테지만, 그러기엔 이번 일로 용병단에게 지불한 금액이 만만찮았던 모양이다. 더불어 용병단에 대한 불신과 세르난도의 오만한 성정이 합쳐져 이렇듯 아둔한 개입을 낳았을 터.

덕분에 짙은 안갯속으로 적군을 이끌 수 있게 된 페기에겐 행운이었으나, 본의 아니게 자꾸 자신이 언급되는 상황은 어쩔 수 없는 불유쾌함을 선사했다.

한마디로 세르난도는 그녀를 전면에 내세우며 용병단을 길들이려 하고 있었다. 내가 믿는 사람을 너희도 믿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요지인데, 거듭되는 공방에 날 선 용병단의 화살이 누굴 향할지는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페기는 남몰래 한숨을 집어삼켰다. 잇속에 밝은 장사치라더니, 차라리 대놓고 증오를 표출하던 틸브레히트와의 갈등이 마음은 한결 편했다.

오래지 않아 용병단 대장을 굴복시킨 세르난도가 다가와 산뜻하게 손을 내밀었다.

“아델라이데 아가씨. 저녁은 함께하실까요?”

페기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그의 손을 잡았다.

“물론이죠.”

붉은 천이 깔린 식탁 위로 진수성찬이 차려졌다. 피아제 백작의 별장에서 머물렀던 반년 전 이후로 이런 성찬을 대접받는 것이 처음인 페기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요리사를 대동하고 다니시나요?”

“네. 몇 명 데려왔을 겁니다.”

세르난도는 당연하다는 듯이 나이프를 들어 고기를 썰기 시작했다. 흠 잡을 데 없이 우아하여 도리어 우스꽝스럽게 보이는 손짓이었다.

“운 좋게 위스누아의 군세를 만나 이런 만찬을 다 받아 보는군요.”

“라발의 명문 귀족께 최대한 부족함 없는 식사를 대접하고픈 마음이지요. 만일 위스누아였다면 더 훌륭한 전통 요리를 맛보여 드릴 수 있었을 텐데 아쉬움이 큽니다. 어서 드셔 보시죠.”

페기가 예의상 미소를 지으며 포크를 들어 올렸다. 세르난도는 하인에게 와인병을 받아 손수 와인을 따라 주었다.

“이건 알비야 공작 전하께서 제게 보내 주신 와인들 중 하나입니다. 성궁으로 독점 납품되는 고급 와인이라더군요.”

와인 잔을 들어 올리던 페기의 손이 잠시 멈칫했다.

“…이런 귀한 술을 제가 마셔도 될지.”

“귀한 술이니 응당 귀한 분께 드려야지요.”

식탁에 밝혀 둔 촛불 너머로 세르난도가 그림 같은 미소와 함께 와인 잔을 들어 올렸다. 페기 역시 감사를 표하며 잔에 입술을 붙였다. 진저리 날 정도로 익숙한 향이 확 피어올랐다.

“…알비야 공작 전하와는 여전히 친밀하신 모양이네요.”

“이러니저러니 해도 열아홉 해를 같이 살았던 가족이니까요. 나이 차가 제법 많이 나 딸처럼 귀여워했었죠.”

“갑자기 그분께서 사도로 각성하셨을 때, 많이 놀라셨겠어요.”

“놀라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전 언젠가 제 누이동생이 큰일을 할 것이라 생각해 왔습니다. 어릴 때부터 몹시 영특하던 아이였으니까요.”

세르난도가 자랑스럽게 말했다. 육즙이 잘 밴 고기를 고무처럼 씹던 페기가 조용히 물었다.

“전하께선 어떤 분이신가요?”

접시에 꽂혀 있던 그의 시선이 느리게 올라왔다. 페기는 반사적으로 웃음을 머금었다.

“신실한 신도로서 늘 사도에 대해 궁금했거든요.”

“엘피도 공작을 만나 보셨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미친 사도를 어찌 사도라 할 수 있겠나요.”

그제야 세르난도가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옳은 말씀이군요. 알비야 공작 전하는 그 미친 사도와는 비할 수 없는 분이죠. 제 가족이라 드리는 말씀이 아니라, 정말로 어릴 때부터 남다르셨으니까요.”

“이를테면….”

“약혼자를 수도 없이 갈아 치우셨지요. 부모님께선 원래 그 아이를 다른 도시 국가의 수장과 맺어 줄 생각이셨는데, 남편의 내조나 하며 평생을 보내기엔 가진 재능이 아까웠죠. 본인도 그것을 알아 결국엔 피아마의 아들을 데릴사위로 들일 예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열아홉 번째 생일 연회에서 모든 것이 뒤바뀌었다.

“밤이 내린 연회 막바지, 하얀 비둘기가 내려와 그분의 손등에 성흔을 찍었지요. 연회에 참여했던 모두가 그 경이로운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의심할 여지 없이, 새로 분하여 땅으로 내려오신 소명의 천사 예리엘이셨던 겁니다.”

페기의 나이프가 느리게 고기 위를 왕복했다.

“어떤 멍청한 자들은 알비야 공작 전하께서 너무 늦은 나이에 각성했다며 수군댄다는데, 저는 오히려 그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도대체 천사께서 이번처럼 많은 이목을 받으며 내려오신 적이 또 언제 있었습니까? 보통은 아무도 모르게 왔다 가시지 않았나요?”

“…왜 그러셨을까요?”

“이유는 한 가지죠. 3년 전에 죽은 거짓된 사도.”

나이프가 우뚝 멈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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