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7화 (147/328)

“반란군이 아가씨를 납치해서 자신들을 돕게 하도록 피아제 백작을 협박했단 뜻인가요?”

“정확해요.”

세르난도가 흠, 깊은 소리를 내며 말없이 턱을 매만졌다. 페기는 물 흐르듯 말을 이었다.

“저희 피아제 가문은 손이 많은 것으로 유명하지만 친지들과의 사이가 각별한 것으로도 유명하죠. 저희 가문은 부부와 자식이 이루는 가족이야말로 번성의 기초라고 본답니다. 아실 거예요. 제 사촌 오라비 역시 약혼녀에게 수년째 정절을 지키고 있음을.”

겉보기론 누구보다 여자를 잘 갈아 치울 듯한 이시도르 피아제는 사실 티끌 한 점 없이 깨끗한 이성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생긴 것과 따로 노는 피아제 가문의 보수적인 가풍을 익히 잘 아는 세르난도도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사로잡힌 소중한 사촌을 위해 피아제 백작은 라발의 황제 폐하를 설득하여 탐보프의 반란군을 지원하도록 했다, 뭐 이런 겁니까?”

“맞아요.”

“그럭저럭 구색이 맞는 이야기긴 한데….”

세르난도는 턱을 깊이 괴었다. 흥미가 다소 가셨는지 매끈한 얼굴 위로 무신경함이 드러났다.

페기는 차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요. 황제 폐하께선 고작 신하 하나에 휘둘리실 분이 아니죠. 하지만 폐하의 연치도 이제 쉰에 다다르고 계세요. 황태자 전하께서 이미 업무의 많은 부분을 이양해 가셨죠. 그리고 그 황태자 전하의 가장 충성스러운 후견인이 누구인진 총사께서도 잘 아실 거예요.”

황태자의 외가인 피아제 백작가.

역사적으로는 뿌리 깊은 명문가의 수장이요, 사사로이는 황태자와 사촌지간인 피아제 백작은 공공연히 라발의 차세대를 이끌어 나갈 재목으로 평가받고 있었다.

세르난도가 넌더리를 내듯 두 손을 들어 올렸다.

“좋습니다. 피아제 백작이 아끼는 사촌이며, 또한 황태자 전하의 사촌이기도 한 그대를 섭섭하게 대우할 수는 없지요. 방금 들은 말의 사실 여부를 떠나 그대가 피아제 백작가의 일원임이 확인된 이상 나는 그대의 털끝 하나 건드릴 생각이 없습니다. 정중히 그대의 고향으로 모셔다드리죠.”

“아니요. 난 여기 남고 싶어요.”

세르난도의 미간에 처음으로 금이 갔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납치된 것이 작년 겨울이에요. 그동안 더러운 용병단과 예의라곤 추호도 모르는 병사들 사이에 뒤섞여 살아야 했어요. 더구나 나 하나 때문에 우리 가문이 그런 치욕을 겪었는데, 내가 어떻게 이대로 떠날 수 있겠어요?”

“마음은 잘 알겠지만 설욕은 내게 맡기고 얌전히 돌아가시는 편이….”

“나, 엘피도 공작을 봤어요.”

세르난도의 표정이 설핏 굳었다.

겉으로는 태연한 척, 페기는 탁자 아래서 주먹을 꽉 틀어쥐었다. 입으로는 예후르를 말하면서 머릿속으론 죽기 전 마지막으로 보았던 본시오의 증오스러운 얼굴을 떠올리고 있었다. 절로 눈에 번들번들한 예기가 감돌았다.

“미쳤다는 소문이 자자하더니 그 이상이더군요. 그런 미치광이가 사도인 것으로도 모자라 교황의 자리까지 넘본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에요. 불을 모시는 신실한 신도로서 가만히 두고 볼 수만은 없습니다.”

페기는 열기가 피어오르는 눈으로 세르난도를 똑바로 응시했다.

“내가 당신들을 도울 수 있게 해 줘요. 실추당한 우리 가문의 명예와 교회의 앞날을 위해서라면 난 무엇이든 할 수 있어요.”

“예를 들자면?”

“내가 이리저리 끌려다니며 무엇을 보았을지 궁금하지 않나요?”

늘어졌던 윗몸을 끌어 올린 세르난도가 음험하게 눈을 빛냈다.

“무엇을 보았죠?”

“길이요.”

“…….”

“총사의 누이동생이시자, 진정한 사도의 재목이신 알비야 공작 전하께서 교황의 자리에 오르시는 길.”

페기가 눈을 접으며 간드러지게 웃었다. 뚫어져라 그녀를 응시하던 세르난도도 천천히 입꼬리를 올리기 시작했다. 목으로 낮게 웃는 소리가 한참이나 막사를 울렸다.

이튿날부터 페기는 정식으로 그들과 동행하게 되었다. 앞으로 그녀가 정보를 제공해 주리란 설명에 용병단 대장이 의심을 버리지 못하고 이견을 내놓았지만, 세르난도에게 그대로 묵살당했다. 덕분에 페기는 별 탈 없이 압수되었던 짐과 마차 한 대를 지급받았다.

“당분간은 안전하게 지낼 수 있을 것 같아 다행이에요.”

감금되었던 며칠 동안 몹시 불안해하던 마샤는 한결 편안해진 얼굴로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페기는 모닥불의 불씨를 꺼트리며 떠날 채비를 하는 용병단을 마차의 창문 너머로 무료히 내다보았다.

“그래 봤자 칼날 위에 선 처지지. 과연 안전하다고 할 수 있을지 의문이구나.”

“그래도 총사가 아가씨를 꽤 신뢰하는 듯하던걸요. 왜, 어제도 아가씨를 못 미더워하던 용병에게 대놓고 타박을 주었잖아요.”

“신뢰라….”

문득 창밖의 세르난도와 눈이 마주친 페기가 반사적으로 미소를 지어 올렸다.

“군사적으론 무능할지 몰라도 평생 리누스 도시 연맹의 약삭빠른 장사치들을 상대해 온 정치꾼이야. 닳고 닳은 사람에게 신뢰란 말이 가당키나 하겠니.”

“그럼요?”

“글쎄….”

창밖에선 세르난도와 용병들이 오늘의 경로에 대해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페기는 용병단 대장 앞에서 유독 고압적으로 변하는 세르난도의 태도를 눈여겨보았다.

“확실한 건 나란 존재가 저 사람에게도 꽤나 유용한 패라는 거야.”

아리송한 설명에 고개를 갸웃거리던 마샤가 페기의 짧은 머리칼을 빗겨 주며 재잘거렸다.

“너무 위험한 일은 하지 마세요. 아까 용병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를 조금 주워들었는데, 도망친 막시모 아저씨를 잡는 데 결국 실패했나 봐요. 아저씨가 무사히 떠났으니 엘피도 공작 전하께도 곧 소식이 전해지겠죠.”

“위험한 일을 피할 거였으면 고향으로 보내 주겠다는 총사의 제안을 받아들였겠지. 예후르가 대응책을 마련하려면 내가 이들의 발을 얼마간 묶어 놓아야만 해.”

“아가씨도 참….”

한숨을 푹 내쉬던 마샤가 불현듯 빗질하던 손길을 멈추었다. 페기가 의아하게 고개를 틀었다.

“왜 그러니?”

“아니, 그게….”

마샤가 얼떨떨한 기색으로 페기의 머리카락 한 올을 뽑았다. 머리카락을 건네받은 페기의 표정이 싹 굳었다.

은빛이었다.

“설마… 아니겠죠?”

마샤가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페기는 빠르게 지난 나날을 되짚었다.

안드레아에게 사술을 입어 탐보프로 떠나온 것이 지난해 겨울. 봄이 움트는 지금으로부터 약 5개월 전….

“나도 한 반년 같은 얼굴로 지내봤는데, 그 이상은 해 본 적 없어. 영원히 지속되는 술법은 아니니 너무 오래 두면 원래대로 돌아올 거야. 그러니 길어도 반년 내론 돌아와.”

때가 되었다.

페기는 은빛 머리칼을 꽉 틀어쥐며 간신히 입술을 달싹였다.

“안드레아한테 받았던 새, 아직 무사하지?”

“네? 네, 네!”

마샤가 황급히 마차의 짐칸으로 넘어가 녹슨 새장을 꺼내 왔다. 페기는 잘게 떨리는 손으로 새장 문을 열었다. 의심하듯 문가 근처에서 종종거리던 작은 새가 이내 바깥으로 포르르 날아올랐다.

페기는 창밖으로 멀어져 가는 새의 뒤꽁무니를 불안하게 지켜보았다.

괜찮다.

안드레아는 늘 그녀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었을 테니, 연락을 받으면 바로 달려올 것이다. 행여 만나지 못하더라도 제 손으로 다시 사술을 걸면 그만이었다. 이런 날이 도래할 줄 알고 안드레아가 사술을 부리던 장면을 늘 머릿속으로 되새기지 않았나.

그러니 괜찮을 것이다.

페기가 조마조마한 마음을 다잡는 동안, 새는 먼 북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쓸쓸하게 버려진 구릉 지대, 한 치 앞도 가늠할 수 없는 안갯속을 헤쳐 나아간 곳은 탐보프 본토와 동부의 경계에 접한 평원이었다. 새는 고도를 낮추어 봄기운이 움트는 땅으로 하강했다.

그렇게 동굴 입구에 닿을 즈음, 큼직한 손아귀가 새의 작은 몸뚱이를 낚아챘다. 반사적으로 몸부림치려던 새가 별안간 쩡하니 얼어붙어선 덜덜 떨기 시작했다. 예후르가 천천히 손아귀에서 힘을 풀자, 새는 날개를 퍼드덕거리며 황급히 달아났다.

“전하?”

멀어지는 새를 가만히 주시하던 예후르가 몸을 돌렸다. 동굴 앞을 지키던 병사들이 순종적으로 고개를 조아렸다. 예후르는 그들을 이끌고 어두운 동굴 안으로 발을 들였다.

좁고 고불고불한 길이 깊숙하게 이어졌다. 동굴 초입에서부터 바람처럼 웅웅거리며 들려오던 소리는 곧 낯부끄러운 욕설의 형체를 갖추어 나갔다.

마침내 모퉁이를 돌아 동굴 끄트머리에 이른 그의 눈앞으로 날카로운 유리 조각이 스쳐 지나갔다.

“야, 이 개새끼야!”

병사들에게 사지를 붙잡힌 안드레아가 목에 핏대를 세우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예후르는 한숨 섞인 소리로 명령했다.

“다들 나가 봐라.”

그에 안드레아에게 반쯤 매달려 있던 병사도, 그녀에게 채여 바닥을 뒹굴던 병사도 절뚝거리며 동굴을 빠져나갔다. 안드레아는 붉은 머리채를 폭포수처럼 늘어트린 채 죽일 듯이 예후르를 노려보았다. 새파란 눈 가득 절절한 증오심이 끓어 넘쳤다.

“날 불러오라며 난리를 쳤다던데.”

“…….”

“용건이 있다면 빨리 말하지 그래. 피차 얼굴 보기 기꺼운 사이는 아니지 않나.”

예후르가 건조하게 읊조리는 소리에 안드레아의 얼굴이 추상같이 일그러졌다.

“너 돌았냐? 지나가던 사람 붙잡아 가둬 놓은 게 누군데 용거언? 당장 이거 안 풀어?!”

안드레아의 몸이 들썩일 때마다 그녀의 손목에 채워 둔 수갑이 잘그락 소리를 냈다. 팔짱을 끼고 동굴 벽에 비스듬히 기대어 선 예후르가 다소 한심하게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러게 반항도 적당히 했어야지. 얌전히 있었으면 그런 걸 채울 일도 없었어.”

“씨발! 그럼 난데없이 끌려와 이런 데 갇혔는데 풀어 주길 가만히 기다리고만 있냐?! 얌전히 있으면 네가 풀어 줄 작자냐고!”

“적어도 네 한 몸 편해지긴 했겠지.”

“야, 이 뻔뻔한 새끼야, 너 일로 와! 한 대만 좀 맞자!”

안드레아가 자유로운 두 다리로 허공을 걷어차며 발광했다.

“씨발, 내가 뭘 했는데! 그냥 이 근처 지나가던 것뿐이었잖아! 너 이제 눈에 뵈는 게 없냐? 그래서 이렇게 막 나가는 거야? 네 맘에 안 들면 죄다 죽이고 가둘 생각이냐고!”

“입은 비뚤어져도 말은 바로 해야지. 네가 한 게 없긴 왜 없어. 사술로 거짓 모습을 입은 여자는, 그럼 누가 보낸 건데.”

안드레아의 몸부림이 우뚝 멈추었다. 예후르는 고개를 틀어 작은 헛바람을 내뱉었다.

“아무리 내가 미워도 그래, 네가 그러면 안 되지. 우리가 지켜 주지 못한 아이잖아. 아니면 네게 망자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기대한 내가 잘못인가?”

“…지금 무슨 개소릴 지껄이는 거야. 너 아직도 걔가 누군지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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