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6화 (146/328)

“어떻게 할까요?”

“뒷수습은 너희 몫이지. 그것까지 하나하나 내 명을 받으려 하나?”

“하지만 일단 이놈들은 엘피도 공작의 직속 부대이기도 하고….”

남자가 코웃음 치며 등을 돌렸다.

“다 죽이고 저 여자만 살려 둬. 엘피도 공작이 제아무리 뛰어나다 한들 결국은 교황도 못 될 하찮은 사도가 아니냐.”

용병들이 어색하게 웃으며 포로들을 하나씩 일으켜 세우기 시작했다. 마찬가지로 강제로 일으켜 세워진 페기는 긴 망토를 휘날리며 멀어지는 남자의 등을 무섭도록 쏘아보았다.

그의 가슴팍에 새겨져 있던 프리지아의 문양.

그것은 위스누아를 지배하는 만포르차 가문의 상징이었다.

곧장 적군의 진영으로 끌려간 페기는 마샤와 단둘이 막사에 구금되었다. 그리고 스스로를 만포르차 가문의 가신이라 소개한 자에게 종일 추궁을 당해야 했는데, 피아제 가문에 대해 별반 아는 것이 없던 그녀는 부러 강경하게 대응했다.

“족보를 그려 보라니 제정신이에요? 당신도 피아제의 이름을 들어 안다면 그 손이 얼마나 많은지 잘 알 거 아니에요?”

“그러니 직계만이라도….”

“내 사촌만 해도 마흔이 훌쩍 넘어요. 그 이름과 순서를 내가 어떻게 다 기억해요? 그리고 펜던트를 보여 줬잖아요. 내가 피아제 가문의 직계라는 가장 확실한 증거인데 그조차 미덥지 못하단 뜻인가요?”

“아가씨의 진술은 현 정세와 심히 어긋납니다. 라발이 반란군에게 물자를 지원한다는 것을 모르는 이가 없는데, 대뜸 라발의 귀족이 반란군에게 납치당했다는 아가씨의 말씀을 어찌 믿겠습니까?”

“그건 내가 설명할 수 있어요. 당신의 주인을 데려와요.”

“도련님께선 정체가 불확실한 자와 말을 섞지 않으실 겁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입씨름에 지친 페기가 깃펜을 내던졌다.

“그럼 내 사촌 오라비인 피아제 백작에게 연락을 넣어 보든가요. 난 더 이상 나를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이 없어요.”

만포르차의 가신이 수확 없이 돌아가자, 페기는 그제야 초조한 기색을 드러내며 방 안을 서성였다.

위스누아가 움직였다.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위스누아의 만포르차 가문이 비록 부유하다곤 하나, 동부에서 반란이 일어난 뒤로 그들의 주요 돈줄인 중개 무역에서 벌어들이는 수입이 예전 같지 않을 것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고작 타국의 정세에 관여하기 위해 용병단을 파견한다?

짐작건대 출혈이 어마어마하리라. 고질적인 군사력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바스토뉴의 용병단에게 도시 방어를 맡기느라 매해 수천 금의 군비를 낭비하는 곳이었다. 자위(自衛)도 힘겨운 곳이 침공이라니, 어불성설이다.

그럼에도, 그 무수한 대가를 치르면서까지 동부의 반란군을 짓밟고 싶었던 것이다.

예후르 하나를 묻어 버리기 위해서.

“아, 아가씨. 전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지 이해가 안 돼요. 저들은 대체 누군가요? 왜 우릴 공격한 거죠?”

마샤가 울먹이며 물었다.

“위스누아가 고용한 용병단이야. 탐보프와 협공하여 우리 본대를 양방향에서 치려는 속셈이겠지.”

“어, 어떡해요? 그럼 빨리 이 소식을 알려야 하잖아요!”

페기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으며 양손에 눈가를 파묻었다.

“나도 알아. 그런데 방법을 모르겠어.”

그녀는 감금되었다. 손발이 되어 주었던 호위 기사들은 모두 목이 잘렸고, 남은 이라곤 마샤 하나뿐이었다.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속수무책으로 시간을 흘려보내는 동안 해가 지고 땅거미가 몰려왔다.

자정이 지나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던 페기는 별안간 막사의 입구에 서 있는 막시모를 발견하곤 놀라 비명을 지를 뻔했다. 막시모가 조용히 다가와 의자에서 나자빠진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어, 어떻게….”

“원래 이런 일 하던 사람입니다.”

막시모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발소리, 의자를 끄는 소리, 심지어는 숨소리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그에겐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페기는 소름이 돋아난 팔뚝을 문지르며 조심스레 말문을 열었다.

“암살자예요?”

“가끔은 그런 일도 하고요. 아가씨 죽이려고 온 건 아니니 긴장 푸십시오.”

페기는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다. 막시모가 픽 웃었다.

“아까는 잘하셨습니다. 연기에 그리 능하시니 아가씨를 남겨 두고 떠나는 저도 한결 마음이 가볍겠네요.”

“…바로 전하께 갈 건가요?”

“그래야죠. 안 그러면 본대가 기습을 당하게 생겼는데.”

페기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의외라는 듯 막시모가 눈썹을 추켜세웠다.

“데려가 달란 소리는 안 하셔서 좋네요.”

“어떻게 그런 억지를 부려요. 만에 하나의 경우라도 피아제 백작이 내 신원을 확인해 줄 테니 저들은 날 해치지 못할 거예요. 당신은 당신이 해야 하는 일을 해요.”

그러곤 잠시 머뭇거리다가 물었다.

“그런데 어떻게 생각해요? 과연 반란군이 탐보프와 위스누아 양측의 공격을 동시에 감당할 수 있을까요?”

“무립니다. 체스코비체 요새에 있는 탐보프의 정예군만 해도 삼만이고, 지금 여기 있는 용병단도 족히 3천은 될 테죠. 용 기병대에게 의지하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결국 적들도 용에 대항하는 방법을 찾고 말 테니까요.”

“…….”

“그래도 전하께 아주 방법이 없진 않을 겁니다.”

“방법이라면.”

“뭐… 저도 짐작뿐이라서요.”

막시모가 유연하게 화제를 돌렸다.

“그나마 다행인 건 지금 이 군의 총사로 있는 만포르차 가문의 도련님이 꼴통이란 점입니다. 위스누아 사교계에선 유능한 정치꾼일지 몰라도, 이런 전쟁터에선 가장 무능한 존재죠. 지금도 보십시오. 아가씨의 정체를 확인한답시고 진군을 아예 멈춰 놓고 위스누아로 사람을 보내 귀족 명부나 찾고 있지 않습니까?”

“그랬어요?”

“네. 귀족 명부에서 아가씨 함자를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지만 진군할 수 있다고 아예 못 박아 둔 모양입니다. 여기서 더 북상하면 위스누아와의 거리가 더 멀어지니까요. 아가씨의 정체를 확인하려면 지금이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는 거겠죠.”

막시모가 조소를 흘렸다.

“아마 용병단의 우두머리는 지금쯤 간담이 녹아내리고 있을 겁니다. 그자는 알 거거든요. 지금은 무작정 앞만 보고 달려서 기습할 때라는 걸. 반란군을 단번에 제압할 수 있는 기회를 점점 놓치고 있으니 저희로선 다행이긴 합니다만.”

“…그런 사람이라면 내가 혼란을 줄 수도 있겠네요.”

“네?”

“귀족 명부엔 내 이름이 나올 테고, 모든 정황이 나를 라발의 귀족이라 말하고 있어요. 총사는 내 신분을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그럼 나는 수개월째 나를 억류시켰던 반란군에게 복수하기 위해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정보를 제공하겠죠.”

막시모가 경악스러운 표정을 했다.

“군사적으로 무능하다고 말하긴 했지만, 어찌 되었든 위스누아의 차기 군주입니다. 그리 호락호락한 상대는 아닐 텐데요.”

“걱정하지 마요. 평생 호락호락하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왔으니까.”

“…….”

“그러니 전하께 전해 줘요. 나는 괜찮으니 염려하지 마시라고.”

페기가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막시모는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제 가장 큰 걱정이 바로 그겁니다. 전하께서 이 소식을 듣고 도대체 어떻게 반응하실지…. 차라리 제가 여기 남고 싶네요.”

진심을 듬뿍 담아 한탄한 막시모가 미적거리며 일어났다.

“저는 이렇게 떠납니다만, 제발 아가씨께선 몸 조심하십시오. 틸브레히트 경 때처럼 물불 안 가리고 뛰어드셨다간 전하께서 이번엔 또 어디로 보내 버리실지 모릅니다.”

“피아제의 후광이 날 수호할 텐데 뭐가 걱정이에요. 여기 진군은 내가 최대한 늦춰 볼 테니, 당신은 전하를 잘 보필해 줘요.”

그러자 걱정하지 말라는 듯 짧게 눈짓한 막시모가 아무런 기척 없이 막사를 빠져나갔다. 페기는 탁자를 짚으며 느릿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적의 진군을 최대한 지체시켜야 한다.

비록 오스트라트 공방전에서 반란군의 피해가 거의 없었다곤 하나, 일만 군대로 체스코비체 요새의 삼만과 후방에서 기습하는 수천을 동시에 상대하긴 버거우리라. 적어도 막시모가 예후르에게 소식을 전하여 후방 기습에 대한 방어책을 세울 만한 시간은 벌어 주어야 했다.

페기는 두 눈을 지그시 감으며 그동안 보급 부대를 따라 오갔던 길들을 차근차근 되새기기 시작했다.

탐보프 본토와 동부의 경계는 군사적으로 예민한 지역이라 바스토뉴의 용병단은 물론이요, 위스누아의 상인들도 섣불리 발을 들일 수 없는 곳이었다. 불가피하게 초행길을 걸어야 하는 적들을 혼란케 할 수 있는 방안이 분명 있을 터였다.

감금된 며칠은 그녀에게 충분한 고민의 시간을 주었다. 덕분에 페기는 보다 침착해진 태도로 적의 총사를 독대할 수 있었다.

“아델라이데 피아제 양.”

많아 봐야 30대 초반. 잘 빗어 넘긴 검은 머리가 인상적인 만포르차 가문의 장남이 고상하게 혀를 굴려 그녀의 이름을 발음했다.

“그대의 이름은 명부에서 확인했습니다. 피아제 백작의 사촌이던데 별로 닮진 않았군요.”

나른하게 늘어진 푸른 눈이 느릿하게 그녀를 훑었다. 페기가 도도하게 턱을 치켜올렸다.

“오라버니께서 친탁을 하셨죠.”

“하긴. 선대 피아제 백작과 비교하자면 오히려 그대가 더 닮았군요.”

“감사하게도요.”

다소 방만하게 의자에 파묻혀 있던 총사의 눈이 가늘어졌다. 느긋하게 윗몸을 일으킨 그가 불쑥 손을 내밀었다.

“세르난도 만포르차입니다. 라발 명문가의 아가씨를 이런 곳에서 뵙다니 영광이군요.”

“제가 드려야 할 말씀이네요. 위스누아의 차기 군주가 되실 분을 이런 곳에서 뵙게 될 줄은 미처 짐작하지 못했습니다.”

페기가 반갑게 그의 손을 잡았다. 눈이 매끄럽게 휘어졌다.

“게다가 납치된 절 구해 주기까지 하셨으니.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네요.”

“곤란한 상황에 빠진 아가씨를 못 본 척하는 것은 신사 된 도리가 아니겠죠.”

“…….”

“아가씨께서 정말로 곤란한 상황이셨다면 말입니다.”

다시 등받이에 몸을 기댄 세르난도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페기가 쓴웃음을 지었다.

“이상하게 보인다는 건 알아요. 저는 지금 모국이 원조하고 있는 반란군에게 납치를 당했다고 주장하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다 설명해 드릴 수 있어요.”

“제 귀는 언제든지 열려 있습니다.”

“저는 사촌 오라비인 피아제 백작을 협박하기 위한 수단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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