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곧 출발합니다.”
“…….”
“싫으면 여기서 사시든가요.”
퉁명스러운 재촉에 페기는 아쉬운 기색으로 무당벌레를 다시 나뭇잎으로 돌려놓았다. 치마를 탁탁 털며 일어나자, 근처에서 꽃을 꺾던 마샤가 달려와 주름진 치맛자락을 다듬어 주었다.
물끄러미 마샤를 내려다보던 페기가 살며시 그녀의 뺨을 매만졌다.
“멍이 많이 사라졌구나.”
“매일 아침저녁으로 연고를 발라 주는걸요.”
마샤가 배시시 웃었다. 그녀를 따라 잔잔히 웃어 주던 페기는 묘하게 집요한 눈길을 느끼곤 막시모를 돌아보았다.
“왜 그렇게 봐요?”
“…좀 달라지신 것 같아서요. 여유로워지셨다고 해야 하나, 좀 더 상냥해지셨다고 해야 하나.”
“글쎄요. 나는 잘 모르겠는데.”
“예전에 제가 알던 분이랑 갈수록 느낌이 비슷해지셔서요.”
막시모가 그녀의 눈을 똑바로 마주하며 대꾸했다. 페기는 대답할 가치도 없다는 듯 마샤를 데리고 마차가 세워진 길목으로 걸어갔다.
도대체 나를 언제 본 거지?
페기는 슬며시 미간을 찌푸렸다. 죽기 전의 기억을 탈탈 털어 보아도 막시모에 대한 것은 전무했다. 평범한 상인이 아님은 진작 눈치챘지만 이쯤 되니 그의 정체가 슬슬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어, 아저씨!”
마샤가 꺾은 꽃을 한 아름 안고 용병에게로 달려갔다. 체격이 마샤의 세 배는 됨 직한 사나운 인상의 용병이 헤벌쭉 웃으며 마샤를 반겼다.
“요 꼬맹이. 어딜 그렇게 칠렐레팔렐레 돌아다녀?”
“꽃이 너무 예뻐서요. 자, 이건 아저씨 드릴게요!”
“고맙다, 요 녀석아.”
용병이 들꽃을 받아 소중히 앞주머니에 꽂았다. 마샤는 느릿느릿 뒤따라오는 페기를 돌아보며 호들갑을 떨었다.
“아가씨, 아가씨. 그거 아세요? 아저씨네 가족은 다 용병이래요! 누나랑 형이랑 동생이랑 또….”
“우리 조카들도 용병이지.”
용병이 자랑스럽게 어깨를 폈다. 그는 야만족이라 불리는 바스토뉴의 사람이었다.
“건강하고 싸움질 잘하는 애들은 용병이 되고, 그게 아니면 사냥꾼이 되는 게 우리 고향의 철칙이야.”
“저처럼 하녀는 못 되는 거예요?”
“족장님은 몇 거느리고 계시지. 그래 봤자 그게 얼마나 되겠냐?”
마샤가 신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용병은 짙은 상념에 잠긴 얼굴로 말을 이었다.
“우리 용병대가 잘해야 해. 큰돈을 벌 수 있는 건 우리뿐이니까. 우리가 잘 못 하면 고향에서 기다리고 있을 애들이 다 굶어 죽고 말 거야.”
“바스토뉴의 용병단은 용맹하기로 아주 유명하잖아요.”
“용맹이 다가 아니야. 자기 목숨을 아깝게 여기지 말아야지. 우리 용병단은 보통 리누스 연맹의 도시 국가들과 따로 계약을 해서 그놈들을 지켜 주거든? 그런데 그놈들끼리도 사이가 안 좋아서 툭하면 싸움질이 벌어진단 말이야. 그런데 그 싸움질을 누가 하겠어. 그 장사치들이?”
용병이 콧방귀를 뀌었다.
“결국 싸우는 건 우리야. 한바탕 싸우고 오래서 무기 들고 가면, 상대편에는 내 죽마고우와 친척들이 있지. 그래도 우린 죽기 살기로 싸워야 해. 그래야 돈을 버니까.”
“그건… 너무 슬프잖아요.”
“아는 사이라고 대충 싸우다가 돈을 못 버는 것보단 나아. 말했잖냐. 우리 딸내미는 너랑 나이가 비슷한데 키는 네 반 토막이라고. 내 생각엔 빵을 못 먹어서 그런 거 같아. 돈을 많이 벌어야 빵을 많이 사 갈 수 있을 텐데.”
용병이 심각하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조금 떨어져서 그들의 대화를 주워듣던 페기에게로 막시모가 조용히 다가왔다.
“바스토뉴의 용병단은 전쟁터에서 부자가 적으로 만나도 물러서지 않는 기개로 유명하죠. 어떤 놈들은 다그마르 산맥의 정기를 받아 그렇다는 둥, 타고나길 야만족이라 그렇다는 둥 헛소리를 일삼는데, 그냥 가난해서 그런 겁니다. 그렇게라도 안 하면 가족들이 굶어 죽으니까요.”
산세는 험악하며 땅은 척박하다. 그들에게 달리 살아남을 방도가 있었을까.
“존경스럽네요.”
“…존경이라고요?”
페기는 대답 없이 용병들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야만스럽다느니, 미개하다느니 욕하는 자들은 잃어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다. 자기 것을 지키기 위해 아등바등하는 것이 무에 잘못되었나. 도리어 손가락질 받아야 하는 것은 넋 놓고 있다가 자기 것을 빼앗기는 미련한 자들이다.
“약하다고 무조건 양보받는 세상이 아니잖아요. 살아남아 자기를 지키기 위한 힘은 필요하겠죠.”
“예를 들자면 어느 정도의 힘입니까?”
“사람마다 다르지 않겠어요?”
작은 마을 정도의 공동체로 만족한다면 촌장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작은 도시라면 시장으로 충분하고, 장원이라면 영주로 만족하리라.
“그럼 한 왕국이라면 왕이 되어야 하는 겁니까?”
“지켜야 하는 것이 그리 많다면, 왕은 못 되어도 왕을 뒷배로 삼을 정도는 되어야겠죠.”
“더 강한 외세가 쳐들어온다면요? 세상에는 남의 것을 탐하는 힘 있는 자들이 많습니다.”
“그럼 그들보다도 강한 자가 되어야겠네요.”
“끝이 없겠군요.”
막시모가 비소했다.
페기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지키기 위해 강해진다. 지키기 위해 싸우다 보니 남의 것도 내 것이 된다. 그렇게 내가 지켜야 할 것은 늘어나고 힘은 더 필요해진다. 그 길에 내가 만족할 수 있는 선이 있을까.
“아가씨! 이제 출발한대요!”
마샤가 해맑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페기는 살짝 웃으며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지킬 것이 많지 않은 나로선 부질없는 상상일 뿐이다.
아직은.
“아저씨가 그러는데 오늘은 길가에서 노숙해야 할 거래요. 보급품이 워낙 많아서 어제처럼 속도를 낼 수가 없대요.”
“마차라도 있으니 다행 아니니.”
“그렇긴 해요.”
마샤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마차의 문을 열어 주었다. 마차에 오르려던 페기가 고개를 돌려 봄기운 만연한 들판을 바라보았다. 교국의 봄을 닮은 풍경에 절로 미소가 떠올랐다.
그때, 날카로운 섬광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린 페기는 미간에 화살이 박힌 용병을 보고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눈을 부릅뜬 그대로 용병이 기우뚱하며 허물어졌다. 싸늘한 침묵만이 감도는 가운데, 막시모가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소리를 질렀다.
“적침이다! 다들 무기를 들어!”
병사들이 허둥지둥하며 검을 뽑아 드는데, 사방에서 화살이 빗발치기 시작했다. 날쌔게 달려온 막시모가 얼어붙은 페기와 마샤를 마차 안으로 쑤셔 넣었다. 쾅! 닫히는 마차의 문을 보며 마샤가 울먹거렸다.
“아, 아가씨….”
페기는 떨리는 손으로 마샤를 꼭 안아 주었다. 흔들리는 눈이 화살이 오가는 마차의 창밖을 향했다.
“…적은 어디 있나!”
“남쪽! 남쪽을 주시…. 악!”
“젠장….”
비명 소리와 욕지거리가 낭자했다. 화살이 박힐 때마다 마차는 크게 뒤흔들렸고, 페기와 마샤는 벽을 뚫는 화살촉을 피해 마차의 중간에서 오들오들 떨었다. 화살이 날아오는 날카로운 바람 소리가 그치질 않았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화살은 어느덧 멈추었고, 어지럽던 병사들의 고함 소리마저 어느 순간 잦아들었다. 간간이 들려오는 신음 소리를 제하면 소름 끼치듯 적요한 사위였다.
저벅거리는 발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페기는 마샤를 끌어안은 채로 치열하게 귀를 세웠다. 발소리는 하나가 아니다. 여럿이다. 낮게 깔리는 언어는 먼 바스토뉴의 사투리….
벌컥! 마차의 문이 열렸다.
갑자기 들이닥치는 눈부신 빛에 얼굴을 필 새도 없이, 우악스럽게 어깨가 잡혀 끌려 내려졌다.
“대장! 여기 웬 계집이 있는데?”
“창녀야, 아님 하녀야?”
“하나는 하녀 같고, 다른 하나는 좀 비싸 보여.”
“일단 데려와 봐.”
페기는 그대로 목덜미가 잡혀 질질 끌려갔다. 제 발로 걸으려다 물컹거리는 시신을 밟자 절로 토악질이 치밀었다. 정신을 차릴 겨를도 없이 홱 밀쳐져 나동그라졌다.
겨우 땅을 짚으며 고개를 들자, 난장판이 된 길목이 눈에 들어왔다. 부대를 이루었던 용병과 병사들은 거의 대부분 싸늘한 주검이 되어 있었으며, 막시모를 비롯한 몇 명만이 붙들려 강제로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다.
“저게 마차에 들어 있던 계집이야?”
그녀의 등 뒤에서 걸어 나온 적이 잘린 나무 밑동에 걸터앉았다.
“그래. 조그만 계집은 딱 봐도 하녀고, 저게 문제네. 차림을 보아하니 기사도 아니고….”
입술을 꽉 깨물던 페기가 결심한 듯 빳빳하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당신들, 바스토뉴의 용병단이죠?”
“뭐?”
“억양을 들으니 알겠어요. 누구의 사주를 받은 거죠?”
“거참, 당돌한 아가씨네.”
용병들이 어이없다는 듯 킬킬거리며 웃었다. 페기는 주눅 들지 않으려 허리를 더욱 꼿꼿하게 세웠다.
“내 이름은 아델라이데 피아제. 몇 달 전 동부의 반란군에게 납치되었던 라발의 귀족입니다. 내가 당신들을 아군이라 여겨도 되겠습니까?”
“…피아제? 라발?”
여유롭기 그지없던 용병들의 낯에 서서히 곤란한 기색이 떠올랐다. 대장이라 불리던 자가 뒷머리를 긁적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대체가 무슨 소린지 알아들을 수 있어야지…. 일단 도련님을 모시고 와야겠다. 잘 지키고들 있어.”
용병이 어딘가로 사라졌다. 페기는 찌를 듯한 막시모의 시선을 외면하며 마른침을 삼켰다. 두근두근, 심장이 불안하게 박동했다.
오래지 않아 용병이 돌아왔다. 그 뒤에서 한가롭게 걸어 나오는 남자는 값비싼 비단옷을 걸친 귀족이었다. 검은 머리에 나른한 인상이 가미된 미남이었으나, 페기의 눈에 그의 생김새는 거의 들어오지 않았다.
“이 여자가 라발의 귀족이라고?”
낮고 느릿느릿한 말투에는 지울 수 없는 졸음기가 묻어났다. 용병이 90도로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예! 피아자인지 시아자인지….”
“피아제.”
페기가 분명하게 발음했다. 남자의 나른한 눈이 그녀에게로 꽂혔다. 페기는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으며 겉옷의 안주머니로 손을 집어넣었다. 용병들이 곧장 무기를 빼 들었으나, 아주 천천히 주머니 속에서 빠져나오는 손에는 긴 사슬로 이어진 펜던트가 들려 있었다.
용병이 눈치껏 펜던트를 대신 받아 남자에게로 넘겼다. 가만히 펜던트를 들여다보던 남자가 슬쩍 눈을 들어 페기를 보았다.
“노란 수선화라….”
그의 입가에 비딱한 조소가 올라왔다.
“재미있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