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4화 (144/328)

“뭐? 본대가 너희 쪽으론 안 갔다고? 전투도 고작 다섯 번?”

물 마실 힘도 없다며 차라에게 물병을 기울여 줄 것을 당당히 요구하던 요슈아가 아주 힘 좋게 일어났다.

“말도 안 돼! 우린 다섯 번이 뭐야! 한 열 번은 싸운 것 같은데!”

“그러게 누가 그쪽으로 가래?”

알리오나의 지적에 요슈아는 멍하니 주저앉아 중얼거렸다.

“지금도 잠들면 꿈에서 그 미친 여자가 나올 것 같아…. 어떻게 사람이 그렇지?”

“돌아가신 아버지의 복수라잖아. 네가 이해해.”

차라가 그의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집요하게 차라만을 노리는 유디트 바도비체의 공격을 막느라 요슈아는 입에서 단내가 날 만큼 고생했다.

“그보다 슬슬 일어나야지. 곧 수색대가 다시 들이닥칠 텐데.”

“넌 업혀 다니고 싸움도 안 했으니 그런 말이 쉽게 나오지! 난 못 가! 죽어도 못 가!”

요슈아가 차라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졌다. 차라가 곤란한 얼굴을 하자, 알리오나가 조용히 끼어들었다.

“사도님 말씀대로 빨리 떠나. 내가 남아서 시간을 끌 테니까.”

“…이건 또 무슨 헛소리일까? 네가 남긴 왜 남아?”

“변경백도 남기로 했어.”

멀거니 두 사람을 번갈아 보던 요슈아가 검지를 들어 올리며 입술을 벙긋거렸다.

“또, 또, 또야?! 도미에 변경백, 당신도 쟤한테 홀린 거예요?!”

“홀리긴 누가 홀렸다고 그래!”

알리오나가 빽 내지른 소리도 소용없었다.

“사도에 이어 변경백까지…. 오, 신이시여! 어찌하여 제게 이런 시련을 내리십니까!”

요슈아는 아예 하늘을 향해 엎드리며 아주 꼴값을 떨었다. 그의 미친 짓에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차라는 그를 아예 외면하며 근심스럽게 물었다.

“왜 남겠다는 거야? 아무리 변경백이 함께라지만 수색대 전부를 상대할 순 없을 텐데….”

“수색대 본대는 변경백의 존재를 몰라요. 우리와 마주쳤던 적들은 모두 죽었으니 소식을 전해 들을 수도 없었겠고요. 게다가 전쟁을 중단시키려면 누군가는 여기 남아 탐보프 군을 제어해야 하잖아요. 그건 저와 변경백밖에 할 수 없는 일이에요.”

“하지만 넌 다시 미에투넨으로 끌려갈 거야.”

알리오나가 슬며시 미소를 지어 올렸다.

“그에 관해서 사도님께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하나 있어요.”

알리오나의 귓속말을 들은 차라가 화들짝 놀란 얼굴로 변경백을 바라보았다. 그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차라는 여전히 얼떨떨한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너의 뜻이 그렇다면 따라야지. 축하한다는 말을 지금 해야 하나?”

“나중에요. 이번 일이 잘 풀리면, 그때 들려주세요.”

알리오나는 이전의 그늘을 모두 내던진 듯 한결 가벼워진 모습이었다. 정확한 경과는 모르나 그녀가 어떤 반환점을 돈 것 같아 차라는 내심 안도했다. 칼날 위를 거닐 듯 위태롭던 알리오나는 늘 그의 마음속에 작은 가시처럼 박혀 있었다.

“사도님. 저는 사도님을 믿어요. 위험을 무릅쓰고 저를 세상 밖으로 이끌어 주신 것은 사도님뿐이었으니까요.”

알리오나가 그의 손을 간곡히 붙들었다.

“그러니 사도님 본인을 의심하지 마세요. 세상에 어떤 위대한 사도가 있든, 제게 내려와 축복을 주신 분은 오직 당신뿐이에요. 음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에겐 세상을 비추는 태양보다 한 줌의 촛불이 더 값지다는 사실을 부디 잊지 말아 주세요.”

차라는 조금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순백의 성궁에서 하늘 위의 존재로 군림하던 그는 땅으로 내려와 비로소 사도가 되었다. 어쩌면 이것이 천사께서 바라신 뜻일까.

한편, 요슈아는 바람 맞아 데굴데굴 굴러다니는 적의 목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수비대원 하나가 넉살 좋게 말을 붙였다.

“뭘 그렇게 보십니까, 전하?”

“저거 말이야. 나랑 닮지 않았어?”

그의 손짓을 따라가다 적의 목을 발견한 수비대원이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글쎄요….”

“자세히 봐 봐. 금발이잖아.”

“그거 하나잖습니까.”

“그럼 저 몸도 한번 살펴봐 봐. 나랑 체격이 비슷하지?”

“예, 뭐….”

수비대원이 떨떠름하게 대답하며 슬금슬금 물러났다. 혼자서 아주 심각하던 요슈아의 얼굴에 문득 장난기 가득한 미소가 떠올랐다.

***

“저기 있습니다!”

수색대가 모래바람을 일며 달려왔다. 먼저 도착한 이들이 검을 뽑아 견제하는 사이, 그들 사이로 유디트 바도비체가 저벅저벅 걸어 나왔다.

“이제 끝이다. 간악한 사도는 당장 내 앞에 무릎 꿇고 죄를 고하여…. 도미에 변경백?”

천천히 돌아서는 사내의 얼굴을 알아본 유디트가 황망한 표정을 지었다. 변경백은 점잖게 입을 열었다.

“한 달 전쯤 요새를 지날 때 뵈었지요. 이제는 후작 각하라 불러 드려야겠군요.”

“아뇨…. 아직 정식으로 작위를 이어받은 것은 아니라.”

“그렇습니까. 선대 후작 각하의 죽음에는 진심으로 애도를 표합니다.”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던 유디트가 다시 낯빛을 바꾸며 칼날을 들이밀었다.

“미에투넨으로 떠난다던 변경백이 어찌 이곳에 계십니까! 만일 납득할 만한 이유를 대지 않는다면 그대 역시 바도비체 후작가의 검을 피할 순 없을 겁니다!”

“물론이죠. 지금부터 설명하겠습니다.”

요지는 볼파르트에서 마주친 황녀와 황태자를 쫓아 여기까지 거슬러 올라왔다는 것이었다. 완전히 미덥지는 못한 그의 설명에 유디트가 고민하고 있자, 변경백의 등 뒤에서 알리오나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변경백의 말은 사실이에요. 내가 보증하죠.”

“설마… 화, 황녀 전하?!”

멀거니 그녀를 응시하던 유디트가 황급히 한쪽 무릎을 굽히고 앉아 고개를 조아렸다.

빌헬미나를 빼닮은 얼굴에 발데마르 황가 특유의 백금발과 녹안. 부정할 수 없는 황녀의 증거였다.

“엘피도 공작의 수하들에게 잡혀 끌려가던 나를 변경백이 겨우 구해 주었어요. 그에게 감사를 표하고 싶군요.”

“물론입니다! 변경백, 참으로 중대한 일을 해내셨습니다! 황제 폐하께서도 분명 그대에게 은혜를 베푸실 것입니다!”

“아니요. 저는 죄인입니다. 가장 중요한 분을 지키지 못했으니까요.”

변경백이 침울한 표정으로 비켜섰다. 멀뚱히 눈을 굴리던 유디트가 고목을 보곤 싸하게 표정을 굳혔다.

고목에는 사람의 목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아니라고 말씀해 주십시오. 제 생각이 그릇되었다고.”

“맞을 겁니다. 제가 확인한 결과, 황태자 전하의 시신이었습니다.”

유디트가 비틀거리며 고목으로 다가갔다. 고목의 나뭇가지에 매달린 목과 그 아래 버려진 몸뚱이는 반쯤 타다 만 상태였다. 얼굴은 새카맣게 녹아내려 이목구비를 알아볼 순 없으나, 체격과 머리색은 황태자와 유사했다.

“혹시 모릅니다. 그냥 닮은 사람일지도….”

“손가락에 이것이 남아 있더군요.”

변경백이 그을음 남은 반지를 내밀었다. 유디트는 떨리는 손으로 반지를 받아 들었다.

울부짖는 늑대가 새겨진 인장.

황태자의 상징이었다.

“맙소사….”

저도 모르게 주저앉은 유디트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도대체 누가 이런 흉사를 저질렀단 말입니까?”

“엘피도 공작의 수하들이 분명해요.”

“예? 하지만 지난 이틀, 황태자 전하는 그들에게 진심으로 협조하고 계셨습니다. 사도를 노린 제 공격을 수도 없이 막으셨고요. 저는 십중팔구 황태자 전하께서 탐보프의 반란군과 뜻을 같이하신다고 생각했는데….”

“그랬죠. 하지만 오늘 새벽에 내가 그를 만나 설득했어요. 다시 우리가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자고.”

알리오나가 울음을 참으며 더듬더듬 말했다.

“요슈아는 분명 내 말에 흔들렸어요. 내 손을 잡아 줬는데… 천벌 받을 엘피도 공작의 수하들이 다시 나타나 그 애를 끌고 간 거예요. 변경백이 온 힘을 다해 뒤쫓았지만 결국 늦고 말았죠.”

“아무리 그래도 어찌 전하를 이리 덧없이 보낼 수 있단 말입니까! 어찌 되었든 황태자 전하는 페임하른 공작의 친자가 아닙니까?!”

“그대도 알다시피 요슈아는 타고난 전사예요. 내게로 돌아섰으니 그들에겐 아주 격렬하게 반항했겠죠. 그 와중에 이런 참극이 일어났을 거예요.”

“나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반란군 진영까지 얼마 남지 않은 거리이니 구태여 전하를 시해할 이유가 없어요. 끌고 갔어도 충분한 상황에 굳이 전하께서 돌아가셨다는 것은 피치 못할 사고가 일어났었다는 거겠죠. 그 책임을 면하기 위해 전하의 시신을 이리 더럽힌 것이고요.”

변경백이 차분하게 말을 보탰다. 거기에 알리오나가 흐느끼듯 양손에 얼굴을 파묻으며 종지부를 찍었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 요슈아는 목이 잘려선 활활 불에 타고 있었어요. 나는 죽을 때까지 그 광경을 잊지 못할 거예요. 요슈아, 불쌍한 내 요슈아!”

울부짖는 그녀의 손과 치맛자락은 재 가루와 그을음으로 더럽혀져 있었다. 아마도 아우의 시신에서 정신없이 불을 꺼트리느라 저렇게 되었으리라. 유디트는 진심으로 그녀가 안타까웠다.

“귀한 눈물 거두어 주십시오. 사악한 반란군은 저, 유디트 바도비체가 절대 용서하지 않겠습니다. 요새의 삼만 군대가 반란군에게 정의의 칼날을 내리는 모습을 황녀 전하께서도 지켜봐 주십시오!”

유디트가 분노에 타오르는 눈으로 동쪽을 노려보았다.

“아버지와 황태자 전하를 난도질한 죄, 반드시 묻고 말 것입니다!”

그 기세대로 화살에 매달린 서신 한 장이 반란군 진영으로 날아갔다.

“안 돼! 요슈아, 내 아들! 안 돼!”

긴급히 자신을 찾는 소리를 듣고 이리니의 막사로 들어오던 예후르가 멈칫했다.

“페임하른 공작? 무슨 일입니까?”

“내 아들, 내 아들이 죽었습니다! 어떻게 낳은 내 아들인데! 소중한 내 아들! 요슈아! 아아악!”

뺨을 눈물로 뒤덮은 이리니가 바닥에 엎어져 통곡했다. 예후르가 드물게 당혹한 기색을 내비쳤다.

“그럴 리가….”

탁상에는 갈겨쓴 편지 한 장과 그을음 진 황태자의 인장 반지가 놓여 있었다. 그것을 발견한 예후르가 흐음, 작은 소리를 내며 미묘한 얼굴을 했다.

***

넓적한 나뭇잎에 무당벌레 한 마리가 앉아 있었다. 페기가 조심스레 손을 뻗자, 경계하듯 잠시 미동 없던 무당벌레가 꾸물꾸물 그녀의 손끝으로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페기는 슬며시 미소를 머금었다.

“아가씨.”

막시모가 터벅터벅 다가왔다. 페기는 여전히 풀밭에 앉은 채로 손등을 타고 오르는 무당벌레를 홀린 듯 지켜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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