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저들은 내 털끝 하나 못 건드려. 강제로 끌고 가는 게 고작이겠지.”
알리오나가 코웃음 쳤다. 짧게 갈등하던 수비대원이 조심스럽게 그녀를 땅에 내려 주었다.
“…감사합니다.”
그가 즉각 무기를 뽑아 적군에게로 달려가자, 알리오나는 더듬더듬 뒷걸음질하며 나무에 등을 기대었다. 코끝으로 피비린내가 낭자했다. 죽고 죽이는 살육전이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그때, 그녀의 사각에서 팔이 쑥 뻗어 나왔다. 피할 겨를도 없이 어깨를 잡힌 알리오나가 기우뚱하며 진흙탕에 나동그라졌다. 곧장 강한 힘이 그녀를 잡아당겼다. 알리오나는 반사적으로 나무줄기를 끌어안으며 젖 먹던 힘까지 다해 비명을 내질렀다.
그러자 단검 하나가 날아와 그녀의 귓전을 스쳤다. 얼어붙은 귓가로 단발마의 비명 소리가 터졌다. 뜨거운 핏물이 그녀의 얼굴 절반을 뒤덮으며, 어깨를 붙잡던 억센 손아귀가 스르르 떨어져 나갔다.
알리오나는 가만히 눈을 깜박였다. 단검을 던진 변경백이 숨을 헐떡이며 그녀를 보고 있었다. 그러곤 다시 검을 들어 달려드는 적의 몸을 사선으로 베어 넘긴 뒤, 빙그르 돌아 뒤에서 덮쳐 오는 적의 검을 막아 냈다.
알리오나가 입술을 달싹였다.
“변경백. 상황이 어려워지면 날 죽여요.”
적과 대치하던 변경백의 어깨에 힘이 가득 들어갔다. 그는 긴 다리로 사납게 적군의 복부를 걷어차더니, 비틀거리며 밀려나는 적의 머리를 단칼에 베었다.
“농담이 아니에요. 난 이대로 잡혀가 폐하의 뜻을 이루어 드리고 싶지 않아요. 처음부터 내가 원한 건 새장 밖의 삶이 아니었단 말이에요.”
병세가 드러난 이후로 세상에 없는 존재로 치부하시던 딸.
똑같이 병자로 태어난 오라비들은 죄 죽여 없앴으면서 왜 나만은 살려 두셨을까. 혹 나만은 차마 죽이지 못하셨던 걸까.
내게는 그분의 사랑이 남아 있는 걸까.
남몰래 품어 왔던 희망은 어느 날 문득 찾아온 깨달음에 산산조각으로 부서져 내렸다. 영광된 핏줄을 이어 나갈 수 없다면 가장 어리석은 자로 하여금 자신이 이룩한 모든 것을 무너트리려 하셨음을. 그로써 자신의 이름과 끊어진 핏줄의 영예를 드높이고자 하셨음을.
나는 그저 그분의 도구.
태어남도, 삶도, 심지어는 죽음조차 그분께 달려 있었음을 왜 모르고 있었을까.
“난 폐하께 도구가 아닌 다른 존재이고 싶어요.”
“…….”
“만일 내가 폐하의 야망을 무너트린다면, 그분께서도 나를 달리 보시지 않겠어요?”
노래하듯 이어지는 알리오나의 목소리엔 숫제 짙은 열망마저 담겨 있었다. 자신의 죽음조차 달갑게 이야기하는 황녀가 기가 막혀 변경백은 이를 악물었다. 검을 휘두르는 손길이 저도 모르게 사나워졌다.
“헛소리는 그만하십시오! 살아서 전하의 뜻을 이루시면 되잖습니까!”
“억지 부리지 마요. 누가 봐도 내 죽음이 간편하잖아요.”
“억지를 부려서라도 지켜야 하는 것이 목숨입니다! 이 많은 사람들이 전하를 지키기 위해 싸우고 있는데 그런 말이 쉽게 나오십니까?!”
“하지만….”
“제가 전하를 도우면 되잖습니까!”
힘껏 내지른 변경백의 검이 적의 가슴팍을 꿰뚫었다. 동시에 측면에서 검을 높이 쳐든 적이 달려들었다. 늘어진 시체의 갈비뼈에 칼날이 걸려 잘 뽑히지 않자, 그는 미련 없이 검을 포기하곤 진흙밭을 굴러 공격을 피했다. 그러곤 바닥을 나뒹굴던 이 빠진 검을 들어 적의 목을 그었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느릿하게 일어서는 그는 뜨거운 피를 온통 뒤집어쓰고 있었다. 알리오나는 그 모습에서 아찔한 전율을 느꼈다. 그녀는 생에 단 한 번도 가져 본 적 없던 강함. 요슈아가 그러하듯 찬란하게 빛을 발하는 그의 미래.
그가 저벅저벅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그녀의 발치에서 우뚝 멈추어 서자, 거대한 그림자가 그녀의 작은 몸뚱이를 단번에 집어삼켰다.
그때껏 나무를 붙들고 주저앉아 있던 알리오나가 고개가 아프도록 턱을 추켜올렸다. 저 높이 있는 그의 얼굴은 그늘에 둘러싸여 표정이 잘 분간되지 않았다. 알리오나는 슬며시 눈을 가늘게 떴다.
변경백이 주저앉듯 한쪽 무릎을 굽힌 것은 그때였다. 천천히 손을 들어 올리던 그는 피가 진득하게 묻은 제 손바닥을 보곤 바짓단에 손을 문질렀다. 그러곤 대강 깨끗해진 손으로 핏물이 흩뿌려진 알리오나의 뺨을 조심스레 닦아 주었다.
“제가 도울 테니, 다시는 그런 말씀 하지 말아 주십시오.”
나지막이 읊조린 그가 검을 땅에 꽂아 짚으며 일어나 그녀의 등 뒤로 달려 나갔다. 알리오나는 스쳐 지나가는 그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 그는 다시 검을 맞대고 있었다. 죽기 살기로 검을 휘두르며 베고, 또 베고, 죽이고, 또 죽이고.
멍하니 그를 바라보던 알리오나가 천천히 고개를 수그렸다. 더러운 진흙밭. 발치에는 어디서 날아왔는지 모를 단검이 뒹굴고 있었다.
알리오나는 그 단검을 집어 들었다. 다른 쪽 손을 뒤집어 손목을 뒤로 꺾자, 창백한 살결 위로 시퍼런 혈관이 도드라졌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그 위로 칼날을 가져다 댔다.
이대로 살짝 힘을 주어 누르면 끝난다.
아등바등 힘겹게 이어 왔던 삶을 드디어 끝낼 수 있었다. 어머니는 분노하실 것이며, 보잘것없는 나는 똑같이 보잘것없는 죽음으로 남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처럼 한번 빛나 보지도 못한 채 처음부터 끝까지 보잘것없는 알리오나로 사라지겠지.
하지만 그건 좀 억울하잖아.
나도 한 번쯤은 빛나고 싶어.
벌떡 일어난 그녀가 성큼성큼 변경백에게로 걸어갔다. 적과 검을 맞대고 있던 그의 눈이 커다래졌다. 알리오나는 문득 걷잡을 수 없이 온몸이 뜨거워졌다.
“너는 내 자식이야.”
어머니.
“날 벗어날 수는 없어.”
저는 더 이상 당신에게 구속되지 않겠어요.
푹!
번쩍 치켜든 단검이 변경백과 맞서던 적의 등짝에 꽂혔다. 힘껏 검을 뽑자, 솟구친 피가 다시 그녀의 얼굴을 더럽혔다. 그녀는 재차 적의 등에 검을 꽂았다. 찌르고 또 찌른 끝에 비틀거리며 적이 무너져 내렸다.
변경백은 얼이 빠진 표정이었다. 성급히 입을 떼려던 알리오나는 자신의 흉한 모습을 깨닫곤 그나마 깨끗한 소매로 얼굴을 대충 닦았다. 마지막으로 검까지 집어 던지며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나랑 결혼해요.”
“…….”
“당신에게 제위를 줄게요. 어머니보다 더 훌륭한 황제가 되어 줘요.”
그의 얼굴은 흡사 괴물이라도 본 듯 일그러져 있었다. 하지만 그조차 알리오나의 입을 가로막진 못했다.
“당신도 복수하고 싶잖아요. 아버지를 죽인 내 어머니에게. 날 도와줘요. 나도 당신의 복수를 돕겠어요.”
“갑자기 그게 무슨….”
“지금껏 당신 같은 사람을 찾아 헤맸어.”
어머니보다, 어쩌면 북방을 통일한 내 할아버지보다 더 위대한 지도자가 될지도 모르는 사람.
끔찍한 발데마르의 이름을 넘어설 사람.
나를, 곧 죽어 사라질 나조차 업신여기지 않고 공경해 줄 사람.
“억지를 부려서라도 살아야 한다면서요.”
“…….”
“이게 내 억지예요.”
적을 모두 처리한 수비대원들이 하나둘 모여들고 있었다. 무섭도록 굳은 얼굴로 그녀를 응시하던 변경백이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내밀어진 그녀의 손을 잡으며 자그맣게 속삭였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아이를 다루듯 가볍게 그녀를 안아 올린 변경백이 근처에 꽂힌 검을 뽑아 들곤 다시 산길을 달리기 시작했다. 속을 알 수 없는 그의 얼굴을 힐끔거리던 알리오나가 곧 자신 없는 투로 말을 꺼냈다.
“난 오래 살지 못해요. 이 몸으론 아이도 낳지 못할 테죠. 조금만 인내하면 원하는 사람과 다시 결혼할 수 있….”
“틀어막기 전에, 그 입 닥치십시오.”
그가 씹어 뱉듯 말했다. 움찔한 알리오나가 얌전히 그의 목에 매달렸다.
그들은 그렇게 또 꼬박 하루를 달렸다.
어느덧 산길은 내리막길이 되었고, 어렴풋이 산으로 스며들던 햇볕은 따가운 뙤약볕이 되어 내리꽂혔다. 본대는 요슈아 쪽으로 갔는지 기미도 보이지 않았으나, 간혹 수색대 일부와 마주치곤 했다. 그때마다 벌어지는 전투는 어느 하나 빼놓을 구석 없이 치열했다.
각 전투마다 한 명씩 나가떨어지기 시작한 수비대는 이제 간신히 열 손가락을 채우고 있었다. 거듭된 전투와 쉼 없이 이어지는 강행군에 남은 이들도 지쳐 나동그라지기 일쑤였다. 헐떡이는 숨엔 피비린내가 맺혔고, 땀으로 흠뻑 젖은 등에선 허연 김처럼 열기가 피어올랐다.
또다시 별이 뜨고 밤이 시작되었다. 그들은 끔찍한 두 번째 밤을 수색대가 아닌 늑대들을 상대하며 지새웠다. 암흑 속에 퍼진 늑대의 수를 감히 헤아릴 수 없었다. 산의 밤은 지겹도록 길었으며, 정신력마저 바닥날 즈음에 이르러서야 겨우 동이 트기 시작했다.
땀과 피에 젖은 이들이 터덜터덜 고목에 이르렀다. 요새는 저 멀리 이슥한 어둠에 가려 보이지 않았고, 쥐 죽은 듯한 적막 속엔 그들을 뒤쫓는 발소리마저 들리지 않았다.
수비대원들은 바닥에 누워 가쁜 숨만 연신 삼켰다. 바닥난 물통이 여러 명의 손을 거쳤다. 그들은 이제 앉아 있을 힘조차 없는 듯했다.
그러나 변경백만은 홀로 꿋꿋이 버티어 서 있었다. 그의 시선은 아직 어둠에 잠겨 있는 서쪽을 향해 있었다. 나머지 일행을 기다리는 걸까. 알리오나는 살그머니 그의 옆에 섰다.
“아버지는 훌륭한 기사이셨습니다.”
그가 오랜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아버지를 존경하지만 그분의 전철을 밟고 싶진 않습니다.”
물끄러미 그를 올려다보던 알리오나가 서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래요.”
그들의 등 뒤에서 뻗어 온 서광이 널리 퍼져 나가고 있었다. 어둠을 몰아내며 시시각각 영토를 넓히는 빛줄기 속으로 누군가 숨 가쁘게 발을 내디뎠다. 눈부신 금발이 흩날리며 땀방울이 번졌다. 그 뒤로 가일을 비롯한 복면을 쓴 이들이 헐레벌떡 달려오고 있었다.
변경백은 성큼성큼 그들에게로 다가갔다. 요슈아를 스치며 빼 들었던 검이 발치로 조용히 잦아들더니, 점차 박차 오르는 발걸음을 따라 사선으로 높이 그어졌다. 그에 마지막 적의 목이 분수처럼 피를 내뿜으며 나뒹굴었다.
“살았다!”
고꾸라지듯 땅에 엎어진 요슈아가 간신히 돌아누우며 외쳤다. 가일의 등에서 뛰어내린 차라가 황급히 알리오나에게 달려왔다.
“알리오나! 괜찮아? 몸은?”
근심 가득한 얼굴로 그녀의 몸을 이리저리 살피는 모습이 참으로 주책맞다. 두 눈을 끔벅끔벅하던 알리오나가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햇살 속에 번지는 맑은 웃음소리에 바닥에 엎어졌던 이들이 의아한 기색으로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왜, 왜 그래?”
“아니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알리오나가 두 눈을 둥글게 휘었다.
이제 그녀는 진심으로 웃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