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2화 (142/328)

유디트가 미친 듯이 소리 지르며 세도파를 마구 흔들었다. 인형처럼 휘둘리던 세도파가 멍하니 눈을 깜박이며 중얼거렸다.

“전하께… 내가 전하께 가서 직접 확인할게. 전하께서 정말로 아버지를 죽이셨는지….”

“이 미친년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짜악!

눈이 시뻘게진 유디트가 온 힘을 다해 세도파의 따귀를 때렸다. 의자에서 떨어진 세도파가 맥없이 바닥을 굴렀다. 입 안이 다 터진 듯 핏물이 주르륵 흘렀다.

“너 그냥 오늘 나한테 죽자. 죽음으로 아버지한테 사죄해. 네깟 게 살아서 우리 가문을 얼마나 더 망치려고 그딴 망언을 지껄여!”

유디트가 심지어 세도파를 걷어차려고 하자, 안절부절못하며 지켜보던 기사들이 화들짝 놀라 그녀의 양팔을 붙들었다. 유디트가 사납게 몸부림을 쳤다.

“씨발, 이거 놔!”

“지, 진정하십시오, 아가씨! 그러다 세도파 아가씨 정말 돌아가시겠습니다!”

기사들이 유디트를 말리는 사이, 세도파는 하녀들의 부축을 받아 방을 빠져나갔다. 그 뒷모습에다 대고 연거푸 발길질을 하던 유디트가 제 성질을 못 이기고 오열하기 시작했다.

“아버지, 아버지….”

잘린 목을 앞에 두고 유디트는 갑갑한 가슴을 마구 때렸다. 응어리진 설움이 자꾸만 목청을 드높였다.

그러자 초조하게 상황을 지켜보던 황제의 파발이 눈 딱 감고 나섰다.

“아가씨. 송구합니다만, 폐하의 긴급한 전언이 있습니다.”

“흐으….”

“황태자 전하와 황녀 전하께서 납치를 당하셨습니다. 성궁의 막내 사도가 개입된 것으로 보아 엘피도 공작의 소행이라 짐작됩니다.”

“엘피도 공작?”

유디트가 퍼뜩 고개를 들어 올렸다. 눈물 젖은 눈에 핏발이 가닥가닥 섰다.

“예, 예….”

“이리로 오고 있나?”

“반란군 진영으로 가는 최단 경로가 바로 이 체스코비체 요새를 지나는 것이니, 아마도 그럴 것이라고 사료됩니다.”

멍하니 파발을 올려다보던 유디트가 양손으로 바닥을 짚으며 일어섰다.

“당장 수색대를 준비하라.”

걱정스럽게 손을 내뻗는 기사들의 부축을 뿌리치며 유디트는 무표정한 얼굴로 방을 걸어 나갔다.

“내가 직접 나갈 것이다.”

***

“세도파 바도비체야.”

요슈아가 단언했다.

“오스트라트 전진 기지가 무너지면서 바도비체 후작은 죽었다며. 그 후계자인 유디트 바도비체는 체스코비체 요새를 지키고 있을 테니, 후작가의 문장을 쓸 만한 사람은 세도파밖에 없어.”

“동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온 걸까….”

차라는 조금 심란해졌다.

세도파에게 호감은 없지만 예후르를 향한 순애보만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사람이 예후르에게 농락당한 것으로도 모자라 아버지까지 잃었으니 그 속이 말이 아니리라.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세도파는 우리보다 늦게 출발했을 거라고. 당연히 나랑 알리오나가 도망친 걸 알고 있겠지.”

“그럼 요새에까지 소식이 전해졌겠네?”

차라가 겁먹은 목소리로 묻자, 도미에 변경백이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

“만일 그렇다면 요새를 넘는 데 차질이 빚어질 겁니다. 유디트 바도비체는 나이가 어려 경험이 조금 부족할 뿐 충분히 경계할 만한 무장입니다. 소식이 들어갔다면 지금쯤 수색대를 꾸려 요새의 길목을 막으려 들겠지요.”

“맙소사….”

차라는 질린 눈으로 가파른 산길을 올려다보았다. 앞으로 그들이 넘어야 하는 첩첩산중이었다.

“요새를 우회하는 건 어때요?”

“시일이 너무 지체됩니다. 자칫 잘못하다간 요새의 수색대와 폐하의 추격자들에게 동시에 쫓기는 상황을 맞이할 수도 있습니다.”

“여기까지 온 이상 다른 방도는 없어. 뚫고 나가야지.”

요슈아가 무릎을 짚으며 힘차게 일어섰다.

“일단 지금은 인원이 너무 많으니 둘로 쪼개기로 해요. 변경백은 방벽 수비대랑, 나는 여기 가일 쪽이랑.”

“그게 좋겠습니다.”

자연히 차라와 알리오나에게로 시선이 쏠렸다. 둘로 쪼개졌으니 짐 덩어리들도 각각 분배해야 했다.

“난 변경백이랑 갈래.”

요슈아가 입을 열기도 전에 알리오나가 먼저 선수를 쳤다. 요슈아가 즉각 눈에 불을 켰다.

“왜! 나랑 가!”

“너랑 갔다가 또 무슨 봉변을 당하라고? 이번에도 위험해지면 나 버릴 거 아니야?”

지은 죄가 있는 요슈아가 못마땅한 기색으로 신음했다. 가일도 미미하게 웃는 낯으로 끼어들었다.

“전하. 저희는 차라 도련님 곁을 떠날 수 없습니다. 양해해 주시지요.”

“으…. 제길.”

요슈아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마구 헤집었다. 차라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알리오나의 목에 꼼꼼히 목도리를 둘러 주었다.

“밤의 산은 추워. 조심해야 해.”

“사도님이야말로 조심하세요. 여기서 가장 추위를 많이 타시는 분이잖아요.”

“으응…. 그렇긴 한데.”

차라는 근심이 가시지 않는 듯 변경백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저기, 알리오나는 몸이 많이 아파요. 혹시 상처라도 나면 피가 잘 멈추지 않으니 각별히 조심해 주세요.”

“명심하겠습니다.”

변경백은 체격이 우람한 수비대원에게 알리오나를 업게 했다.

그러자 요슈아가 뚫어질 듯이 차라를 쳐다보았다. 차라는 그의 지나칠 정도로 빤한 시선을 무시하며 가파른 산길로 발을 디뎠다. 두 발로 걷는다기보단 두 손, 두 발로 기는 듯한 모양새였다.

“아이고, 우리 도련님. 내가 업어 줄까?”

“시끄러워….”

차라가 씩씩거리며 뇌까리자, 요슈아는 코웃음 치며 날 듯이 그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부아가 치민 차라가 그 뒷모습에다 자갈을 날렸지만 맞을 턱이 없었다.

변경백은 떠나기 직전 가일과 짧게 말을 나누었다.

“산을 넘으면 동쪽으로 오래 묵은 고목이 하나 보일 걸세. 거기서 만나지.”

“알겠습니다.”

“행여 한 쪽이라도 모레 새벽까지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게 어느 쪽이 되었든 먼저 출발하기로 하지요. 누구든 살아남아야 하니까요.”

물끄러미 가일을 응시하던 변경백이 손을 내밀었다.

“황태자 전하와 도련님을 부탁하지.”

가볍게 악수를 나눈 가일이 벌써 멀찍이 올라간 요슈아와 아직도 제자리걸음인 차라를 쫓아갔다.

변경백 역시 떠날 채비를 마친 수비대에게 다가가며 허리춤에 매단 단검의 매듭을 꽉 조였다.

“짐을 가볍게 해라. 밤낮없이 달릴 것이니.”

“예!”

변경백을 따라 열댓 명의 방벽 수비대가 산길을 뛰어오르기 시작했다. 알리오나는 자신을 업은 대원의 목을 꼭 끌어안으며 울창한 나뭇잎 사이로 보이는 저녁 하늘을 흘끗 올려다보았다. 밤이 빠르게 몰려오고 있었다.

산은 금세 어두워졌다.

쥐 죽은 듯 적요해진 산중에는 올빼미 우는 소리만이 맴돌았다. 간혹 어디선가 늑대 울음소리가 아득히 전해졌는데, 메아리처럼 까마득한 소리에는 차마 짐작할 수 없는 거리감이 녹아 있었다.

“이쪽으로.”

밤눈이 가장 밝아 선봉에 선 대원이 빠르게 손짓했다. 쭈그려 앉아 밤의 한기에 식은땀을 식히던 대원들이 기다렸다는 듯 잽싸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끼 덮인 땅은 그들의 발소리를 삼키고, 나뭇잎을 우수수 흩트리는 밤바람은 그들의 옷깃 스치는 소리를 덮어 주었다.

“수색대는 황태자 전하 쪽으로 몰린 것 같습니다.”

수비대원의 속삭임에 변경백의 표정이 조금 흐려졌다. 그러나 어둠은 그의 심려를 가렸고, 그의 목소리는 변함없이 무감정했다.

“계속해서 주위를 경계해라. 방심은 금물이다.”

암흑 속의 행군은 쉼이 없었다. 대원들은 땀을 흘린 만큼 땀을 식혔으며 또 그만큼 살갗은 차가워졌다. 뼛골까지 스며드는 산의 한기는 밤이 깊어질 수록 심해졌다. 가쁘게 흘러나오는 날숨조차 긴장감에 먹힌 듯 신경이 곤두섰다.

아무 일 없는 밤이 지나가고 있었다. 그사이 별은 밤하늘을 횡단하여 서쪽으로 넘어갔으며, 알리오나는 다른 대원에게로 옮겨졌다. 형체 없이 상상 속에 존재하는 수색대는 끊임없이 그들의 뇌리를 갉아먹었으나, 먼동이 트자 긴장이 탁 풀린 듯 안도감이 밀려들었다.

이 밤은 살아남았다.

그런 생각이 들기 무섭게, 화살 두어 대가 쏜살같이 날아왔다. 전광석화처럼 검을 빼든 변경백이 화살을 튕겨 내며 울부짖듯 외쳤다.

“나는 황제 폐하로부터 알프도르트 방벽의 수호를 명받은 도미에 변경백이다! 그늘에 숨은 자는 당장 내 앞으로 나와 모습을 보여라!”

사위는 고요했다.

마찬가지로 무기를 꺼낸 수비대원들이 원형으로 흩어져 주위를 경계했다. 침이 꼴깍 넘어가는 소리마저 천둥처럼 들릴 정도였다.

그때, 수풀이 바스락거리더니 경갑을 착용한 병사들이 걸어 나왔다.

“도미에 변경백이시라고요?”

가장 앞장선 병사가 투구를 벗으며 믿을 수 없다는 눈치로 반문했다.

“정말로 변경백이 맞으시군요. 한 달 전쯤에 요새를 지나가지 않으셨습니까?”

“그랬지. 미에투넨으로 가는 길에 괴한들에게 납치당하신 황태자 전하와 황녀 전하를 발견하곤 여기까지 쫓아왔다.”

변경백이 수비대원의 등에 업힌 알리오나를 눈짓했다.

“다행히 황녀 전하는 되찾아 모실 수 있었다.”

“맙소사….”

병색이 완연한 알리오나의 모습에 병사가 낮은 침음을 흘렸다.

“지금 바로 요새로 가시죠. 군의가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그게 좋겠군. 유디트 아가씨는 요새에 계시나?”

“아니요. 실은 황태자 전하와 황녀 전하께서 납치당하셨단 소식을 들으시곤 직접 수색대를 이끌며 산을 뒤지고 계십니다. 아마… 저쪽으로 가셨을 겁니다. 저희는 혹시 몰라 수색대 본대와는 반대 방향에서 움직이고 있었죠.”

“그래?”

변경백이 미미하게 웃었다. 병사가 예, 하고 대답하며 몸을 트는데, 푹 하는 소리와 함께 단검이 그의 목을 파고들었다.

병사는 목 졸리는 소리를 내며 주르륵 허물어졌다. 변경백은 허리를 굽혀 그의 목에 박힌 단검을 뽑았다. 멍하니 그 상황을 지켜보던 수색대원 중 누군가 쨍그랑, 무기를 떨어트렸다.

“벼, 변경백이 왜….”

말을 이을 겨를도 없이 방벽 수비대가 달려들었다. 무기를 채 뽑아 들지 못한 수색대가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나머지 수색대원들이 하나둘 검을 뽑기 시작했다.

“변경백! 도대체 왜 이러시는 겁니까!”

그는 대답 없이 검을 크게 휘둘러 가까운 병사의 허리를 베었다. 두 동강 나는 몸 사이로 살의를 가득 담은 검이 밀려 들어왔다. 변경백은 흐트러진 자세로 적의 공격을 받아 내며, 진흙밭에 미끄러진 발을 들어 상대의 다리를 세게 걷어찼다.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던 알리오나가 자신을 업은 수비대원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나는 걱정 말고 가서 싸우거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