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요?”
“자네도 가담하지 않았나!”
정말로 모르겠다는 듯 두 눈을 끔벅거리던 본시오가 뒤늦게 바람 빠지는 듯한 탄성을 질렀다.
“설마 카타리나 공작을 죽인 그 일….”
“여, 여기가 어디라고 그딴 망언을 꺼내! 제발 그 입 좀 조심하라 이르지 않았나!”
“어차피 듣는 사람도 없잖습니까?”
“듣는 사람이 없다니! 하늘에는 천사가 있고, 지하에는 마귀가 있어! 어찌 그리 경거망동해!”
본시오가 어이없다는 듯 픽 웃었다.
“아니, 이렇게 겁이 많으신 분께서 그런 거사는 어찌 계획하셨답니까?”
아나클레토가 죽일 듯이 그를 노려보았다. 그조차 가소롭다는 듯 본시오가 느른하게 웃었다.
“예, 뭐, 어찌 됐건 엘피도 공작이 그 일의 배후를 알아챘다고 생각하시는군요.”
“배후라니!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한 건 따로 있….”
“물론 그렇죠. 그런데 예하나 저나 그자의 정체를 모르니 엘피도 공작을 설득할 방도가 없지 않습니까? 애당초 설득이 가능할지도 의문입니다만.”
무료하게 갈대를 질겅거리던 본시오가 툭 던지듯 물었다.
“그런데 정말로 그 일 때문일까요?”
“뭐?”
“엘피도 공작 말입니다. 고작 그만한 일 때문에 동부에서 반란을 일으켰다곤 잘 납득이 되질 않아서요. 그럴 사람이 아니지 않습니까?”
“자네, 지난번 성촉절의 일을 까맣게 잊은 겐가? 그자가 감히 나한테 칼을 들이밀었어, 칼을!”
“예하뿐만 아니라 추기경단 모두에게 검을 겨누었죠. 그리고 어찌 되었든 엘피도 공작은 사도이니 ‘감히’를 붙일 만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만.”
목 뒤를 붙잡는 아나클레토를 아랑곳하지 않으며 본시오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만일 아나클레토의 망상대로 엘피도 공작이 3년 전의 그 일로 앙심을 품었다면, 저렇게 겁먹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바도비체 후작은 그저 아나클레토의 계획을 황제에게 전달한 연락책에 불과했으므로. 3년 전 일에 연루된 사람들 중 가장 죄질이 가벼운 이가 바로 후작이었다.
그런데 그런 후작조차 잘린 목으로만 남았다면, 다른 사람들은 얼마나 처참하게 죽이려는 심산일까.
본시오의 입가에 슬며시 미소가 번졌다.
“…오랜만에 꽤 전율이 일겠군.”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점검했다.
“귀중한 정보 감사합니다. 저도 대비를 해야겠군요.”
“좋은 생각이야. 일단 내 호위부터 어떻게 좀 강화를….”
“유감스러우나 예하를 도와드릴 순 없습니다.”
아나클레토가 멍하니 그를 올려다보았다. 뒤룩뒤룩 살이 붙은 얼굴이 땀에 젖어 창백하게 윤이 돌았다.
“…뭐라고?”
“아시잖습니까. 제가 지금 누굴 모시고 있는지.”
본시오가 어깨를 가볍게 으쓱였다. 귀신이라도 본 듯 얼빠져 있던 아나클레토가 별안간 넘어질 것처럼 일어나 본시오의 멱살을 잡았다.
“네가 어떻게 감히…!”
아나클레토는 시뻘건 격노로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본시오가 실실 웃었다.
“제게 신의를 기대하시다니, 예하답지 않으십니다. 제가 지금껏 어떻게 살아왔는지 잘 아시지 않습니까?”
“알다마다…! 네놈이 지나온 길은 모조리 폐허가 되었지! 그 역겨운 라발의 용병대를 배반하여 잘도 살아남더니, 이번엔 나까지 배신하려 들어?!”
더러운 것이라도 만진 양 그의 멱살을 홱 놓은 아나클레토가 본시오의 면전에다 대고 손가락질했다.
“하지만 이번만은 네 뜻대로 아니 될 것이다! 카니나의 페기를 죽인 건 너야! 내가 이 사실을 무덤까지 가져가리라 생각하느냐?!”
“물론 예하의 입이야 저만큼이나 가벼우시겠지만, 그걸 어디다 말씀하신답니까? 성하께서 아시면 예하도 같이 죽을 목숨입니다. 설마 엘피도 공작에게 쪼르르 달려가 이를 생각은 아니시겠지요?”
“네가 날 보호하지 않는다면 그리되겠지! 어차피 죽을 목숨인데 너 하나 물고 늘어지는 게 어려울 성싶더냐!”
“아…. 그러십니까?”
본시오가 시큰둥하게 반응했다.
“그런데 예하께선 곧 저뿐만 아니라 교회의 보호도 받지 못하게 되실 텐데요.”
“그게 무슨 헛소리야?!”
“듣지 못하셨습니까? 예하께서 저지르신 죄악을 폭로하는 익명의 투고가 빗발치고 있다던데요, 지금.”
아나클레토가 멍하니 입술만 뻐끔거렸다. 잠시 고민하던 본시오가 이내 뒷머리를 긁으며 실없이 웃었다.
“예, 뭐, 옛정이 있으니 살짝 귀띔해 드리겠습니다. 제가 들은 바론 교구 지원금 착복, 뇌물 수수, 불법적인 도박 사업에 투자하신 것으로도 모자라 비셀스하임 소년 합창단의 단원들을 주기적으로 강간하셨다는….”
“그, 그만! 그만해! 지금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그러니까 말입니다. 참 말도 안 되는 헛소리인데 그 증좌가 명확하다고 하질 않습니까?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지, 저는 진심으로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허연 종잇장처럼 질린 아나클레토가 휘청거리며 벽을 짚었다.
어젯밤 화마에 집어삼켜지는 꿈을 꾸었다. 화들짝 놀라 깨어나자마자 들은 것이 형님의 부고 소식이라, 당연히 엘피도 공작에 대한 경고인 줄 알았다. 더한 악몽이 기다리고 있을 줄은 조금도….
“알비야 공작 전하께선 이 사안을 엄중히 받아들이고 계십니다. 저는 교회법에 대해 잘은 모르지만 단순히 추기경 직위 박탈로는 끝날 문제가 아닌 것 같군요. 지금이라도 고향으로 돌아가시는 편이 좋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아나클레토는 충격에 귀가 멀어 어떤 소리도 듣지 못하는 것 같았다. 사정이 안타깝게 되었다는 듯 본시오가 은밀히 속삭였다.
“성궁 밖에서 제가 긴히 알고 지내는 이들에게 예하의 호위를 부탁하겠습니다. 예하의 고향까진 먼 길이나 아쉽지 않게 모실 겁니다.”
본시오는 마지막으로 그의 어깨를 두드려 주곤 미련 없이 방을 빠져나갔다. 그때까지도 아나클레토는 넋이 나간 모습이었다.
이튿날, 알비야 공작이 아나클레토의 파문을 발표했다.
그가 저지른 죄악은 추기경으로서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수준이라는 것이 파문의 요지였다. 동시에 10년간 금고형에 처할 것을 명했으나, 근위대가 아나클레토의 사택으로 침입했을 때 이미 그는 자취를 감춘 뒤였다.
동시에 고향을 향해 달려가던 그의 마차가 연락이 두절 된 채 흔적 없이 사라졌다.
***
“가위바위보.”
차라는 재빨리 내민 손들을 확인했다.
“젠장.”
“어떻게 넌 맨날 지니?”
요슈아가 낄낄거리며 차라의 어깨를 툭툭 쳤다. 차라는 신경질적으로 그의 팔꿈치를 뿌리쳤다.
“이건 사기야. 내가 지는 건 원래 그렇다고 치는데, 어떻게 넌 맨날 이길 수 있어?”
“행운이 날 사랑하는 거지.”
“몇 번 이겼다고 유세는.”
바위에 늘어져 있던 알리오나가 시큰둥하게 중얼거렸다. 그러자 요슈아가 해맑은 얼굴로 꽃받침을 하며 히죽 웃었다.
“왜애? 누나도 나 못 이겨 봐서 짜증 나?”
“누가 네 누나야?”
“누나잖아. 나보다 두 살 많으니까.”
알리오나가 진저리 치며 반대편으로 돌아누웠다. 차라는 한숨을 푹 내쉬며 요슈아의 귀를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아야!”
“요슈아랑 다녀올게요. 가일이랑 변경백은 좀 쉬어요.”
벌떡 일어나려는 변경백과 가일을 말리며 차라는 요슈아를 질질 끌고 산길로 들어갔다. 요슈아가 요란하게 엄살을 피웠다.
“아파! 아프다니까!”
“아우, 시끄러워.”
차라가 인상을 쓰며 손을 놓자, 요슈아는 잡혔던 귓바퀴를 감싸 쥐며 울상을 지었다.
“하여간 손은 매워 가지고…. 바빠 죽겠는데 나는 왜 끌고 와!”
“네가 왜 바빠?”
“알리오나를 감시해야지!”
“감시?”
차라가 멀뚱히 반문하자, 요슈아가 갑갑하다는 듯 소리를 높였다.
“걔 요새 변경백을 노리고 있잖아!”
“사이좋게 지내는 걸 왜 노린다고 해. 보기 좋구만.”
“와. 사도님은 머리가 꽃밭이야? 그 악바리가 아무런 이유도 없이 잘해 주겠어? 너한테 잘해 줬던 것도 다 황궁에서 도망치려고 그랬던 거잖아!”
“알리오나가 너한테만 못되게 구는 게 그렇게나 억울하면 네가 먼저 잘해 주면 되잖아. 별것도 아닌 거로 과장이야.”
차라가 쯧쯧 혀를 차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착실히 그를 뒤따라오면서도 요슈아는 고집스럽게 중얼거렸다.
“변경백마저 그 악바리의 마수에 걸려들게 할 순 없지. 암, 그렇고말고.”
차라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이럴 때의 요슈아는 정말로 미친 사람 같았다.
“헛소리는 그만하고 빨리 땔감이나 찾아봐.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 돌아가야….”
멀리서 다그닥거리는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두 사람은 즉각 커다란 바위 뒤로 몸을 숨겼다. 머잖아 길 저편에서 두 마리 백마가 이끄는 마차가 나타났다. 마차는 굽이진 길에서조차 속도를 줄이지 않고 위태롭게 달려갔다.
슬쩍 고개를 빼서 마차의 뒤꽁무니를 확인한 차라가 아연하게 중얼거렸다.
“저 문장은….”
***
“미친년.”
바도비체 후작의 둘째 여식, 유디트 바도비체가 살벌하게 쏘아붙였다.
“너 같은 화냥년은 내가 살다 살다 처음 본다. 무슨 낯이 있어서 네가 여길 와? 네 잘난 약혼자한테나 가 버리지, 네년이 어떻게 내 앞에 얼굴을 들이미냐고!”
유디트가 쾅! 탁상을 내리쳤다.
그럼에도 세도파는 자매에게 한 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기실 그녀의 시선은 한 군데에만 꽂혀 있었다.
상자에 담긴, 바도비체 후작의 목.
“오스트라트에서 온 파발 어디 있어. 그래, 너. 네가 와서 똑바로 설명해. 난 도저히 저 썩을 년에게 해 줄 말이 없다.”
유디트가 거칠게 의자를 밀며 일어나 창가로 향했다. 얼결에 지목당한 파발이 우물쭈물하며 입을 열었다.
“그게… 반란군이 오스트라트 기지를 침공한 날 새벽부터 후작 각하께선 행방이 묘연하셨습니다. 그러다 반란군이 진군해 왔는데, 엘피도 공작이 던진 창끝에 후작 각하의 목이 매달려 있었….”
“누구 짓인데.”
“누구긴! 네 약혼자가 그랬겠지! 아, 이젠 약혼자도 아닌가? 결혼할 거라고 하더니 그 후로 연락이나 있었니?”
성큼성큼 다가온 유디트가 거칠게 세도파의 멱살을 잡아 올려 자신을 보게 했다.
“네가 아버지를 죽인 거야! 네가! 아버지가 몇 년째 계속 말리셨잖아! 그 남자는 안 된다고, 너를 파멸로 이끌 거라고! 그때마다 네가 뭐라고 했어? 그럴 리 없다며! 전하가 널 버릴 리 없다며! 그런데 결국 이 꼴이야? 뒈지려면 너나 가서 뒈지지, 왜 엄한 아버지까지 죽게 만드냔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