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0화 (140/328)

페기는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이것이 맞는 선택일진 모르겠으나 무너지는 그를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그가 여전히 그녀를 그리워하는 만큼, 그녀도 여전히 그를 소중하게 여겼다. 그가 바라는 것이 잠깐의 안식이라면 내어 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의 등에 손이 닿기도 전에 그가 먼저 몸을 일으켰다. 뒤돌아 휘청거리며 걷던 그가 어지러운 듯 책상을 짚으며 깊은숨을 토해 냈다. 페기가 다가가려 하자, 그새 싸늘해진 목소리가 그녀의 발목을 붙잡았다.

“지금 당장 보급 부대로 합류해.”

“…네?”

“호위를 더 붙여 줄 테니 후방으로 가. 가서 다시는 전방으로 나오지 마라.”

순간 머릿속이 새하얘진 페기가 황망히 걸음을 옮겼다.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제가 없으면 누가 전하를 보좌한다는….”

“말 좀 들어!”

사나운 일갈에 그녀의 발걸음이 멎었다. 페기는 망연자실하게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얇은 가운만 걸친 그의 등이 유독 야위어 보였다. 간신히 책상을 짚고 서선 더운 숨만 힘겹게 헐떡이고 있었다.

“반지는 내게 없다.”

“……”

“누구에게 있을지 대강 짐작은 간다만… 확실해지면 알려 주마. 그러니 가.”

흔들리다 못해 숫제 절박하게까지 들리는 목소리였다. 측은하게 그를 보던 페기가 조용히 입술을 달싹였다.

“제가 없어야 편해지실까요?”

“…그래.”

다시 성곽을 세운 듯 단단해진 그의 뒷모습은 더 이상의 대화를 거부하는 듯했다. 페기는 애써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돌렸다. 막사를 빠져나오자, 서늘한 밤공기가 열 오른 살갗으로 달라붙었다.

“아가씨!”

근처에서 막시모와 놀이를 하던 마샤가 해맑은 얼굴로 달려왔다. 페기는 미소 비슷한 것을 지어 주려고 했지만 성공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마샤. 가서 짐을 챙기렴.”

마샤의 뒤로 뭉그적뭉그적 다가오던 막시모가 흐트러진 그녀의 차림을 보고 얼굴을 굳혔다. 페기는 벌어진 옷깃을 덤덤하게 추슬렀다.

“아무 일도 없었어요.”

“하지만….”

“괜찮아요. 어차피 나는 떠나야 하니까.”

잠시 고민하던 페기가 목에 걸어 두었던 금고의 열쇠를 막시모에게 건넸다. 이것을 돌려주는 날엔 홀가분해지리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그녀는 못내 씁쓸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전하를 부탁해요.”

막시모가 막사로 들어갔다. 예후르는 한 손에 얼굴을 파묻고 위태로이 책상에 기대어 서 있었다. 그가 비척비척 침상으로 돌아가 앉자, 막시모는 조용히 책상으로 다가가 촛불을 붙였다.

“아델라이데 아가씨는 방금 후방으로 떠났습니다.”

촛대에 그을음이 진 것을 발견한 막시모가 특유의 결벽주의적인 성향이 발동했는지 손톱으로 그을음을 긁어내기 시작했다.

“옆에 두고 보니 머리도 꽤 잘 돌아가고 감시하기도 한결 수월하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왜 보내신 겁니까?”

“…그 애가 두 번 다치는 꼴을 내가 못 견딜 것 같아서.”

막시모의 표정이 해괴해졌다.

“지금 저보고 믿으라고 하시는 말씀입니까?”

“내가 오만했다. 당연히 곁에 두면 안전하리라 생각했는데, 여태 누구 하나 제대로 지키지 못했다는 걸 잊고 있었어.”

낮게 읊조리는 소리에는 흔한 웃음기조차 배어 있지 않았다. 촛대를 내려놓고 물끄러미 그를 응시하던 막시모가 물었다.

“말씀하시는 그 애가 도대체 누굽니까.”

“…….”

“아델라이데 피아제입니까, 아니면 돌아가신 카타리나 공작 전하입니까?”

예후르는 괴로운 듯이 눈가를 감싸 쥐었다. 막시모가 저도 모르게 날카로운 헛웃음 소리를 흘렸다.

“설마설마했는데, 정말로 그 아가씨에게서 카타리나 공작 전하를 보고 계셨던 겁니까? 그런데 왜 이러고 계십니까? 전하의 눈이잖아요. 세상에 믿을 것이 없어서 전하의 눈을 믿지 못하고 계셨습니까?”

“내 눈은 흐려진 지 오래다. 더는 옛날처럼 모든 것이 뚜렷하게 보이지 않아.”

예후르가 눈가를 가린 채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답답하다는 듯 양손을 허리에 올리고 제자리를 서성이던 막시모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좋습니다. 원래는 전하께서 괜히 심란해하실까 봐 입 다물고 있었는데 이쯤 되니 저도 할 말은 해야겠습니다.”

“…….”

“그 아가씨. 카타리나 공작 전하의 기척과 아주 유사합니다. 보폭, 걷는 자세, 무의식적인 습관까지도요. 생전의 그분을 마가 공작 전하처럼 유심히 관찰한 것은 아니라 무조건적으로 확신은 못 합니다만, 이 정도면 전하의 의심을 거둘 만한 단서가 되지 않겠습니까?”

“네가 착각한 것이겠지.”

“전하, 젠장맞을, 죽은 사람이 되살아날 수도 있는 거잖아요. 전하 같은 분도 계신데, 되살아난 망자 하나가 없겠습니까? 되살아나길 바라지 않으시는 것도 아니고, 도대체 왜 그렇게 일말의 가능성마저 부정하시는 겁니까?!”

“나라고 그런 생각을 하던 때가 없었을까.”

막시모가 멈칫 입을 다물었다. 불빛이 흐릿하게 닿는 그의 모습이 불현듯 아주 오래된 자연물처럼 느껴졌다. 까마득한 시간을 견딘 고목, 혹은 오랜 세월 깎이고 깎인 절벽처럼.

“나도 한때 그와 같은 가능성에 매달려 살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분명하던 내 눈에도 길이 보이지 않았고, 나의 가장 현명한 형제조차 답을 찾지 못했지.”

“…….”

“그럼에도 희망을 놓지 못했다. 내가 보지 못하는 길이 있을지도 모르며, 가장 현명한 형제조차 헤아리지 못하는 답이 있으리라 생각했어. 그 결과가 어땠으리라 생각하느냐.”

예후르가 입술을 떨듯이 웃었다.

“수많은 형제들을 잃었지만, 누구도 돌아오지 못했다. 그제야 깨달았지. 희망이란 어떠한 결과도 담보하지 못하는 무책임한 감정이며, 현실을 호도하게 만드는 미련일 뿐이라고.”

수없이 달싹거리던 막시모의 입술이 끝내 다물렸다.

그가 버텨 온 저 막막한 세월에 무슨 말이라고 통할까.

막시모는 그를 설득하길 단념했다. 늘 그렇듯 설득당하는 건 자신이었으므로.

“…그럼 왜 그 아가씨의 민낯을 보려 하지 않으시는 겁니까.”

만일 그의 말대로, 경험적으로든 이론적으로든 망자가 되살아나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라면 정체가 모호한 아델라이데 피아제의 사술을 벗기면 그만이다. 민낯을 확인하면 이미 떠나간 자의 망령을 보며 괴로워할 일은 없지 않겠나.

그러나 예후르는 좀처럼 대답이 없었다. 막시모는 그의 침묵에 더욱 참담해졌다.

“무서우십니까. 정말로 카타리나 공작 전하가 아닐까 봐.”

그는 이미 결론을 내렸다.

아델라이데 피아제는 죽은 카니나의 페기일 수 없다고.

그러나 그것을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그는 한때 품고 살았던 희망에 대해 참으로 박한 평가를 내렸으나, 여전히 그 희망이란 것에 휘둘리고 있었다.

그뿐일까.

“만에 하나 카타리나 공작 전하면 어쩌시려고요.”

“그럴 리 없다.”

“만에 하나라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예후르는 가만히 고개를 들었다. 어렴풋한 불빛 속에서 금안이 비인간적으로 일렁였다. 한 꺼풀 벗겨 내면 존재를 드러낼 고대의 신성성이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 불안정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순간 가슴이 철렁한 막시모가 황급히 고개를 조아렸다.

“송구합니다. 제가 말이 너무 길었군요.”

잠잠한 적막이 이어졌다. 막시모는 모골이 송연해지는 기분으로 그의 침묵을 버텨 나갔다. 그의 곁에선 늘 죽음이 가까웠다.

“…너는 왜 함께 떠나지 않았지?”

“아, 그것부터 말씀드려야 했는데. 실은 후방에서 굉장히 수상쩍은 사람을 발견했습니다.”

막시모가 조금 허둥지둥했다.

“그게… 제 판단으론 마가 공작 전하이신 듯합니다.”

예후르가 문득 눈가를 쓸던 손을 내리며 허리를 폈다.

“안드레아라고? 얼굴을 확인했나?”

“아니요. 그건 아닙니다만… 말씀드렸잖습니까. 제가 다른 건 몰라도 마가 공작 전하의 기척만은 꿰뚫고 있다고요.”

기실 오기로 익힌 것이나 다름없었다. 일평생 모든 임무를 완벽하게 수행했던 그의 자존심을 상처 낸 것으로 모자라 아예 갈기갈기 찢어 놓은 장본인이었으니까.

“제가 전하의 명으로 오랫동안 마가 공작 전하의 뒤를 캐고 다녔다는 걸 기억하실 겁니다. 그때는 그분께 골탕을 먹기 일쑤라 전하의 명을 제대로 완수한 적이 없었습니다만, 혹여 또 그런 명이 내려올까 지금껏 철저히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본인은 뭐라고 하던가?”

“당연히 잡아떼셨는데… 아시잖습니까. 마가 공작 전하의 언행이 워낙 거치신 거. 열 받으시니 본래의 태도가 나오더군요.”

막시모는 그녀에게 얻어맞았던 옆구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아직도 뻐근하게 아팠다.

“일단은 혹시 몰라 구금해 두었습니다. 여기까지 모셔 왔는데 한번 만나 보시죠.”

“…아니.”

그의 거절에 막시모는 조금 놀랐다. 피한다면 안드레아 쪽이지, 그가 먼저 나서서 그녀를 피한 적은 없었기에.

예후르는 사색에 잠긴 듯 가만히 아랫입술을 매만졌다.

“그 애를 만나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참 복잡하게도 사십니다. 안 그러시던 분이.”

예후르가 맥없이 읊조렸다.

“그러게나 말이다. 나도 사는 것이 이렇게 복잡한 줄은 미처 몰랐구나.”

***

정신없이 복도를 내달리던 아나클레토가 훈련장의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본시오! 본시오는 어디 있나!”

목검을 들고 멀뚱히 서 있는 근위대원들 사이로 본시오가 갈대를 질겅거리며 나왔다.

“아니, 추기경 예하가 아니십니까. 여기까진 어쩐 일로?”

“이런 데서 할 이야기가 아닐세.”

“뭐… 그러시다면야.”

본시오는 휘하 대원들에게 손을 팔랑거리며 인사하곤 아나클레토를 따라 훈련장을 나섰다.

이후 두 사람은 말 한마디 없이 걸었다. 아나클레토는 누구에게 쫓기고 있기라도 한 양 식은땀을 뻘뻘 흘렸다. 실로 구역질 나는 땀내에 입꼬리를 죽 늘어트린 본시오가 부러 사선으로 멀찍이 떨어졌다.

아나클레토는 외진 방에 들어서도 커튼을 젖혀 창밖을 확인하고, 장식장을 열어 보는 둥 수선을 떨었다. 기다리다 못한 본시오가 소파에 느긋하게 앉아선 핀잔을 주었다.

“대충하시죠. 그만큼 했으면 훔쳐 듣는 사람이 없다는 것쯤은 아실 텐데.”

“입 닥치게. 지금이 얼마나 위급한 상황인지 몰라?!”

“아, 예하의 형님께서 돌아가셨단 소식은 들었습니다. 바도비체 후작님이셨나요?”

아나클레토의 얼굴이 흉흉하게 일그러졌다. 그는 땀으로 축축 젖은 턱을 닦으며 본시오의 맞은편에 앉았다.

“안다면 얘기가 빠르겠군. 앞으로 자네가 날 좀 지켜 줘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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