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때문이에요.”
“네?”
“나 때문에 맞으셨다고요. 날 감싸시다가….”
페기가 입술을 짓씹으며 고개를 떨구었다.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던 막시모가 연거푸 얼굴을 쓸어내리며 어떻게든 평정을 찾으려 애썼다.
“예, 뭐, 일단 해독제부터 찾아오겠습니다. 메우렐리시타 풀이 원래 남쪽에 분포하는 데다, 지금 나는 철이 아니라 찾는 데 시간이 좀 걸릴 거예요. 용 기병대 죄다 끌고 다녀올 테니까, 아가씨는 여기서 기다려요.”
“그동안 군의한테 일반적인 해독제라도 얻어서….”
“소용없습니다. 맹독이라고 했잖아요. 평범한 사람이었으면 벌써 죽고도 남았다고요.”
페기의 안색이 핼쑥하게 질렸다. 다소 짜증스럽게 대꾸했던 막시모가 그 모습을 보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봐요, 먼 곳에서 오신 아가씨. 전하께선 고작 저런 독 따위로 돌아가실 분이 아닙니다. 가만 놔두어도 시간이 좀 걸릴 뿐 완벽하게 회복하실 거예요. 다만 여긴 병영이고, 안전한 곳이 아니기에 전하께서 조속히 일어나실 수 있도록 회복제를 찾으러 가는 거고요.”
“…….”
“이해했어요?”
페기가 다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막시모는 피 묻은 손을 쓱쓱 바짓단에 문질러 닦으며 심란한 기색으로 막사의 문을 돌아보았다.
“지금 가장 걱정스러운 건 전하의 안전입니다. 아까 오는 길에 듣자 하니 페임하른 공작은 전하를 쏘아 맞힌 탐보프의 잔당을 처리하러 떠났다고 하더군요. 공작을 말리겠답시고 그 측근들도 공작을 뒤쫓아 갔고요.”
“수뇌부 중 전하께 반감을 가진 이들만 남았겠네요.”
“이해가 빨라서 편하네요. 맞습니다. 틸브레히트 경을 비롯해 덜떨어진 싸움꾼들만 남았죠. 십중팔구 전하께서 쓰러지신 이 기회를 놓치지 않을 겁니다.”
신중히 고민하던 페기가 의견을 냈다.
“전하를 따르는 병사들로 막사를 지키게 하는 건 어떨까요?”
“나쁘지 않은 생각이지만, 틸브레히트 경은 중군 우측 날개를 지휘하는 고위 기사입니다. 당장 비키라고 뻗대면 일개 병사가 당해 낼 수 없겠죠. 메우렐리시타 풀을 찾으려면 용 한 마리가 아까운 상황이지만, 어쩔 수 없이 가장 느린 한 마리를 두고 가는 수밖에….”
끼아아아악!
갑자기 찢어질 듯한 용의 울음소리가 울리며 거센 돌풍이 들이닥쳤다. 흔들리는 막사를 멍하니 올려다보던 막시모가 실낱같은 미소를 지었다.
“코른헤르트군요. 다행입니다. 저 재수 없는 녀석이라면 전하를 믿고 맡길 수 있겠죠.”
막시모는 외투를 챙겨 입으며 나갈 채비를 했다. 페기가 그를 배웅하기 위해 침상에서 나오자, 막시모가 손을 들어 그녀를 만류했다.
“아까 말씀드렸잖습니까. 여기 계시라고. 나오지 마십시오.”
얼떨결에 걸음을 멈춘 페기가 당혹한 기색으로 눈만 깜박였다. 막시모가 갑갑하다는 듯 꺼칠한 얼굴을 문질렀다.
“코른헤르트가 있으니 전하는 걱정이 없습니다. 오히려 지금 제일 위험한 건 아가씨예요.”
“내가요?”
“거참, 아까는 잘만 이해하더니 왜 그럽니까? 틸브레히트 경이 아가씨한테는 원한이 없겠어요? 전하를 못 잡으면 아가씨라도 잡아서 분풀이를 하려 들 겁니다.”
페기는 방한용품 구입 문제로 제게 험한 말을 쏟아부었던 중년의 기사를 떠올렸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동부의 많은 고위 기사들이 군자금을 틀어쥔 그녀를 아니꼽게 여기고 있었다.
“내가 돌아올 때까지 막사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마십시오. 코른헤르트는 전하만을 지킬 테지만, 아가씨가 전하와 함께 있는 이상 누구도 이 막사로 들어올 생각은 못 할 겁니다.”
페기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막사의 문을 들추던 막시모가 한숨을 삼키며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군자금 금고는 어디 있습니까?”
“저기요.”
페기가 책상을 가리켰다. 열쇠는 그녀가 갖고 있었다.
“만에 하나 위험해지면 군자금을 넘기십시오. 반박하지 마세요. 들어 줄 시간도 없으니까. 내 말은, 아가씨의 목숨을 가장 귀하게 여기란 뜻입니다.”
“…….”
“난 전하를 두 번 잃고 싶지 않아요.”
이해할 수 없는 말에 페기는 그저 의심스러운 시선만 보냈다. 막시모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듯 훌쩍 막사를 나갔다. 곧 용 기병대가 떠나는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제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던 페기가 느릿느릿 입구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막사의 문을 살짝 들추어 호위 기사를 손짓으로 불렀다.
“아, 아가씨. 전하는 어떠십니까? 괜찮으신 거죠?”
호위 기사가 안절부절못하며 물었다. 페기는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았다. 예후르가 직접 그녀에게 붙여 준 사람이니 믿을 만할 것이다. 적어도 예후르를 숭상하는 마음만은 진실되리라.
“…나는 지금 전하의 곁을 떠날 수 없으니, 당신이 내 막사로 가서 마샤를 지켜 줘요.”
“아….”
“전하께선 곧 괜찮아지실 거예요.”
그제야 기사의 낯이 폈다. 그는 곧은 자세로 경례한 뒤 어둠 속으로 달려갔다. 페기는 막사의 문을 닫고 예후르의 곁으로 돌아왔다.
그는 여전히 밀랍처럼 굳어 있었다. 페기는 침대 옆에 앉아 그의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식은땀을 닦아 주었다.
그러고 보면 그가 아픈 것은 본 적이 없다.
그녀가 알던 예후르는 언제나 강건한 사람이었으므로. 이렇듯 창백하게 질린 얼굴도, 뜨일 줄 모르는 눈도, 멈추지 않는 피도, 모조리 처음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그녀 때문에.
“왜 그랬어…?”
페기는 입술을 깨물었다. 속삭이는 목소리에 울음이 섞여 들었다.
“그냥 죽게 놔두지…. 너한테 나는 아무것도 아니잖아.”
고작해야 사술을 뒤집어쓴 간자.
혹은 망자를 떠올리게 하는, 성가신 존재.
그에게 페기는 딱 그 정도 존재였다. 간혹 망자를 겹쳐 볼 때마다 상냥해지는 태도도 그 순간뿐이었다. 예후르는 그 이상 그녀에게 의미를 부여하길 의식적으로 거부했을 것이며, 그의 반듯한 이성이 엇나가려는 그의 감정 체계를 완벽하게 방비했으리라.
그래야 했다.
그래야만 그녀가 알던 예후르니까.
“난 이제 너를 모르겠어.”
미쳤다는 말을 수없이 들었지만 실상 크게 변한 것 같지 않았다. 나의 죽음에 조금도 흔들리지 않은 듯한 너에게 서운했지만, 한편으론 안심했다. 세상에 나만큼 너를 잘 아는 사람이 없으니, 너에게만은 무사히 달아날 수 있겠구나 싶어서.
하지만 이제는 확신할 수 없다.
너는 여전히 내가 알던 그 사람일까.
쉽게 죽음을 말하고, 쉽게 정의를 내리고, 쉽게 자신의 목숨을 버리는 너를 이제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다.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정말 하나도 모르겠어.
다만 확실한 한 가지는.
“…무서워.”
네가 떠날까 봐.
페기는 더듬더듬 그의 손을 찾아 쥐었다. 얼음장 같은 손이 닿자 다시금 눈물이 울컥 치솟았다.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
“내가 미워서 이러는 거야? 나도 한번 고통받아 보라고?”
“…….”
“어쩜 이렇게 잔인해….”
때로 그가 밉고 원망스러웠지만, 이런 걸 바란 적은 없었다. 이건 악몽이었다.
“차라리 내가 죽는 게 나아. 내가 널 어떻게 보내. 어떻게 널 보내고 살아.”
뺨을 타고 눈물이 흘렀다. 페기는 아랫입술을 애써 힘주어 앙다물며 이마에 그의 손을 갖다 댔다. 늘 태양 같던 사람에게서 흘러나오는 냉기가 눈물겹게 아렸다.
“제발 돌아와….”
떨리는 속삭임이 그의 손안으로 잦아들었다. 무거운 정적 사이로 소리 죽인 흐느낌이 끊임없이 스며들었다.
시간은 덧없이 흘러갔다.
페기는 예후르가 비처럼 쏟아 내는 식은땀을 닦으며 초조하게 막사 밖의 인기척에 귀를 기울였다. 여전히 용 기병대가 돌아왔다는 소식은 들리지 않았다. 갈수록 차가워지는 그의 체온에 마음만 조급해졌다.
그런데 문득 바깥이 소란스러워졌다. 불안하게 막사의 입구를 응시하던 페기는 별안간 소리 높여 들려오는 호위 기사의 외침에 벌떡 일어섰다.
“아가씨!”
페기는 막사의 문을 홱 열어젖혔다. 난데없이 눈을 찌르는 횃불에 눈이 확 찡그려졌다.
“무슨 일이에요?”
“그게….”
코끝으로 피 냄새가 확 닿았다. 페기는 저도 모르게 표정을 굳히며 호위 기사의 전신을 훑어보았다.
빈말로도 멀쩡한 상태가 아니었다. 얼굴은 쥐어 터진 듯 못 알아보게 부어 있었고, 다리를 접질리기라도 했는지 기둥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페기는 아연한 기색으로 대답을 재촉했다.
“행색이 왜 그 모양이에요. 마샤는 어디 가고….”
말하면서 깨달았다.
페기가 차마 말을 잇지 못하자, 호위 기사는 침통하게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송구합니다. 제가 부족하여… 명을 이행하지 못했습니다.”
“…틸브레히트 경이에요?”
“네.”
가만히 숨만 삼키던 페기가 흘러내린 머리를 넘기며 침착하게 막사 밖으로 나왔다.
“어디예요?”
“가시면 안 됩니다.”
“내가 데려온 아이예요. 내가 책임지지 않으면 누가 그 애를 책임져요.”
페기의 강경한 태도에 호위 기사가 눈을 질끈 감았다.
“북쪽 공터입니다.”
“…….”
“아가씨, 그 하녀 아이를 아끼시는 건 잘 알지만 한 번만 다시 생각해 주십시오. 아가씨께서 잘못되기라도 하시면 엘피도 공작 전하는 어떡합니까. 전하를 돌보셔야지요.”
“…전하는 괜찮을 거예요.”
페기는 막사 위를 맴도는 하얀 용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예후르는 안전할 것이다.
“그럼 제가 같이 가겠습니다.”
“그 몸으로 어딜 간다는 거예요. 치료부터 받아야 할 사람이.”
“어떻게 아가씨를 혼자서만 보냅니까!”
“혼자든 둘이든 그게 중요해요? 어차피 상대는 떼거리로 몰려 있을 텐데.”
쏘아붙인 페기가 잠시 입술을 다물고 있다가 소리 죽여 말했다.
“대신 경이 해 줘야 할 일이 있어요.”
페기는 고개를 기울여 호위 기사의 귓가에 무어라 속삭였다. 호위 기사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페기는 그의 어깨를 두드려 주곤 북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야심한 시각이었다.
군데군데 매달린 횃불을 제하면 병영은 깊은 어둠에 잠겨 있었으나, 저 북쪽으로 환한 불빛이 모여 있었다. 페기는 웃옷 위로 목걸이를 꽉 쥐며 발길을 재촉했다. 공터에 가까워질수록 웃고 떠드는 야만적인 소리들이 귀를 찔렀다.
“아, 저기 오네!”
누군가 술병을 들어 올리며 외쳤다. 수십의 눈알이 그녀에게로 꽂혔다. 페기는 틸브레히트의 발아래에 무섭도록 시선을 고정시켰다.
마샤는 사지가 묶인 채 엎드려 있었다. 옷은 온통 흙투성이에 얼굴은 눈물범벅이었다. 재갈 물린 입에선 흐느끼는 소리만 연신 새 나왔다.
“내가 왔으니 마샤는 이만 풀어 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