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 걱정하는 게 아닌 것 같은데.”
“…애꿎은 사람이 다칠지도 모릅니다.”
오늘처럼 용이 흥분해서 날뛰면 용 기병대 단원들이 위험해진다. 혹은 아군이 희생될지도 몰랐다.
“전쟁이다. 누군가는 죽고 다치게 되어 있어.”
“그래도 가능한 한 억울한 죽음은 막으셔야지요.”
“억울한 죽음?”
예후르가 조소했다. 울컥한 페기가 조금 소리를 높였다.
“천계율에도 그리 쓰여 있습니다. 죄의 경중에 따라 처벌하라. 무고한 죄인을 만들지 마라.”
“천계율은 900년 전 당시 원탁 추기경들에 의해 쓰인 것이다. 한 줌 흙으로 남은 노인네들의 소설에 목맬 정도로 미련해 보이진 않는다만.”
예후르의 냉담한 대꾸에 페기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저게 교회를 대표하는 사도가 할 소리인가?
“천계율을 따르지 않으시겠다면 보편적인 윤리로라도 헤아려 주세요. 성직자 되신 분이 어찌 사람의 목숨을 그리 쉬이 여기실 수 있나요? 사도시잖아요. 뱀을 죽이신 것처럼 이 세상에 정의를 보이셔야….”
갑자기 예후르가 숨죽여 웃기 시작했다. 페기는 아연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정의, 정의라…. 너무 오래간만에 듣는 말이구나.”
예후르가 잔웃음이 남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것은 약자들이 주장하는 논리다. 네가 개미를 밟아 죽인다고 그것이 죄가 되지 않는 것처럼, 강자가 약자를 짓밟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일 뿐이야.”
“무고한 사람이 고초를 겪는 것도 그저 감내하란 말씀인가요?”
“네가 분노하는 이유를 안다. 정의, 도덕, 윤리, 이런 것들이 오랫동안 세상의 규범으로 자리 잡고 있었지. 네가 질서라 생각했던 것들이 부정당했을 때 느낄 당혹감을 어렴풋이 짐작은 한다.”
“…….”
“하지만 세상은 그렇게 돌아가지 않는다. 질서는 그런 것이 아니야.”
페기는 멀거니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자신이 내뱉는 말의 무게를 알까.
“그럼 정의니 도덕이니 하는 것들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건가요?”
“그럴 리가. 그것들은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규범화된 질서다. 누군가는 그것이 옳다고 생각하여 따르고, 누군가는 그것이 사회를 존속하는 데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따르지. 하지만 세상이 본디 그러하냐고 묻는다면, 나는 부정할 수밖에 없다.”
그가 말하는 질서란 곧 약육강식.
강자가 약자를 짓밟고, 약자가 강자에게 짓밟히는 것이 당연시되는 세상.
페기는 아찔한 혼란을 가까스로 삼켜 냈다.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그의 눈에 질서란 그렇게 비치는가. 세상 돌아가는 이치가 원래 그러하나.
“…그럼 약자는 일평생 억울함만 삼키며 살아야 하겠군요.”
“말이 묘하구나. 약자이기에 억울한 일을 당하는 것이 아니야. 억울한 일을 당하기에 약자인 것이지.”
페기는 어지러움을 참지 못하고 휘청거리며 난간을 잡았다.
그녀는 억울하게 죽었다. 반드시 이 억울함을 풀겠노라 다짐했건만, 아니었다.
그녀는 약해서 죽은 것이다.
두둔해 줄 세력이 없어서.
권력이 없어서.
힘이 없어서.
이른바 예정된 죽음이었던 것이다.
예후르는 큰 충격에 빠진 그녀를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의지할 데라곤 난간밖에 없다는 듯 후들거리는 손으로 잘도 붙잡고 있었다. 그는 문득 그녀의 속을 헤아리며 그녀가 받은 충격에 공감하고 싶어졌으나, 온갖 색이 뒤섞인 검정은 여전히 난해하게만 보였다.
바람이 한 줄기 불어왔다.
망토의 털이 낱낱이 일어나고, 창백한 살갗 위로 냉기가 지나갔다. 바람결에 헤집어진 은발이 허공으로 날리며 단숨에 그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세사(細絲)보다 가느다란 머리칼이 불그스름한 저녁놀에 물들어 갔다. 흩날리는 은빛이 무수하다.
은빛.
그는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또다시 너로구나.
기억에조차 남지 않은 애매한 거짓 모습이 사라지고, 늘 그리워했던 모습이 눈앞에 펼쳐졌다. 칼바람에 상처라도 입을까 조바심치게 되는 연약한 살결과 가늘게 떨리는 아랫입술. 시름에 잠긴 보랏빛 눈.
너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한순간도 널 그리지 않은 적이 없으나, 환각은 늘 너를 잔상으로만 남겼다. 언제는 건반 위를 노닐던 흰 손으로, 언젠가는 가늘게 미소 짓던 입술로. 나의 부족한 상상력은 너를 겹쳐 보는 이에게서만 너를 온전히 떠올릴 수 있다.
저도 모르게 뻗어 가던 손끝이 움츠러들었다.
행여 자각한 순간에 사라져 버리는 환각처럼, 너도 그렇게 달아나 버릴까 봐. 조바심치는 마음에 네게 말을 걸 수도, 손을 내밀어 만질 수도 없다. 또 언제 볼지 모르는 너를 조금이라도 더 오래 기억하고자, 계속해 눈에 담을 뿐.
그 순간, 이상한 반짝임이 눈을 찔렀다.
생각보다 앞선 몸이 순식간에 그녀를 감싸 안았다. 그리고 화들짝 놀란 그녀를 달래 줄 겨를도 없이 어깻죽지에 콱, 화살이 박혀 들었다.
몇 발짝 휘청거린 그가 천천히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페기는 그를 안은 채로 떠밀리듯 주저앉았다.
“전하?”
페기가 입술을 달싹였다. 사시나무처럼 떨리는 손이 화살 박힌 그의 어깨를 더듬었다. 손바닥에서 진탕 피가 묻어났다.
“전하?”
끔찍한 정적이었다.
“…예후르?”
***
예후르는 곧장 막사로 실려 갔다. 호위 기사가 다급히 군의를 불러왔는데, 그의 옷을 벗겨 상처를 확인하기도 전에 막시모가 들이닥쳤다.
“다들 나가세요.”
보급 부대를 이끌고 지금 막 도착했는지 막시모는 피로가 덕지덕지 붙은 피곤한 낯이었다. 예후르의 머리맡에서 페기가 황망히 일어섰다.
“막시모 씨?”
“당장 나가라고! 특히 너!”
막시모가 왈칵 고함치며 군의의 멱살을 잡고 질질 막사 밖으로 끌고 갔다. 그 기세가 어찌나 거칠던지, 병사들도 선뜻 그를 말리지 못했다.
보다 못한 페기가 성큼성큼 다가가 막시모의 팔을 잡아챘다.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왜 군의를 내쫓냐고요!”
“당신도 나가요.”
“이봐요!”
“거기! 안 나가고 뭐 해! 죽어서 나가고 싶어?! 어? 이참에 죽여 줄까?!”
막시모가 검을 뽑는 시늉을 하자, 나머지 병사들도 혼비백산하여 달아났다. 그들을 붙잡으려다 실패한 페기가 경악하여 소리를 질렀다.
“미쳤어요?! 전하를 죽이려고 작정한 게 아니면 어떻게 이래요!”
“전하를 살리고 싶다면 조용히 해요!”
막시모가 쩌렁쩌렁하게 외쳤다. 이제 보니 그의 얼굴도 페기 못지않게 하얗게 질려 있었다.
“전하의 몸을 다른 이에게 보일 순 없습니다. 진심으로 전하를 걱정하고 있는 거라면, 제발 내 말을 따라 줘요. 부탁입니다.”
페기는 어깨를 들썩이며 붉어진 눈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말라붙은 입술이 작게 달싹였다.
“전하를 살리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데요.”
“…….”
“혼자서 가능하겠냐고요.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해요. 내가 도울게요.”
“내가 아가씨의 뭘 믿고….”
“이런 상황에서도 그런 소리예요?! 지금 이럴 때가 아니잖아요!”
막시모는 갈등하는 얼굴로 흘끗 정신을 잃은 예후르를 돌아보았다. 그러곤 침대 쪽으로 발길을 돌리며 작게 속삭였다.
“이리 와요.”
페기는 황급히 침상으로 갔다. 그녀가 비처럼 쏟아지는 예후르의 식은땀을 닦아 주는 동안, 막시모는 그의 상의를 벗겼다. 겹겹이 감싼 비단옷을 갈라 마지막 얇은 셔츠만을 남겨 두고 잠시 망설이더니, 끝내 결심한 듯 어깻죽지의 환부를 드러냈다.
물수건으로 예후르의 얼굴을 닦던 페기의 손길이 우뚝 멈추었다.
“만약 소문이 퍼진다면 그 길로 아가씨 목을 따러 갈 겁니다.”
“…그런 말은 보여 주기 전에 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어쨌든 아가씨 손이라도 필요하긴 하니까요.”
막시모가 중얼거리며 단검의 날에 촛불을 쬐었다. 페기는 혼란이 역력한 표정으로 화살이 박힌 예후르의 어깻죽지를 응시했다.
상처에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사도라서 그럴 수 있다기엔 그녀는 죽기 전에도 저런 걸 경험한 적이 없었다. 애당초 상처 입은 사도의 몸에서 빛이 새는 것이 가능하다면, 레오폴트는 온몸에서 빛을 내뿜을 것이었다.
당연히 불가능한 일이어야 하는데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다. 페기는 뒤죽박죽인 머리를 애써 차분히 정리했다.
저런 일이 가능하다면 이유는 단 한 가지뿐이다.
생명의 불.
살아 있는 모든 것이 품고 있는 생명의 원천이며, 목숨의 근원.
하지만 그녀가 보았던 생명의 불은 안드레아가 사술을 부리기 위해 수탉의 몸에서 끄집어낸 손톱만 한 불이 전부였다. 고작 그만한 불이 수탉을 살아가게 하는데, 인간의 몸이라고 크게 다를쏘냐.
다르지 않기에 지금껏 저런 광경을 보지 못했으리라.
그래서 더더욱 혼란스러웠다.
살갗이 뚫린 상처에서 저만한 빛이 새어 나오려면, 저 몸이 품고 있는 생명의 불은 얼마나 거대한 것일까. 그가 특별한 사도임은 익히 짐작하고 있었지만, 과연 저것이 고작 ‘특별함’으로 설명될 수 있을까.
그는 정말로 나와 같은 사도가 맞을까.
“지금부터 화살을 뽑을 겁니다.”
막시모가 건조하게 읊조렸다.
“화살이 뽑히면 아가씨는 바로 지혈을 시작해요. 아무리 전하여도 이 이상 피를 쏟아 내면 회복이 늦어지실 겁니다.”
“알겠어요.”
페기와 짧게 시선을 마주한 막시모가 긴장된 숨을 들이켜더니 단검으로 조심스레 화살촉이 박힌 환부를 헤집기 시작했다. 검은 피가 꿀럭꿀럭 밀려 나왔다. 대단히 고통스러울 텐데도 예후르는 미동조차 없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화살대를 쥔 막시모의 손등에 힘줄이 솟더니, 화살이 확 뽑혔다. 페기는 곧바로 깨끗한 천으로 환부를 짓눌렀다. 순식간에 천이 피로 물들며, 그녀의 손까지 시뻘게졌다.
“피가 안 멈춰요!”
페기의 다급한 속삭임에도 막시모는 뽑힌 화살촉만 지긋하게 노려볼 뿐이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혀끝에 화살촉을 대 본 그가 경기 일으키듯 놀라 침을 퉤 뱉었다.
“젠장.”
막시모는 화살을 내던지고 깨끗한 천으로 그의 환부를 꽉 동여매기 시작했다. 두껍게 감싸 매듭지었는데도 금세 환부에서 핏물이 올라왔다.
“피가….”
“지혈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지금. 독화살에 맞으셨어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 막시모가 입가를 감싸 쥐며 초조하게 서성였다.
“아마 테바 독버섯에서 얻은 맹독일 겁니다. 인근에서 그 버섯을 많이 봤어요. 해독은 메우렐리…. 메우렐리시타 풀로 할 수 있을 텐데 지금 계절이…. 젠장!”
막시모가 왈칵 성을 냈다.
“아니, 지평선 끝에서 무슨 새가 날아오는지도 훤히 알아보시는 분이 갑자기 화살은 왜 맞아선!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