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가를 감싸 쥔 손 위로 후작의 날카로운 눈빛이 드러났다. 증오를 한가득 담은 눈이 얼핏 무료해 보이는 예후르의 얼굴을 샅샅이 훑었다.
잠시 입술을 다물고 있던 예후르가 눈을 내리뜨며 조용히 물었다.
“후작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어서요.”
“…….”
“3년 전엔 왜 그랬습니까?”
후작이 설핏 미간을 찌푸렸다.
“3년 전에 있었던 일이 한둘입니까?”
예후르가 나지막한 한숨을 내뱉었다. 순간 촛불이 크게 일렁이며, 막사에 비치는 그의 그림자가 흉포하게 날뛰었다. 후작이 흠칫하며 몸을 뒤로 물렸다.
“마지막 기회입니다. 신중히 대답해요.”
도대체 자기가 뭐라고 기회를 운운하나.
후작은 비뚤어진 반항심으로 비꼴 작정이었다. 아끼던 딸아이가 한눈에 반해 목매기 시작한 이후로 그는 저자가 마음에 든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모든 것을 안다는 오만함도, 너희에게 상관하지 않겠다는 초연함도, 빈틈을 찾을 수 없는 완벽함도.
그러나 그와 눈이 마주친 순간, 모든 호승심이 썰물처럼 발아래로 빠져나갔다. 후작은 저도 모르게 턱을 떨었다. 분노가 꺼져 버린 심지에 이루 말할 수 없는 공포심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말해.
절대적인 진리가 그에게 종용한다.
후작은 홀린 것처럼 말문을 열었다.
“저, 저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습니다.”
“…….”
“다 저의 미련한 아우가 저지른 짓인데….”
그는 멋대로 움직이는 자신의 입을 막을 수가 없었다. 막을 생각이나 있었나. 그는 이제 자신이 왜 이런 곳에 있는지조차 의아해지기 시작했다.
“그래. 계획을 수립한 것은 아나클레토고, 너는 빌헬미나에게 보고를 올렸을 뿐이지.”
“예….”
“빌헬미나가 승인하자, 아나클레토가 계획을 실행에 옮긴 것이고…. 그런데 그건 아나? 너의 딸도 이 일에 개입되어 있다는 것을.”
후작은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세도파.
“여기서 그 아이가 왜….”
“내 소중한 반지가 사라졌어. 훔쳐 갔을 만한 사람은 너의 딸아이밖에 없다. 그 도둑질로 말미암아 나의 죄 없는 누이는 제 발로 감옥에서 걸어 나왔지. 너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느냐?”
“모, 몰랐… 저는 몰랐….”
후작이 사시나무처럼 몸을 떨었다. 반지, 도둑질, 그는 그런 것 따위 몰랐다. 알고 싶지도 않았다. 세도파는 그저 목숨보다 사랑하는 딸일 뿐이다.
지켜야 하는, 나의 딸.
“가장 큰 죄인은 거짓된 사도요!”
목에 핏대가 섰다. 악몽에서 깨어나듯 그가 번쩍 눈을 떴다.
“성화가 꺼졌는데 누굴 탓합니까! 어차피 죽을 목숨이었소! 세상천지 무고한 사람을 죽이는 악인이 한둘이 아닌데, 왜 애꿎은 우릴 탓하느냔 말이야! 타락한 사도를 죽인 것도 죄라면, 당신은! 반란이나 일으키는 당신은 뭐가 그렇게 잘났는데!”
어차피 화형이 선고된 목숨이었다. 온 성도에서 죽여 버리라는 외침이 들끓던 자였다. 지금껏 수많은 죄를 저지르고 수많은 죄를 방조하였으나, 그중에서 가장 떳떳한 죄가 바로 그것이었다.
“왜 그랬냐고 물었소? 왜긴, 당신 때문이지! 당신이 조금만 폐하의 뜻에 고분고분 따라 주었으면 우리가 감히 그랬겠소? 내 딸아이를 그리 방치해 두지만 않았더라도 내가 그리 했겠느냔 말이오! 먼저 우릴 무시한 건 당신이잖아!”
“젊은 사도는 버릇을 들일 필요가 있겠소. 아직 견식이 짧아 세상사 모두 자기 뜻대로 흘러가는 줄 아나 본데, 어른 된 도리로서 하루빨리 그 착각을 깨트려 주어야 하지 않겠소?”
폐하께선 틀리지 않으셨다. 나도, 아나클레토도, 세도파도, 모두 최선의 선택을 했을 뿐이다. 그럼에도 현실을 깨우치지 못하고 천방지축처럼 날뛰는 저 망아지가, 가장 잘못되었다.
“우린 그저 배운 대로 행했을 뿐이오. 기회를 놓치지 않은 것이 무에 잘못인가. 비난하려거든 죽은 사도의 무덤에다 침이나 뱉으시오. 애당초 그자가 성화를 제대로 간수만 했다면, 그런 일이 벌어졌겠느냔 말이야.”
후작은 몸을 잔뜩 옹송그리며 오들오들 떨었다. 죄인을 죽인 것도 죄가 되는가. 설령 죽어서 지옥 불로 떨어진다 하여도 그 죄목은 다른 것이어야 했다. 다른 것일 수밖에 없었다. 지금 거론되는 이 일에서만은 하염없이 결백하였으므로.
“…그러니까.”
느지막이 입을 뗀 예후르가 별안간 낮은 웃음소리를 흘렸다.
“나 때문에 그런 짓을 벌였다고.”
“…….”
“내 버릇을 들이겠다고.”
“그걸 이제야 아셨소? 최대한 잔인하게 죽이라고 일렀지. 그 사도에게 원한은 없다만, 그 꼴을 보면 당신도 정신을 좀 차릴 줄 알았지.”
후작이 예후르를 따라 떨 듯이 웃었다.
“왜. 이제야 세상이 좀 바로 보이시오? 아니면 아직도 착각에 눈이 멀었나? 우릴 비난하고 싶나? 이쯤 되면 당신 스스로도 참 원망스러울 텐데. 세상 모든 일이 당신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것을 이제는 깨우쳐야 할 텐데 말이오.”
“아쉽게도 세상은 내 뜻대로 흘러간 적이 없어. 늘 내 바람과는 어긋났지.”
예후르가 씁쓸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벤첼 바도비체. 나는 너를 탓하지 않는다. 실망하지도 않았지. 타고나길 선한 이들에게 둘러싸여 잠시나마 경계를 놓았던 내 잘못이다. 너희는 늘 그래 왔다는 것을 잠시 잊고 말았어.”
“…….”
“그럼에도 화가 나는구나.”
후작의 눈 아래가 설풋 경련했다. 오싹한 기운이 등골을 타고 올랐다. 저 반듯한 사도의 얼굴이 섬뜩하게 느껴진다면 착각일까.
일순 촛불이 흉악하게 타올랐다.
기겁할 듯 놀란 후작이 의자 아래로 나뒹굴었다. 떨리는 손으로 의자를 짚으며 몸을 일으키려던 그는 양초를 죄 집어삼킬 듯한 불길을 보고 할 말을 잃었다.
바람 저문 사위에 괴이하게도 불길만 거세었다. 막사 안은 점점 더 밝아지고, 역으로 그림자는 크고 뚜렷해졌다. 막사를 둘러싼 호위 기사들의 그림자마저 하나둘 천막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피, 필립, 요제프….”
목 졸린 듯한 소리는 메마른 입 안에서만 맴돌았다. 감당할 수 없는 두려움에 사로잡힌 후작은 부하 기사들의 그림자만 애타게 눈으로 쫓았다.
촛불이 크게 일렁였다.
잔잔한 수면에 파문이 일 듯 막사를 뒤덮은 그림자도 요동치기 시작했다. 잘게 흔들리는 그림자끼리 겹치고 찢어지길 반복했다. 현란한 춤사위 사이로 새로운 그림자가 움튼 것은 그때였다.
어떤 그림자가 기사들의 그림자 속에서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서서히 곧추세워지는 몸이 기사들의 머리 위를 지나 막사의 꼭대기에 이를 듯 높았다. 하나가 아니었다. 여럿이었다.
기사들의 수는 아홉. 새로운 그림자의 수도 아홉.
그림자의 아가리가 벌어지며, 찢어질 듯한 비명 소리가 덮쳐 왔다.
“끄아아악!”
“필립!”
엉겁결에 소리를 내지른 후작조차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기사들의 그림자가 부러지고 있었다. 살이 찢기고, 가슴이 꿰뚫리고, 머리부터 씹어 삼켜지고 있었다. 도저히 사람이라 부를 수 없는 괴물의 그림자가 목을 빳빳하게 세우며 늑대처럼 길게 울었다.
후작은 더 이상 제정신을 유지할 수 없었다. 하나둘 목청을 틔우는 괴물들, 어느새 사라져 버린 아홉 기사들의 그림자.
벌벌 떨리는 손발은 굳어 버린 듯 미동하지 않았다. 헐떡이며 터져 나오는 숨이 허옇게 이지러졌다. 불현듯 못 견디게 추웠다.
“흐, 흐윽….”
공포에 질린 눈이 이리저리 튀다, 여전히 평온하게 앉아 있는 사도에게 닿았다. 이상하게도 그는 밖에서 벌어지는 참상과 유리된 듯 보였다. 평화롭다 못해 고요했다. 일말의 희망을 품고 그쪽으로 엉금엉금 기어가던 후작이 별안간 차게 굳었다.
사도의 얼굴 위로 빛과 그림자가 연속하여 교차하고 있었다. 불빛에 환히 밝아지는 얼굴과, 그림자에 뒤덮여 음영 지는 얼굴이 꼭 생판 다른 사람인 것처럼 판이했다. 그 기이한 간극에서 벼락처럼 깨달음이 내리꽂혔다.
“다, 당신이었어…?”
후작이 안간힘을 다해 겨우 목소리를 쥐어 짜냈다. 갈수록 더해 가는 추위에 혓바닥조차 얼어붙은 듯 굼떴다.
“대체 무, 무얼 데려온 거야…. 바, 밖에서 무슨 짓을 벌인 거냐고!”
“너희가 내게서 가장 소중한 것을 앗아 가지 않았느냐.”
턱을 괸 예후르가 온기 없는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나도 똑같이 갚아 주려는 것뿐이다.”
“뭐…?”
“이를 테면 너는….”
황금빛 눈이 가늘게 휘어졌다.
“네 평생을 바쳐 이룩했던 모든 것이 무너지는 모습을, 보지 못하겠구나.”
덜덜 떨리던 후작의 몸이 일시에 멎었다. 추위에 질린 그의 눈이 멍하니 사도를 응시했다.
“그게 대체 무슨 소리….”
“…….”
“당신… 정말로 사도가 맞아?”
“글쎄. 네 눈엔 내가 어떻게 보이느냐?”
사도의 입술이 기이하게 찢어졌다.
촛불은 점점 더 흔들리기 시작했다.
땅이 미미하게 진동했다. 요동치는 불길을 따라 그림자는 더욱 현란하게 몸을 뒤틀고, 쇠를 갈 듯 선득한 소리가 발아래서 번졌다. 좁은 막사 안을 뒤덮으며 치열하게 뒤섞이는 빛과 어둠이 소리 없는 아우성을 질렀다.
그리고 후작의 그림자 속에서 끔찍한 형체가 솟아올랐다.
“끄아아아악!”
사방으로 핏물이 튀었다. 뼈가 부러지고 살이 헤집어지는 참혹한 소리들이 잇따랐다. 끊길 듯 끊이지 않는 비명과 견딜 수 없는 추위 속에서 예후르는 홀로 즐겁게 웃었다. 흐느끼는 듯한 웃음소리가 멈추지 않았다.
“너희는 결코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리라.”
내가 그러하듯이.
황량한 지평선에 붉은 선이 그어지며 동이 텄다. 건조한 모래 먼지 휘날리는 반란군 병영은 고요했다. 어젯밤 달은 깨끗했고, 물안개는 피어오르지 않았다. 진군의 날은 오늘이 아니었다.
먼 지평선에서 주인 없는 말 한 마리가 느릿느릿 다가오고 있었다. 졸린 눈을 끔벅이던 보초가 길게 하품하며 말에게 손짓했다. 말은 순하게 다가와 보초의 얼굴에 콧등을 비볐다. 넌 어디서 왔니. 키득거리며 말갈기를 쓰다듬어 주던 손길이 꼬리에 가 닿았다. 보초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보초가 병영 안으로 다급히 뛰어들었다. 작은 소란이 퍼지며 평화롭던 적막이 깨지고, 하나둘 잠에서 깨어났다. 혼란이 번졌다. 비명 같은 반문 소리가 퍼졌다.
소용돌이치는 병영의 혼란 속에서 말은 홀로 여유롭게 풀을 뜯었다.
말의 꼬리에는 바도비체 후작의 목이 매달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