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2화 (132/328)

“지금 공작의 수중에는 딱히 줄 것도 없지 않나. 일이 잘 풀리면 올 한 해 수확량의 일부를 주거나, 뭐, 농사지을 땅이라도 약속했나 보지.”

“땅이요? 방벽 안쪽으로 야만족들을 들인단 말입니까?”

“그저 짐작일 뿐이다. 만약 그렇다면 페임하른은 눈에 뵈는 것이 없었단 거겠지. 누가 내 목 뒤를 노리는 사냥개를 안마당으로 끌어들인단 말인가?”

기사가 낄낄거리며 웃었다. 탐보프의 동서를 횡단하는 오랜 여정에 지친 후작이 길게 하품하더니, 곧 표정을 달리했다.

“그건 그렇고, 앞서 보낸 대포와 포병대는 확인해 보았나?”

“예! 편지하신 대로 성능이 대단했습니다.”

“황제 폐하께서 하사하신 개량품이야. 미친 사도를 위해 특별히 맨 앞줄에 배치하게나. 듣자 하니 반란군은 엘피도 공작을 두고 승리의 상징이니 무어니 떠든다던데, 그 위대하신 승리의 상징께서 대포알에 덧없이 추락하는 모습이 참 보기 좋겠군.”

“염려 마십시오. 안 그래도 가장 좋은 자리에 배치해 두었습니다.”

자신만만하게 웃던 기사가 문득 주저하며 말을 꺼냈다.

“저…. 그런데 각하. 오늘 아침에 이상한 전언을 받았습니다.”

“이상한 전언이라니?”

“멀리서 누가 쏘고 간 화살에 매달려 있었는데… 각하께서 한번 읽어 보십시오.”

기사가 넙죽 서신을 내밀었다. 바도비체 후작은 벗어 두었던 안경을 도로 끼곤 내용을 읽었다. 미간의 주름이 더욱 움푹 팼다.

“누가 화살을 쏘았는지는 확인하지 못했나?”

“예. 죄송합니다.”

“흠….”

후작이 심각한 얼굴로 고심에 빠졌다. 기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정말로 엘피도 공작이 보낸 것일까요?”

“일단 인장은 공작의 것이 맞다. 다만… 심중이 파악되지 않는군.”

“솔직히 저는 의심스럽습니다. 코앞으로 반란군을 끌고 온 자가 난데없이 밀회를 갖자니요.”

뚫어져라 서신을 응시하던 후작이 불현듯 서신 한 군데를 손가락으로 튕겼다.

“혼자서 우리의 관할지로 넘어온다면, 아주 못 할 일도 아니지.”

“각하!”

“애당초 엘피도 공작은 페임하른에게 붙은 이유가 불명확한 자다. 내가 공작을 많이 본 것은 아니지만, 아무런 이유도 없이 이런 난장판을 벌일 사람은 아니야. 분명 무슨 꿍꿍이가 있어.”

“그럼 더더욱 신중하게 접근하셔야지요!”

“신중하다마다. 공작은 홑몸이고 나는 너희들이 있을 터인데 무엇이 걱정인가.”

후작이 느른하게 웃으며 단언했다.

“만일 홑몸이 아니라면 만나지 않으면 될 것이고, 설령 혼자라 하더라도 뒤에서 따라붙지 못하도록 경계를 강화하면 그만이다. 공작의 신병을 손에 넣을 수만 있다면 어느 정도의 위험은 감수할 만하지.”

“과연 우리 뜻대로 잡혀 줄까요? 엘피도 공작은… 뱀을 죽인 사도가 아닙니까.”

기사가 조금 망설이며 물었다. 그의 얼굴에서 엿보이는 두려움을 발견한 후작이 잠시 침음을 흘렸다.

역시 반란군에서 가장 위협적인 것은 페임하른이나 일만 대군이 아닌, 엘피도 공작이었다. 어떻게든 이번 기회를 통해 그를 잡아 가두어야만 했다.

“3년 전의 그것은 옛날의 뱀이 아니었다. 고작해야 낡은 연회장 하나 집어삼킨 정도였지. 그런 뱀을 죽인 사도가 무엇이 그리 대단하겠나.”

후작은 황제에게 들었던 말을 그대로 읊으며 본인의 불안감을 애써 짓눌렀다. 이건 놓칠 수 없는 기회다. 설령 엘피도 공작을 구속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아군은 잃을 것이 없었다.

바도비체 후작은 서신을 촛불에 태우며 명령했다.

“시간은 오늘 밤. 준비하도록 해라.”

반란군 진영으로 전서구가 날아든 것은 늦저녁의 일이었다.

“먼 길 걸어왔으니, 오늘 밤은 숲의 향기를 맡으며 편히 쉬고 내일부터 각자의 길을…. 이거 뭐라는 겁니까?”

전서구에 딸린 편지를 낭독하던 기사가 실소를 터트렸다. 어처구니없단 분위기가 번지는 가운데, 이리니 페임하른 역시 비웃음을 머금었다.

“원래부터 그런 작자다. 칼질이 영 평범하니 간사한 입놀림으로 그만큼 출세한 것이지.”

“이게 무슨 음유 시인들의 노랫소리에나 나오는 명예로운 전쟁인 줄 아나 봅니다. 잘됐지요. 적장이 저렇게 낭만에 잠겨 있다면, 죽기 살기로 덤벼드는 우리가 무조건 승리할 것입니다.”

모두가 자신만만하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리니는 만족스러운 기색으로 말했다.

“다들 알다시피 이 지대는 새벽이면 강으로부터 물안개가 부옇게 올라오는 곳이다. 그러나 날마다 정도의 차이가 있으니, 결전의 날은 달무리가 가장 짙은 밤, 바로 그 새벽이다.”

“존명!”

회의가 파하자, 인파는 모두 흩어졌다. 페기는 부딪히기만 해도 멍이 드는 기사들을 피해 예후르의 등 뒤로 바짝 붙었다.

“전하. 보급품 관련해서 여쭐 것이 있습니다. 잠시만 시간을 내어 주시면….”

“내일 하지.”

페기가 멈칫 그를 올려다보았다.

“혹 어디 편찮은 곳이라도 있으신가요?”

예후르는 대꾸 없이 그녀의 호위 기사를 손짓으로 불렀다. 명백한 축객령이었다. 미심쩍은 기색으로 기사를 따라 발걸음을 옮기던 페기가 슬며시 뒤를 돌아보았다.

그가 걷는 방향은 막사가 아니었다.

페기는 충동적으로 몸을 틀었다. 성큼성큼 큰 보폭으로 걷다가, 거의 뛸 듯이 걸어 그를 붙잡았다.

“전하. 어디 가십니까?”

옷소매를 잡은 그녀의 손을 응시하던 예후르가 가만히 고개를 들었다. 황급히 뒤따라온 호위 기사가 몹시 송구하다는 기색으로 고개를 조아리고 있었다.

“무슨 일을 꾸미고 계시잖아요. 그렇죠.”

“…내가 너에게 보고를 해야 하는 줄은 몰랐는데.”

예후르가 냉담하게 그녀의 손을 뿌리쳤다. 지그시 입술을 깨문 페기가 긴장과 당혹감이 뒤섞인 혼란스러운 얼굴로 어렵사리 목소리를 냈다.

“이상하게 들릴 줄은 압니다만, 자꾸… 불안해집니다. 꼭 나쁜 일이 일어날 것 같은 예감이 들어서….”

그녀의 아랫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물끄러미 그 모습을 내려다보던 예후르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넌 너무 나를 잘 알아.”

“…….”

“이상할 정도로.”

그래서 널 볼 때마다 착각을 하게 되나.

예후르는 칼같이 속엣말을 잘라 냈다. 페기는 여전히 혼란이 가시지 않은 눈으로 간절히 그를 올려다보았다.

“괜찮은 거죠? 다 잘 풀리겠죠?”

“말하지 않았느냐. 널 다치게 할 생각은 없다고.”

“저 말고, 전하요.”

순간 그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흡사 석고를 뜬 것처럼 단단히 굳어 버린 듯했다. 페기는 그의 무표정에 잠시 겁을 먹었으나, 그마저 환시라는 듯 조금 뻣뻣해 뵈는 미소가 그의 입가로 올라왔다.

“…내일 보지.”

그는 검은 망토를 휘날리며 자리를 떴다.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을 우두커니 바라보던 페기가 잘게 떨리는 손끝을 말아 쥐었다.

때로 아껴 주고 싶고, 때로 죽이고 싶은 것은 이쪽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낯선 이들 사이에 떨어진 그녀를 지켜 줄 사람도, 그녀의 죽음과 관련된 수수께끼를 풀어 줄 사람도 그뿐이었다. 그가 밉고 무섭고 때로는 애틋하지만 지금은 무엇보다도 그가 필요했다.

그러니 잘못되면 안 돼.

페기는 그가 들어간 어둠을 끝없이 쏘아보았다. 그를 해치려는 사악한 손길을 쫓아내기라도 하려는 듯이.

야심한 밤중에 올빼미 울음소리가 아득하게 울려 퍼졌다.

오스트라트 전진 기지 인근 숲의 입구를 지키던 보초들이 신경을 날카롭게 세웠다. 멀지 않은 곳에서 느긋한 발소리가 다가오고 있었다. 보초들은 슬며시 검을 뽑으며 불빛 너머를 죽어라 노려봤다.

오래지 않아 검은 군홧발이 횃불의 반경 안으로 들어왔다. 자연스레 고개를 들던 보초들은 이 세상 사람 같지 않은 완벽한 얼굴에 잠시 넋을 놓았다.

“바도비체 후작은 안에 있나?”

예후르가 미미한 웃음을 머금고 물었다.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린 보초들이 말을 더듬었다.

“에, 엘피도 공작 전하이십니까?”

“그래.”

보초들이 신중하게 시선을 주고받았다. 누가 봐도 사막에서 온 것이 분명한 이국적인 생김새. 북방에 저런 얼굴이 둘이나 있을 리 없었다.

“송구하지만 잠시 눈을 가리겠습니다.”

보초들은 검은 안대를 씌운 뒤, 그를 부축하여 말에 태웠다. 고삐를 쥔 보초가 앞서 걷자, 온순한 말이 투레질 한번 없이 뒤를 따랐다.

사위는 고요했다. 간간이 풀벌레 우는 소리가 들려왔으나, 그조차 괴괴한 숲의 적막에 금세 잡아먹혔다. 땅에 깔린 축축한 이끼는 보초의 발소리와 말발굽 소리를 삼켰으며, 머리 위에서 우수수 오가는 밤바람만이 정적을 휘저어 놓곤 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보초는 가까운 나무줄기에 고삐를 묶은 뒤, 예후르를 조심스럽게 말에서 내리게 했다. 그리고 막사로 들여보내 의자에 앉히고는 안대를 풀어 주었다.

예후르가 눈을 떴다. 영롱하게 밝혀 둔 촛불 너머로 반백 살 먹은 바도비체 후작이 보였다.

보초가 나가고도 막사는 좀체 침묵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후작은 차오르는 분노를 어떻게든 감추려 했지만, 속이 뻔히 들여다보이는 모습이었다.

느리게 눈을 깜박이던 예후르가 물었다.

“세도파는 잘 지냅니까.”

“감히!”

노성을 터트린 후작이 주먹을 꽉 움켜쥐며 씩씩거렸다.

“어떻게 감히 내 앞에서… 내 딸의 이름을 거론하십니까.”

“약혼녀의 안부를 묻는 것이 잘못되었습니까.”

“약혼? 그것을 약혼이라 부를 수 있습니까? 세도파가 전하를 얼마나 기다려 왔는데…!”

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긴 후작이 솟구치는 노기를 잇새로 씹어 삼켰다.

“전하께선, 그러면 안 되셨습니다. 제 딸아이가 마땅치 않다면 일찌감치 놓아주셨어야죠. 그 애가 전하께 목매는 걸 온 세상이 다 아는데, 받아 주시지도 않을 것을 어찌 그리 가만히 두셨습니까. 덕분에 그 애가 날린 세월만 벌써 10년이 다 되어 갑니다!”

헛된 사랑에 매달리는 자식을 보는 부모만큼 애타는 심정도 없다. 그는 터질 듯한 분기를 애써 다스리며, 찌를 듯 아파 오는 눈두덩을 꾹 짓눌렀다.

“됐습니다.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세도파도 더는 전하를 고집하지 못하겠죠. 다행히 전하와 그 아이의 연은 여기까지인 듯하니, 이 얘기는 그만합시다.”

“…….”

“말씀하십시오. 저는 왜 보자고 하신 겁니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