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0화 (130/328)

요슈아는 팔뚝에 숨겨 두었던 단검을 던지며 뒤쪽으로 크게 도약했다. 빠져나갈 구멍을 찾아 헤매던 눈에 돌연 번쩍이는 빛이 들어왔다.

의문을 가질 겨를도 없이 그는 잽싸게 지붕 위로 엎드렸다. 당황하여 우뚝 멈추어 선 추격자들에게로 화살이 빗발치기 시작했다.

온몸에 화살을 맞고 쓰러지는 추격자들을 보며 낄낄거리던 요슈아가 갑자기 표정을 달리했다.

“젠장, 알리오나!”

그는 쏟아지는 화살 속에서 엉금엉금 지붕 위를 포복했다. 알리오나를 낚아챘던 추격자 역시 화살을 맞고 쓰러졌는지, 그녀는 지붕 위를 맥없이 구르고 있었다. 요슈아가 이를 악물며 손을 뻗었다. 조금만, 조금만 더.

돌연 화살 세례가 멈추었다.

어리둥절하여 고개를 들던 요슈아가 얼어붙었다. 뚜벅뚜벅하는 군홧발 소리가 가까워지더니, 누군가 알리오나의 팔을 다소 거칠게 잡아 올렸다.

순간 요슈아의 눈에 불똥이 튀었다.

“개새끼야, 당장 그거 안 놔?!”

벌떡 일어난 요슈아가 쇄도하듯 달려들어 알리오나를 제 품으로 끌어당겼다. 그러곤 그녀의 팔을 이리저리 들어 올리며 수선을 떨었다.

“다친 데 없어? 어디 상처 난 데 없냐고!”

“…….”

“야, 짐 덩어리! 뭐라고 대답 좀….”

“시끄… 러워….”

힘없이 올라온 알리오나의 손이 요슈아의 머리채를 약하게 쥐었다.

“나쁜 새끼…. 누굴 포기해…?”

가느다랗게 들려오는 목소리에 잠시 얼이 빠졌던 요슈아가 곧 화색을 되찾았다.

“말하는 거 보니 멀쩡하네.”

뒤늦게 가일을 비롯한 예후르의 부하들이 도착했다. 마차를 타고 온 차라도 건물 아래서 소리를 높였다.

“요슈아! 알리오나! 괜찮아? 누구 다친 사람 없어?”

“어, 괜찮….”

요슈아의 시야로 불쑥, 낯선 군홧발이 침범했다. 요슈아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조요한 달빛 아래, 기골이 강건한 사내가 물끄러미 그들을 굽어보고 있었다.

“요슈아?”

“…….”

“알리오나?”

듣기 좋은 저음에는 채 숨기지 못한 당혹감과 아연함이 섞여 있었다. 요슈아가 말없이 눈살을 찌푸리는데, 등 뒤에서 스르릉 검 뽑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물러나십시오, 전하.”

가일이 다가와 사내에게 검을 겨누었다.

“이자는 도미에 변경백입니다.”

예후르의 다른 부하들도 하나둘 검을 뽑아 들었다. 이리 떼가 사냥감을 덮치듯 사내에게로 모여드는데, 멀리서 말굽 소리와 함께 병사들의 고함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볼파르트의 치안대였다.

고개를 돌려 치안대의 먼 횃불을 응시하던 변경백이 느리게 말문을 열었다.

“일단은 안전한 곳으로 자리를 옮기도록 하죠.”

변경백이 먼저 등을 돌렸다. 알리오나를 들고 일어난 요슈아가 묘한 눈으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도미에 변경백이 누군데?”

“너 진짜 북방에 대해 아는 게 하나도 없구나?”

요슈아가 놀리듯 말하자, 차라의 눈이 대번에 가늘어졌다. 요슈아가 실실 웃으며 말을 이었다.

“탐보프에서 제일가는 명장이야. 새파랗게 젊은 나이에 지방의 반란을 진압했고 지금은 알프도르트 방벽의 책임자로 있지.”

“알프도르트 방벽은 동쪽 끝에 있잖아. 그런 사람이 왜 여기 있는 거야?”

“그거야 나도 모르지.”

요슈아가 시큰둥하게 귀를 후볐다.

“생각할수록 이상한 일이긴 해. 난 동부에서 반란이 일어나면 당연히 변경백이 선봉에 설 줄 알았거든. 바도비체 후작도 뭐, 충성스럽고 나름대로 괜찮은 지휘관이다만 솔직히 검술은 평범하지.”

“…그러니까 안 되는 거야.”

“뭐?”

열 오른 숨을 할딱이던 알리오나가 흘끗 눈을 들어 올렸다.

“폐하께선 지나치게 유능한 인재를 좋아하지 않으셔. 애당초 탐보프에서 제일가는 명장을 왜 방벽에 박아 두셨겠어?”

요슈아와 차라가 의아하게 시선을 주고받았다.

“유능한 인재는 많을수록 좋은 거 아니야? 폐하처럼 사람 다루는 데 이골이 난 분이면 더더욱.”

“…폐하를 하나도 모르는구나, 너흰.”

알리오나가 미미하게 웃었다. 알쏭달쏭한 소리에 의구심만 늘어났으나, 미처 캐묻기도 전에 정중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요.”

문이 열리며 도미에 변경백이 들어왔다. 그는 한 아름 안고 온 약병들을 탁상에 올려놓았다.

“황녀 전하께선 어떠십니까?”

“어떻긴, 안 그래도 허약한 앤데 완전히 넝마가 됐죠. 여기 이 멍은 변경백이 만든 거예요. 축하해요.”

요슈아가 알리오나의 앙상한 팔을 들어 올리며 짓궂게 말했다. 아픈 알리오나를 대신해 차라가 그의 어깨를 찰싹 때려 주었다.

“송구합니다, 전하.”

침대 옆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은 변경백이 고개를 숙여 사죄했다. 알리오나는 조금 불편한 기색으로 고개를 틀었다.

시퍼렇게 멍든 알리오나의 팔에 약을 발라 주던 차라가 안쓰러워 죽겠다는 투로 물었다.

“저기, 의사는 지금 못 불러요? 크게 지혈이 필요한 곳은 없어서 다행이긴 한데, 열이 내리질 않아요.”

“지금 부하들이 의사를 수소문하고 있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네에….”

차라가 시무룩하게 알리오나의 물수건을 갈아 주었다. 변경백이 고요한 눈으로 차라를 탐색하자, 요슈아가 길게 하품하며 말했다.

“아, 쟤는 사도예요. 알죠? 성궁의 막내 사도.”

“예?”

놀란 듯 요슈아를 돌아보았던 변경백이 갑자기 벌떡 일어나 가슴을 짚으며 인사했다.

“불의 종, 불의 사자, 사색을 여시는 심연의 천사 이슬라 님의 현신께….”

“그, 그만! 그만해요!”

요슈아가 끅끅대며 웃음을 참고 있었다. 차라는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요슈아를 쏘아보았다.

“내가 사도긴 한데, 이런 순간까지 예를 갖출 필요는 없어요. 인사 못 받으면 죽는 것도 아니고….”

변경백은 그제야 수긍한 듯한 얼굴로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차라는 남몰래 그를 훔쳐보았다.

젊은 나이라더니 확실히 예후르의 또래로 보였다. 다갈색 머리에 짙은 빛깔의 눈, 밤새 피로가 얹혀 조금 창백해진 낯빛과 단정한 얼굴선은 기사라기보단 학자에 가까워 보였다. 비록 마디 굵은 손과 살벌하게 자리 잡은 근육이 그의 오랜 야전 생활을 방증했지만.

뜬금없이 마주친 이 젊은 장군에게 차라는 궁금한 점이 아주 많았다. 그러나 지금 물어야 할 것은 한 가지였다.

“변경백은 왜 볼파르트에 있는 거예요?”

“미에투넨으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알프도르트 방벽의 책임자라면서요. 폐하를 급히 뵈어야 할 일이라도 있어요?”

변경백은 깊은 호수처럼 가라앉은 눈으로 세 사람을 차분히 훑어보았다. 계속 실없는 소리를 일삼던 요슈아마저 조용히 입 다물고 그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질문에 대답하기 전에 한 가지 여쭙겠습니다. 황궁에 계셔야 할 세 분께서 어찌 이런 곳에 계시는 겁니까?”

“에이, 사도님이 먼저 물으셨으니 변경백부터 대답해요.”

“경우에 따라 세 분께 대답을 드리는 것이 적절치 못할 수 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의아해하는 차라와 달리, 요슈아는 음험하게 눈을 빛냈다.

“방벽에 무슨 일이 생겼구나.”

“…….”

“무슨 일이에요? 설마 방벽이 뚫렸나? 그런데 이상하다. 듣기로 반란군은 방벽이 있는 동쪽으로 향한 게 아니라 이쪽으로 진군하고 있다던데요. 바스토뉴의 야만족들이 침입해 왔으면 그럴 수가 없는데….”

요슈아가 혼자서 중얼중얼 고민에 빠진 사이, 차라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미안해요. 우리가 여기 있는 이유는 말 못 해요. 아까 우릴 도와준 건 고맙지만….”

“누구에게 쫓기고 계셨던 겁니까?”

“…….”

“설마 황제 폐하입니까?”

차라가 그의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시선을 내렸다. 변경백이 미미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방벽은 무너졌습니다. 그럼에도 바스토뉴의 야만족들이 방벽 너머로 침략해 오지 않는 것을 보면 페임하른 공작과 사전에 밀약을 맺은 것으로 추측됩니다만, 확실치는 않군요.”

“우리 엄마가 바스토뉴랑 밀약을 맺었다고요? 말도 안 돼!”

“실제로 페임하른 공작이 이끄는 반란군에는 바스토뉴의 용병대 또한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니, 내가 아는 우리 엄마는 바스토뉴의 바 자만 들어도 경기를 일으키던 사람인데?”

“페임하른 공작의 뜻이 아니라면, 엘피도 공작 전하의 뜻이었겠죠.”

묘하게 시니컬한 투에 차라는 당혹스럽게 눈만 깜박였다.

“어, 음…. 예후르가 한 일이라면 뭔가 이유가 있을 텐데요…? 아마도…?”

“멍청아! 바스토뉴는 동부랑 철천지원수라고! 언제 뒤통수를 칠 줄 알고 걔네랑 손을 잡아?!”

요슈아가 펄펄 날뛰는 꼴을 보니 정말로 심각한 사안인 것 같아 차라는 얌전히 말을 아꼈다. 그는 북방의 정세에 대해 아는 게 하나도 없었다.

“안 되겠어. 동트면 바로 출발하자. 가서 내 눈으로 직접 무슨 상황인지 확인부터 해야지, 안 되겠어.”

“잠깐, 알리오나는? 이렇게 열이 끓는데 가긴 어딜 가!”

“내가 업고 가면 되지!”

굴리엘모 수도원에 들르기로 하지 않았냐는 둥, 그걸 꼭 지금 가야겠냐는 둥 티격태격하는 소리가 잇따랐다. 결국 차라에게 이긴 요슈아가 기세등등하게 변경백을 돌아보았다.

“들었죠? 내일 아침에 헤어지는 것으로 해요. 변경백이 폐하의 추격자들을 몰살시킨 건 비밀로 해 줄 테니, 그쪽도 여기서 우리 만난 건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고.”

“저는 세 분을 모시고 미에투넨으로 돌아갈 생각입니다만.”

“뭐라고요?”

“조금 전 저는 폐하의 추격자임을 알지 못한 채 일방적으로 공격당하던 이들을 구했을 뿐이며, 혹 폐하께서 이를 문제 삼는다 하셔도 죗값을 치르면 그만입니다. 제 짧은 식견으론 반란군에 합류하시려는 듯한 세 분을 못 본 척 놓아 드리는 것이 더한 중죄로 보입니다.”

변경백의 정석적인 대답에 요슈아는 할 말을 잃은 듯 입술만 벙긋거렸다.

“와…. 꽉 막힌 것 좀 봐. 그냥 서로 없었던 일로 치면 그쪽한테 해될 게 없는데도?”

“이해타산적으로 살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변방만 도는 거죠.”

문득 끊어질 듯 여린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알리오나가 힘겹게 눈을 뜨고 있었다.

“알리오나! 괜찮아?”

“예…. 사도님, 저를 좀 일으켜 주시겠어요?”

차라가 조심스럽게 알리오나를 부축했다. 겨우 침대 헤드에 기대어 앉은 알리오나가 숨을 얕게 헐떡이며 변경백을 응시했다.

“폐하께서 왜 그대를 홀대하시는지 알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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