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8화 (128/328)

노장이 이를 갈았다.

“조금 전, 파발에게 그러시면 아니 되었습니다.”

“적의 고위 인사를 포로로 잡아 두는 것이 문제입니까? 만약 페임하른 공작처럼 적을 보이는 족족 잡아 죽인다면, 이 땅에 탐보프인은 남아나질 않겠군요.”

“제 말은, 적어도 모두가 보는 앞에서 그러시면 아니 되었다는 뜻입니다! 전하께서 그리 대놓고 공작 각하를 업신여기시는데, 어느 누가 각하를 사령관으로 따르겠습니까! 오랜 충심으로 각하를 따르는 저희 귀족들은 몰라도, 병사들은 눈에 보이는 것만 믿는 무지렁이들입니다!”

“내 사소한 언행으로 위신이 깎일 만큼 페임하른 공작의 위엄이 대단치 못합니까?”

“전하!”

“나는 경의 말이 이해되지 않습니다. 나는 공작의 아랫사람이 아니며, 공작의 명령을 받는 입장도 아닙니다. 내가 공작을 어찌 대하든, 그것이 그대를 비롯한 군사들과 무슨 관계입니까? 내가 그대들과 동등하지 않고, 그대들 역시 페임하른 공작과 동등하지 못한데 말이지요.”

페기는 슬쩍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지금 교묘히 논점을 흐리고 있었다. 평생 검만 잡았던 노장은 말문이 막힌 듯했지만.

“나는 그저 동부의 승리를 바랄 뿐입니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아무리 쓴말이라도 백 번 내뱉을 각오가 되었습니다. 그것이 비록 경이 원하는 ‘마땅한 대우’에는 걸맞지 않을지언정, 보다 신속하고 확실한 승리를 가져올 수는 있겠지요.”

예후르가 냉담하게 말했다.

“그러니 만일 내 명령에 반론이 있다면 하십시오. 쓸데없이 격을 따지는 지금 같은 억지는 받아들일 수 없으나, 보다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간언이라면 언제든 수용하겠습니다.”

“…….”

“이만 나가 보십시오.”

노장이 충격받은 얼굴로 비틀비틀 일어섰다. 수백 발 화살처럼 쏘아진 예후르의 말을 아직 제대로 소화하지 못한 듯했다.

조용히 막사를 나서는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페기가 살며시 물었다.

“어찌 그러셨습니까?”

예후르는 말없이 서류를 넘기고 있었다. 페기가 입술을 깨물며 책상 앞으로 다가갔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올바른 간언을 억지로 깎아내릴 분은 아닌 줄로 압니다.”

“올바른 간언?”

“네. 군의 사령관이 전하로 보인다는 건 저 역시 동의하는 바니까요.”

언젠가부터 노르투그 왕국기 옆에 엘피도 공작의 깃발이 함께 걸렸다. 군의 사기를 드높이고 백성들의 환호를 이끌어 내기 위함이라곤 하나, 페임하른 공작의 통솔권이 위협받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도대체 동부의 반란으로 무얼 얻고자 하십니까?”

“내게 답을 바라고 하는 질문은 아니겠지.”

예후르가 묘하게 웃었다. 지그시 그를 쏘아보던 페기가 질문을 달리했다.

“반란군을 사병으로 삼으실 건가요?”

“재미있는 추측이군.”

“아니면 페임하른 공작을 내치고 전하께서 직접 동부를 통치하려는 속셈이신가요?”

“제법 창의적이기도 하고.”

“설마 페임하른 공작의 막후 실세가 되실 생각은 아니겠….”

“더 할 건가? 나머진 일기장에 적는 편이 나을 텐데.”

예후르는 입가에 웃음을 매단 채 깃펜을 들어 올렸다. 그가 서류에 서명하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페기가 막사를 나왔다.

도대체 그의 목적이 무엇이지?

페기는 손톱 끝을 깨물며 생각에 잠겼다. 지금까진 막연히 추측만 늘어놓았을 뿐이나, 이제는 그렇게 순진하게 접근하면 안 되었다. 전쟁이었다. 자칫 잘못했다간 지난 죽음의 진실을 밝히기도 전에 새로운 죽음을 맞을지도 몰랐다.

줄줄이 늘어선 막사 사이 샛길로 접어들던 그녀는 별안간 툭 튀어나오는 인영에 놀라 뒷걸음질했다. 그녀 또래의 어린 병사였다.

“에, 에, 엘피도 공작 전하의 밑에서 일하시는 분이죠?”

한눈에도 긴장한 모습이 역력했다. 페기는 인적 없는 좌우를 살피며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부, 부탁입니다. 절 페임하른 공작 각하의 호위대로 넣어 주십시오!”

“…네?”

“전 늘 페임하른 공작 각하를 존경해 왔습니다! 그, 그분을 지키게 해 주십시오!”

빽 소리를 지르는 병사를 그녀는 조금 아연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존경은 말뿐, 눈에는 채 숨기지 못한 살기가 어른거리고 있었다.

“페임하른 공작 각하의 호위대는 내 소관이 아닙니다.”

“엘피도 공작 전하께 제 말만 좀 전해 주십시오! 그분이라면 무엇이든 가능하시잖아요!”

“전하께 청할 생각이었다면 그런 속 보이는 거짓은 고하면 안 되죠. 내 눈도 못 속이는데 전하의 눈은 어찌 속이려고 그럽니까?”

병사가 움찔했다. 페기는 얕은 한숨을 내쉬며 어르듯 말을 이었다.

“간절해 보이니 일단 사정을 얘기해 봐요.”

“하, 하지만….”

“나는 페임하른 공작의 사람이 아닙니다. 설령 불경한 소리가 나와도 묻어 두기로 약속하죠.”

병사가 갈등 끝에 꺼낸 말은 조금 뻔한 이야기였다. 페임하른 공작의 광증에 휘말려 죽은 무고한 하녀와 누이의 원수를 갚고자 입대한 동생.

“그래서 페임하른 공작을 죽이기 위해 호위대에 들어가고 싶단 얘긴가요?”

페기는 헛웃음을 머금었다. 정식 훈련도 채 받지 못한 일개 병사가 이름난 맹장을 죽이려 들다니, 어불성설이다.

“무, 무턱대고 죽이겠단 건 아닙니다. 저도 동부의 형편이 나아지길 바라니까요. 다만 공작이 여전히 죄 없는 누이를 죽이던 그날의 괴물이라면….”

병사의 턱에 힘이 가득 들어갔다. 페기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응시했다.

어불성설이지만, 다른 쪽으로 이용할 순 있겠다.

“좋습니다. 엘피도 공작 전하를 뵐 기회는 마련해 드리죠.”

“저, 정말입니까?!”

“대신 그분께는 진실만 고해야 해요.”

페기가 엄중히 말했다.

“전하께는 서툰 거짓말 따위 통하지 않습니다. 지금 내게 털어놓았던 그대로 말해요.”

“하지만 페임하른을 죽이겠다는 저를 과연 전하께서 받아 주실지….”

“바로 죽이겠단 게 아니잖아요. 어디까지나 페임하른 공작을 지켜보고 결정하겠다는 것이지.”

“…….”

“무고한 백성들을 괴롭히는 위정자를 엘피도 공작 전하께서 가만 지켜보시리라 생각해요?”

병사의 눈이 흔들렸다. 페기는 가느다란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속삭였다.

“따라와요.”

페기는 예후르에게 서류를 건넸다. 요즈음 그녀는 군자금의 출납을 도맡고 있는데, 예상대로 전장에서 뼈 굵은 기사들을 상대하는 일은 녹록지 않았다.

“털모자? 이게 뭐지?”

“틸브레히트 경이 요구한 물품입니다. 기사들의 방한용품으로 대거 매입해 달라더군요.”

“겨울도 다 끝나 가는데 무슨.”

“저도 이상해서 수소문해 보니, 틸브레히트 경의 고향이 모피 생산지로 유명하다고 합니다. 이참에 가족과 친지들에게 크게 한탕 해 주고 싶은 마음인가 보죠.”

예후르가 짧게 조소를 흘렸다. 페기는 나머지 서류를 건넸다.

“틸브레히트 경은 저를 한낱 규중처녀로 여기며 무시합니다. 전하께서 거절해 주십시오.”

“그러지.”

예후르가 서류를 팔락 넘겼다. 그때, 막사 밖에서 인기척이 들리며 어수룩한 얼굴의 병사가 들어왔다.

“저, 전하. 식사를 올릴까요?”

“조금 이따가.”

예후르는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머뭇거리던 병사는 페기의 서늘한 눈빛에 등이 떠밀리듯 다가와 철퍼덕 무릎을 꿇었다.

“전하! 저를 페임하른 공작의 호위대로 넣어 주십시오!”

예후르가 느리게 고개를 들었다.

“페임하른 공작은 아무 죄 없는 저의 누이를 때려죽인 잡니다! 제 누이뿐만이 아니에요, 공작저에서 일하던 많은 하녀와 하인들이 그렇게 죽어 나갔습니다. 저는 그런 자가 동부의 수호자라는 사실이 믿기질 않습니다. 부디 제게 확인할 기회를 주십시오!”

“…처음 보는 얼굴인데.”

병사의 어깨가 움찔했다. 예후르는 조용히 깃펜을 내려놓았다.

“확인해서, 페임하른 공작이 여전히 바뀌지 않았다면 어찌할 생각이지?”

“저, 저는….”

병사는 침을 꿀꺽 삼키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를 향해 내리뜬 금안이 절대적인 판관처럼 냉엄했다. 저 눈앞에서 어떻게 감히 거짓을 고할 생각을 했을까.

“제 목숨을 걸고서라도 페임하른 공작을 죽일 것입니다.”

예후르는 말없이 그를 내려다보았다. 얼핏 무료해 보이는 얼굴로 한참을 침묵하더니.

“좋다.”

“…….”

“이만 물러가라.”

병사는 얼떨떨한 얼굴로 일어섰다. 반문하고픈 기색이 역력했으나, 예후르의 눈이 다시 서류로 꽂히자 주저하며 막사를 나갔다.

페기는 찡그린 얼굴로 예후르를 응시했다. 이것으로 확실해졌다.

페임하른 공작은 버리는 패다.

하지만 어째서?

“묻고 싶은 것이 많은 얼굴인데.”

예후르가 지나가듯 읊조렸다. 잠시 침묵하던 페기가 신중하게 말을 꺼냈다.

“왜 저 병사의 청을 들어주셨습니까?”

“옳은 말이니까.”

“페임하른 공작이 저지른 짓을 다 아시고도 그녀를 동부의 구원자로 내세우신 건가요?”

“…나는 페임하른 공작이 동부의 구원자라 공표한 기억이 없다만.”

예후르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떠올랐다.

페기의 인상이 설핏 구겨졌다. 본인이 그렇게 유도했으면서 이제 와 공표한 적이 없다니. 말장난이다.

“저는 전하의 궁극적인 목표가 탐보프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동부에서 반란을 일으키신 거라고요.”

계속 해 보라는 듯 예후르가 팔짱을 끼고 그녀를 보았다.

“하지만 반란군을 전하의 사병으로 삼으실 것도 아니고, 페임하른 공작과 끝까지 함께하실 것도 아니고. 도대체 전하께서 바라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답해야 하나?”

“아무것도 모르고 늑대 소굴로 들어갈 수는 없지 않습니까.”

예후르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네가 무기를 들고 전장에 나갈 것도 아닌데 잡념이 많구나.”

“전하.”

“걱정하지 마라. 이번 일이 끝날 때까지 널 다치게 할 생각은 없으니.”

“…….”

“네가 얌전히 내 옆을 지킨다면 말이야.”

예후르가 물끄러미 그녀를 쳐다보았다. 페기는 입술만 작게 달싹였다. 갈피를 잡을 수 없는 혼란이 가시지 않았다.

예후르가 다시 서류로 시선을 돌렸다.

“그런 의미에서 네게 호위를 붙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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