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7화 (127/328)

불어오는 바람에 탄내가 스며 있었다.

페기는 바람결에 흐트러진 머리를 가다듬으며 다시 정면을 응시했다. 공성전은 막바지에 이르고 있었다. 출병한 이래 전군이 전열을 갖추어 임하는 첫 전투였으나, 수적으로 너무 차이가 나 김이 빠지는 것도 사실이다.

밧줄을 타고 성벽을 오르는 병사들, 성문을 두드리는 공성퇴, 성벽 위에서 우왕좌왕하는 적군, 제대로 겨누지 못하고 사방팔방으로 흩어지는 적의 화살들.

탄알은 일찌감치 바닥났는지 언제부턴가 대포 쏘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그녀를 비롯해 후열에 배치된 예비군은 적막 속에 마른침을 삼키며 멀리서 벌어지는 전투를 관람하기 바빴다.

페기는 흘끗 눈을 들어 올렸다.

후열 위로 거대한 그림자를 드리운 존재. 비스듬한 오후의 햇살 속에 더욱 고고하게 빛나는 순백의 용이 수호하듯 그들의 머리 위를 날고 있었다.

그는 과연 어떤 광경을 보고 있을까.

페기는 문득 예후르의 시계(視界)가 궁금했다. 하늘 높은 곳에서 바라보는 땅은 어떤 모습일까. 모든 것이 분명한 그의 눈에는 어떤 세상이 비치고 있을까.

페기는 무의미한 상념을 접으며 다시 고개를 내렸다. 마침내 공성퇴가 성문을 꿰뚫고 있었다. 성벽을 탈취한 병사들이 탐보프의 늑대 깃발을 베고 노르투그 왕국기를 올렸다.

먼 곳에서 메마른 바람을 타고 승리의 아우성이 전해졌다.

한 줌 남은 치안대가 탐보프와의 경계에 맞닿은 동부의 성을 갈취한 것은 하루 전의 일이었다.

탐보프에선 초장에 반란을 잡길 포기했으므로, 남은 치안대에게 속히 복귀하란 명을 내려 놓은 상태였다. 바도비체 후작이 부재한 탓에 적극적으로 동부에 파병할 수 없는 데다, 동부의 토착민마저 반란군의 편을 들고 있으니 차라리 본진에서 전열을 가다듬을 시간을 버는 것이 낫다는 계산이었다.

덕분에 반란군은 한 달이 다 되어 가도록 제대로 된 전투 한번 없이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지나가는 곳마다 성문이 활짝 열리며 환영하는 인파가 쏟아졌고, 어딜 가든 축복의 인사말이 뒤따랐다. 예상보다 훨씬 수월하게 동부를 장악하고 있었으나 그 어디도 전쟁의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달아나던 치안대가 작은 성 하나를 틀어쥐었다는 파발이 도착한 것이다. 치안대에게 내려진 복귀 명령을 모르지 않았던 반란군 수뇌부는 잠시 의아했으나, 뒤이어 들이닥친 밀정의 보고에 수긍했다.

“탐보프 출신 이주민들의 피난이 자꾸 늦어지자, 그들에게 달아날 시간을 벌어 주기 위해 스스로 미끼가 된 것입니다.”

뜻은 가상하나 현실은 냉혹했다.

고작 삼백 명 남짓한 치안대는 반나절도 안 되어 무너졌다. 치안대가 그리도 지키고자 했던 이주민들의 피난 행렬로 용 기병대가 날아갔으니, 그들 역시 그리운 고향 땅은 밟지 못하리라.

페기는 조소를 숨기지 않았다. 누군가에겐 목숨이 달린 위급한 임무이나, 다른 누군가에겐 싱거운 승리였다. 그럼에도 첫 승리였기에 병영에는 어찌할 수 없는 희열이 감돌았다. 평소와 다르게 들뜬 분위기가 살갗으로도 느껴졌다.

“저, 아가씨.”

누군가 그녀를 불러 세웠다. 병영에서 아가씨라 불릴 만한 사람은 그녀뿐이었다. 자연스레 고개를 돌리자, 앞섶을 대강 풀어 헤친 기사 두엇이 엉거주춤 술병을 들고 있었다.

“무슨 일이시죠?”

“아, 그게….”

기사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선 우물쭈물하자, 동료 기사들이 키득거리며 그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쿡쿡 찔렀다. 페기는 슬쩍 눈썹을 찌푸렸다. 그렇게 만취한 것 같진 않은데.

“용건이 없으시면 이만 가 보겠습니다.”

“아, 아니요, 잠깐만요!”

기사가 황급히 그녀의 팔을 채는 순간, 머리 위에서 돌풍이 쏟아졌다. 페기는 이리저리 날리는 짧은 머리칼을 간수하며 눈을 가늘게 떴다. 역광을 인 백룡이 바람을 거느리며 착륙하고 있었다.

이곳저곳에서 빗발치던 노랫소리가 우뚝 멈추었다. 승리에 도취되어 흥겹게 뛰어놀던 병사들도 하나둘 자세를 바로 했다.

다시 엄숙하게 가라앉는 분위기 속에 바람 먹은 깃발이 힘차게 휘날렸다. 하나는 검은 곰을 그린 노르투그 왕국기요, 다른 하나는 백룡을 그린 엘피도 공작의 깃발이다.

용이 땅에 발을 디디며 거대한 날개를 접었다. 날개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바람은 순식간에 잦아들었다. 그리고 비스듬히 내리치는 햇살 속에 예후르가 용의 등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비행을 마친 용의 콧잔등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그가 페기를 돌아보았다.

“아델라이데.”

페기는 즉각 그에게 다가갔다. 예후르가 익숙하게 손을 내밀자, 단단히 동여맨 가죽 장갑의 매듭을 풀어 주기 시작했다.

페기가 매듭에 집중하는 동안, 예후르의 시선은 그녀의 머리 위를 스쳐 추파를 던지던 기사들에게 닿았다. 멍하니 그를 바라보던 기사들이 경기 일으키듯 놀라 달아났다.

예후르가 작게 웃었다.

“호위를 붙여 줄까?”

“괜찮습니다.”

페기는 건조하게 대꾸하며 단단한 매듭 사이로 손톱을 집어넣었다. 분명 자신이 매듭지은 것인데 잘 풀리지 않았다. 조금 신경질이 난 나머지 저도 모르게 오른손에 힘을 주었는데, 순간 비틀린 관절에 섬광처럼 고통이 밀려왔다.

페기는 입 안 여린 살을 콱 깨물며 고통을 참았다. 매듭 하나에 낑낑대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예후르가 다소 무료한 투로 물었다.

“손은 왜 그리 되었지?”

페기의 손길이 멈추었다.

망가진 손은 피아노 연주를 망쳤던 그날 밤에 묻어 두고 왔다. 이후로 그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그날을 없었던 것처럼 잊고 지내 왔다.

“…사고를 당했습니다.”

“어쩌다?”

“사고에 이유가 있을까요. 그저 일어났을 뿐이죠.”

마치 재난처럼.

그녀의 죽음도, 손이 망가진 것도 모두 재난이었다. 이유 없이 닥쳐오는 재난.

“…많이 고통스러웠나?”

페기는 고개를 살짝 들었다. 만약 이마저 그녀를 놀리려 드는 것이었다면 목숨을 걸고서라도 그의 발을 힘껏 밟아 줄 요량이었다.

하지만 예후르는 그녀를 보고 있지 않았다.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는 시선이 덧없고도 음울했다. 페기는 어쩐지 심란한 기분이 들었다.

“…많이 아팠죠. 지금도 많이 아픕니다.”

조용히 읊조리는 소리에 그의 시선이 다시 돌아왔다. 예후르는 여전히 진전 없는 그녀의 손을 물리고 손쉽게 매듭을 풀었다. 걸음을 옮기며 반대편 장갑의 매듭까지 술술 풀자, 그를 뒤따르던 페기가 어처구니없단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 보니 매듭을 묶는 것이면 몰라도, 푸는 것이면 혼자서도 충분히 할 수 있지 않나. 자연스레 그의 뒤통수로 따가운 시선이 꽂혔다.

“듣자 하니 매듭짓는 장갑은 비행에 서툰 초보자들이나 사용하는 것이라고 하던데요.”

피식하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누가 그러던가?”

“니체타 씨요.”

“비행술이 꽤 나아진 모양이지. 조만간 시험을 해 봐야겠군.”

졸지에 니체타를 함정에 빠트린 페기가 입술을 앙다물고 그의 뒷모습을 째려보았다. 그는 자신을 부려 먹는 데서 이상한 희열을 느끼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들은 곧 막사의 모퉁이를 돌아 페임하른 공작과 수뇌부가 모여 있는 곳에 이르렀다. 가볍게 인사를 주고받는데, 파발이 급히 달려와 보고했다.

“방금 용 기병대가 도착했습니다. 달아나던 탐보프인들을 모두 포박해 왔는데, 그들 중에 총독부 고위 인사와 그 가족들이 포함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리니의 눈에 순간 불똥이 튀었다.

“아직도 그 벌레 같은 족속이 남았단 말이냐. 당장 그놈들의 목을 베어….”

“후방으로 보내 가둬 두거라.”

예후르가 평온하게 끼어들었다.

“총독부 고위 인사라면 탐보프에서도 제법 높은 곳까지 연줄이 닿는 자일 터. 자진하지 않도록 감시를 붙여 주고, 훗날 포로로 교환하면 이득일 것이다.”

이리니는 얼음장 같은 얼굴로 입을 꾹 다물었다. 혼란스러운 기색으로 둘을 번갈아 보던 파발이 곧 예후르를 향해 경례했다.

“예! 명 받들겠습니다!”

파발이 물러났다. 수뇌부가 아연한 기색을 내비치는 가운데, 가장 연륜 깊은 노장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예후르에게 말을 걸었다.

“전하. 잠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만.”

“내 막사가 가까우니 그쪽으로 가지요.”

노장은 이리니에게 공손히 인사를 하고 예후르의 뒤를 따랐다.

근방에 위치한 예후르의 막사는 이리니의 것 못지않게 크고 호화로웠다. 꼭대기에는 백룡의 깃발이 휘날리고 있으며, 내부에는 값비싼 융단과 모피, 푹신한 침대까지 마련되어 있었다.

“대단히… 화려하군요.”

막사로 들어오던 노장이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페기 역시 처음에는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그녀가 알기로 예후르는 사치와 거리가 먼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앉으십시오.”

예후르는 자리를 권하며 책상 앞에 앉았다. 맞은편에 착석하여 용건을 꺼내려던 노장이 멈칫하며 페기를 돌아보았다. 페기가 눈치껏 나가려고 하자, 예후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내 보좌입니다. 괘념치 말고 말하십시오.”

“…….”

경계하듯 페기를 곁눈질했던 노장이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먼저 이렇듯 전하께서 동부로 와 주신 것에 감사를 드립니다. 전하께서 함께하신다는 사실에 많은 병사들이 위안을 얻고 있습니….”

“그런 입바른 소리나 하러 온 것이 아닐 텐데요.”

예후르가 엷은 미소를 지었다. 노장은 자신의 발치로 시선을 고정했다. 비록 그를 똑바로 마주하진 못하나 눈빛만은 더없이 매서웠다.

“전하. 이 군의 사령관이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당연한 것을 묻는군요. 페임하른 공작이 아닙니까.”

“제 눈에는 전하께서 이 군의 사령관으로 보입니다.”

예후르가 조롱하듯 눈살을 째푸렸다.

“안타까운 일이군요. 불행히도 노안은 구제할 길이 없습니다.”

구석에서 발끝으로 카펫의 문양을 덧그리던 페기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그의 사근사근한 어조에 노장마저 자신의 귀를 의심하는 듯했다.

“이 군의 사령관은 명백히 페임하른 공작이며, 나는 전적으로 그대들을 돕고 있습니다. 설마 이런 자명한 사실을 읊고자 나를 찾은 것은 아니겠지요.”

“페임하른 공작 각하를 진정 사령관으로 여기신다면, 그에 마땅한 대우를 해 주셔야 합니다!”

“글쎄요. 나는 이미 공작에게 마땅한 대우를 베풀고 있습니다. 경은 정확히 무엇이 불만입니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