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6화 (126/328)

“그러고 보니 저번 원탁회의도 불참하셨지요. 그때 불참 사유가 아마….”

어떻게든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자아내려던 추기경들이 하나둘 입을 다물었다. 의자에 기대어 앉아 가만히 눈을 내리깔고 있던 클레멘스가 툭 내뱉듯 말했다.

“암소가 새끼를 낳는 바람에 불참했었지요.”

“아….”

“하인이 휴가를 가서 새끼를 받을 사람이 없더군요.”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다. 퀴테리아 추기경이 반듯한 미소를 올리며 좌중을 돌아보았다.

“이만 개의하도록 하죠.”

회의는 모두가 예상한 대로 흘러갔다. 보통의 원탁회의라면 아나클레토와 솔란지아를 위시한 탐보프 세력과 비올라와 퀴테리아를 위시한 위스누아 세력의 알력 다툼으로 시끄러웠을 테지만, 오늘만은 아니었다. 두 세력이 최초로 합세한 날이었다.

“원탁에서 강력한 처벌을 내려야 합니다. 동부의 반란에 엘피도 공작이 참여한 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의 일탈일 뿐, 교국과는 전혀 무관한 일임을 이참에 확실히 해 두어야 훗날 뒤탈이 없을 겁니다.”

“보나벤투라 추기경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엘피도 공작 전하께 여러 차례 경고의 서신을 보냈으나 일절 답이 없으셨으니 저희로서도 더는 뾰족한 수가 없어요. 공작위를 박탈하고 즉각 교국으로 귀환할 것을 촉구해야 마땅합니다.”

“저 역시 동의합니다. 더 꾸물거리다간 교회가 타국의 반란에 관여했단 인식이 퍼지고 말 거예요.”

사도의 작위 박탈을 논하는 흉흉한 자리임에도 원탁은 순풍이 도는 듯 평화로웠다. 조금 전만 해도 시뻘건 얼굴로 열변을 토하던 아나클레토는 만족스럽게 부른 배를 쓰다듬었고, 얼음 같던 솔란지아마저 조금은 누그러진 모습이었다.

여기서 가장 신이 난 것은 비올라였다. 만일 예후르가 공작위를 잃는다면 차기 교황의 자리는 정해진 것이나 마찬가지. 오랜 시간 속 끓였던 문제가 곧 해결되리라는 사실에 그녀는 못내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그럼 이만 투표에 부치도록 하지요. 엘피도 공작의 작위 박탈에 동의하시는 분들은 모두 손을 들어 주십시오.”

탐보프와 위스누아의 세력이 합심하여 손을 번쩍 들었다. 비록 위스누아 출신은 아니나, 퀴테리아 추기경이 펼치는 개혁 정책에 홀딱 반한 보나벤투라 역시 그들의 뜻을 따랐다. 손을 들지 않은 사람은 단둘뿐이었다.

클레멘스와 누미디아의 대주교.

아나클레토가 시건방지게 콧방귀를 뀌며 중얼거렸다.

“흥. 이제야 본색을 보이시는군.”

퀴테리아 추기경이 남은 두 사람을 돌아보았다.

“누미디아의 대주교께 반대하시는 이유를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아, 그, 그것이….”

누미디아의 대주교가 눈에 띄게 당혹한 기색으로 말을 흐렸다.

이 중에서 탐보프 동부의 반란을 반길 세력은 오직 라발뿐이었다. 위스누아와는 달리, 엘피도 공작의 작위가 박탈된다 하여 따로 이득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애당초 라발은 비올라의 세력인 퀴테리아 추기경의 지나치게 원리주의적인 면모에 우려를 표하고 있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누미디아의 대주교는 교묘하게 사실 관계를 그르치는 정치적 수사에 익숙하지 않은 인물이었다. 일평생 정직을 제일의 가치로 두고 살았던 성직자에게 성도의 정치판은 낯설고도 낯선 곳이었다.

“실망입니다. 결국은 그대도 교회가 아닌 모국의 뜻을 따르는 것이군요.”

“아, 아닙니다! 저는 그저….”

“그저, 뭡니까? 정신머리 똑똑히 박힌 성직자라면 지금 원탁이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하는지 분명하게 알 겁니다! 교회는 반드시 타국의 갈등에 중립적으로 임해야 한다는 천계율의 원칙을 설마 잊었다고는 하지 마십시오!”

비난이 빗발치자 누미디아의 대주교는 다급히 클레멘스를 곁눈질했다.

교국에서 행해지는 라발의 외교는 오랫동안 클레멘스가 가장 중요한 축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가 무너진 지 3년째에 접어든 지금도 그의 빈자리는 여전히 채워지지 않고 있었다. 원탁 추기경으로 임명된 순간부터 클레멘스만 따라가면 되겠거니 여겼던 대주교는 어느 날 갑자기 달라진 그가 숫제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그러자 가만히 턱을 괴고 앉아 있던 클레멘스가 넌지시 말을 흘렸다.

“어차피 아무런 의미도 없는 짓 아닙니까.”

찌를 듯한 시선이 그에게로 모였다. 솔란지아가 미간을 찌푸리며 반문했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사도의 작위를 박탈하는 것은 오직 교황 성하만이 가능하십니다. 부디 세피로스 협약을 잊었다고 하진 마십시오.”

솔란지아는 언짢은 기색으로 입을 다물었다. 세피로스 협약의 골자는 어디까지나 교회와 라발의 긴밀하고도 예민한 관계에 있었지만, 부수적으로 그런 내용이 있긴 했다.

교황만이 사도에게 작위를 내릴 수 있다.

혹은, 교황만이 사도의 작위를 박탈할 수 있다.

아나클레토가 짜증스럽게 소리를 높였다.

“천계율도 아니고 고작 천 년 전의 협약입니다! 천계율이 보장하는 원탁의 결정과는 무게가 달라요!”

“맞습니다. 원탁의 결정으로 타락한 사도에게 화형을 언도했던 선례도 있지 않습니까?”

“…용감하게도 3년 전의 일을 꺼내시는군요.”

클레멘스가 턱을 괴었던 손바닥에서 고개를 살짝 들며 흥미롭다는 듯 눈을 빛냈다. 일견 따분하게까지 보이던 얼굴에 예전의 총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나, 나는 그저 그런 선례도 있다는 말을 하고자….”

“오, 그대를 비난하려던 것은 아닙니다. 확실히 3년 전에 그런 일이 있었지요. 하지만 그때와 비교하기에는 지금의 상황이 너무나도 다르지 않습니까? 그때는 타락한 사도에게 벌을 내리라며 온 백성들이 들고일어났지만… 지금은 글쎄요.”

“…….”

“만일 원탁의 결정이 공표된다면, 짐작하건대 우리 모두가 돌을 맞을 것입니다. 어찌 되었든 엘피도 공작 전하께선 뱀을 죽인, 천하의 다시없을 영웅이시니까요.”

클레멘스가 실실 웃었다. 아나클레토가 콧등을 씰룩거리며 그를 노려보자, 퀴테리아 추기경이 차분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때로는 옳은 길이 가시밭길입니다. 돌팔매질 당할지언정 정의로운 길로 나아가는 것이 우리 원탁이 추구해야 하는 방향이지요.”

“그 옳은 길이 가시밭길이 아니라 낭떠러지라면 어떻습니까? 모두들 설마 진심으로 교황 성하께서 엘피도 공작 전하를 내치리라 여기시는 건 아니겠지요?”

놀리는 듯한 소리에 비올라의 뺨이 살짝 굳었다. 퀴테리아가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그의 말을 받았다.

“원탁의 결정입니다. 교황 성하께서도 가벼이 넘기실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나 성하께선 3년 전에도 원탁의 결정에 승복하지 않으셨지요. 끝내 성하의 결단을 이끌어 낸 것은 성도의 시민들이었습니다. 불행히도 시민들의 분노는 이제 원탁을 향하겠지만요.”

“단순히 3년 전과 비교하기엔 죄질이 다릅니다. 죽음을 선고하는 것과 작위를 박탈하는 것의 무게가 엄연히 다르니, 성하께서도 이를 감안하여 결정을 내리시겠지요.”

“오, 퀴테리아. 내 말을 이해하지 못했군요.”

클레멘스가 눈썹을 찌푸리며 웃었다.

“엘피도 공작 전하께서 앞으로 또 어떤 기상천외한 일을 벌이시든, 성하께서 먼저 그분을 포기하실 일은 없을 겁니다.”

“그게 무슨….”

“애당초 엘피도 공작 전하를 가장 위대한 교황으로 세우기 위해 그토록 열과 성을 다해 교회를 재건하신 분입니다. 그런 성하께서 과연 엘피도 공작 전하가 아닌 다른 교황을 용납이나 하시겠습니까?”

드르륵!

벌떡 일어난 비올라가 차게 굳은 얼굴로 클레멘스를 노려보았다. 퀴테리아가 엄중한 눈빛으로 그녀를 말렸으나 소용없었다. 바들바들 떨리는 그녀의 주먹을 본 클레멘스가 조롱하듯 말을 이었다.

“오래전 성하께서 몸소 먼 사막의 아이를 데려오셨을 때,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이 아이가 무너진 교회의 영광을 다시 세울 것이다. 네게 진정 성직자의 마음이 한 톨이라도 남아 있다면 나를 거스를지언정 이 아이를 거스르진 마라.”

“나는 일개 평범한 인간인지라 당시 성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으나, 지금 와 돌이켜 보건대 뱀을 죽이는 사도는 무언가 특별한가 봅니다. 같은 사도조차 그리 말씀하실 정도라면요.”

역사상 수많은 사도가 있었으나 뱀을 봉인한 사도는 단 한 명이요, 뱀을 죽인 사도도 단 한 명이다. 똑같이 이름 붙여지길 사도이나, 그 둘과 나머지 사이에는 거대한 간극이 있었다.

그리고 사도로서 단 한 번도 특별함을 보이지 못했던 비올라는 모욕당한 얼굴로 회의장을 박차고 나갔다. 퀴테리아와 보나벤투라가 황급히 그 뒤를 따랐다.

“거참, 오랜만에 말 좀 한다 싶더니 분위기 망치는 데는 아주 1등이십니다.”

아나클레토가 불쾌감을 표하며 졸개들을 이끌고 회의장을 떠났다. 묘한 눈으로 클레멘스를 응시하던 솔란지아마저 자리를 뜨자, 이제 원탁에 남은 사람은 클레멘스와 누미디아의 대주교뿐이었다.

야단맞은 아이처럼 웅크리고 있던 누미디아의 대주교가 그제야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클레멘스 추기경. 정말로 괜찮을까요? 행여 쇠약해지신 교황 성하께서 원탁의 결정에 수긍이라도 하신다면….”

고상한 비웃음이 대주교의 말을 끊어 냈다. 클레멘스는 의자에 편안히 등을 기대며 느른하게 중얼거렸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원탁을 가장 오래 지킨 자로서 감히 단언할 수 있습니다. 성하께선 절대로 엘피도 공작 전하를 버리지 못하십니다.”

그 말대로 교황 레오폴트는 엘피도 공작의 작위를 박탈하라는 원탁의 결정을 거부했다. 그토록 애지중지하던 비올라가 눈물까지 보이며 간청했으나 소용없었다. 성직자들의 여론 또한 분분하였으니, 민심을 얻지 못한 원탁의 결정은 수확 없이 가라앉았다.

교국에서 그리 헛되이 시간을 흘려보내는 동안, 열댓 마리의 용을 거느린 동부의 반란군은 빠르게 세력을 넓혀 나갔다. 구심점을 잃은 치안대는 속수무책으로 무너졌고, 이들을 뒷받침해 줄 바도비체 후작마저 부재한 상황이었다.

그렇게 한 달.

어느덧 반란군은 동부의 마지막 성만을 남겨 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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