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5화 (125/328)

무덤가에서 되살아나 죽기 전의 기억을 고스란히 간직한 나는 내가 카니나의 페기라고 짐작하지만, 일말의 의혹은 여전히 남아 있다. 나의 영혼은 정말로 죽은 사도의 영혼이 맞을까. 나는 정녕 네가 알던 그 사람일까.

페기는 씁쓸한 표정으로 눈을 내리깔았다.

누구도 확신할 수 없는 일이다. 죽은 사람이 되살아난 시점에서 모든 것은 불확실해졌다. 단 하나 뿐이던 진리는 위태로워졌고, 반듯하던 질서는 어그러졌다.

그렇기에 나는 내 목숨을 걸고 도박을 할 수가 없다. 너의 반응을 예상할 수 없기에. 기뻐하는 너와 분노하는 네가 나에겐 동시에 존재했다.

어쩌면 반겨 줄지도 모르지.

하지만 내게 심판을 내릴지도 몰라.

나를 그리워하는 네가 안타깝고, 나를 반겨 줄지도 모르는 네가 애틋하다. 그러나 나를 의심하고 죽일지도 모르는 너는 두렵다. 네가 선사할지도 모르는 두 번째 죽음이, 너무나도 두렵다.

내가 겪었던 죽음은 말 못 하게 추워서, 그것을 두 번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너에 대한 믿음보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큰데, 과연 내 손으로 너에게 민낯을 드러낸 날이 올까. 죽음을 무릅쓰고 너에게 진실을 내보일 수 있을까.

상상만으로도 피가 말린다.

너를 넘어야만 가질 수 있는 것들이 하나둘 떠올랐다.

새로운 사도가 차지한 나의 자리, 본디 내가 가져야 했던 모든 것들.

되찾고 싶은 욕망이 있으나 네가 버티어 선 죽음 앞에선 한결같이 무의미하다. 모두 버려야만 살 수 있다며 나는 그리할 것이다. 날 죽이고 내 손을 망가트린 자들에게 복수하여 과거의 망령에서 벗어나리라. 그로써 해방되는 것만이 지금 나에게 남은 유일한 염원.

그러니 나를 흔들지 않았으면 좋겠다.

너는 내가 알던 그대로 단단하고 굳건하였으면. 모든 것이 분명한 질서 속에 너는 영원히 남아 있었으면.

그리해 머잖아 네게서 달아날 내가 덜 고통스럽길 바랄 뿐이다.

***

출병을 앞둔 오스터캄프는 전에 없이 분주했다. 눈엣가시였던 총독부와 치안대를 분쇄할 때만 해도 열광적이었던 시민들은 막상 거병을 눈앞에 두자 몹시 불안해했는데, 이들의 공포를 잠재운 것은 다름 아닌 용이었다.

열댓 마리 용들이 오스터캄프의 드높은 창공에서 노니는 모습은 실로 장관이었다. 그중에서도 고고한 순백의 용은 뱀을 죽인 엘피도 공작의 상징이었으니, 가장 축복받은 사도가 그들과 함께한다는 사실에 모두가 안심했다. 급조된 군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 높았다.

그러나 정작 반란의 선봉인 이리니 페임하른은 도시를 감싼 희망적인 분위기와 동떨어져 있었다. 출병 준비를 마친 그녀는 가신들을 모두 물리고 성안으로 들었다.

노르투그 왕국의 왕성이자, 옛 조상들의 터전.

감금되었던 지난 세월, 그녀는 이곳에서 단 한 차례 패배의 아픔만을 되새기며 살았다. 그토록 집요한 되새김질 끝에 광증을 얻어 무작위로 검을 휘둘렀고, 주인 없는 빈방에서 떠나간 이들을 목격했다.

이리니 페임하른이 미쳤다.

물밑에서 번져 가던 소문은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사실을 직면하기 무서워 제 손으로 본 피를 결벽적으로 닦아 없애라 명했고, 빈방은 모두 잠갔다. 그러면 썩은 내가 가실 줄만 알고.

하지만 덮고 모른 척한다고 광증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미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으므로 지금까진 나아지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으나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기적적으로 움켜쥔 기회를 자신의 광기로 말미암아 잃을 수는 없었다. 이번이 마지막이었다. 그녀는 이 기회에 모든 것을 내걸었다.

오랫동안 잠겨 있던 문이 스르르 열렸다.

그녀는 뚜벅뚜벅 먼지 쌓인 방 안으로 들었다. 오래 묵은 정적 속에 퀴퀴한 세월의 냄새가 났다. 그리고 떠오르는 죽은 이의 형상을 보며 이리니는 설핏 미소를 지었다.

“클라우스.”

나를 대신해 죽은, 그리운 나의 남편.

십여 년 전 죽었을 때 모습 그대로 박제된 그는 여전히 혈기 왕성한 청년이었다. 이리니는 뜨거워지는 눈시울을 애써 외면하며 힘겹게 말을 이었다.

“동부는 이제 거의 손에 넣은 것이나 다름없소. 오래 걸렸지. 당연했던 모든 것들을 되찾는 데 이토록 오랜 세월이 걸릴 줄은 나도 몰랐어.”

“…….”

“그러니 조금만 더 참으시오. 내 그대의 원한을 갚으리다. 간악한 원수의 손에 들어간 우리의 아들도 반드시….”

으득, 이가 갈렸다.

이리니는 자제를 모르고 터져 나오려는 악다구니를 삼키고 또 삼켰다. 참아야 한다. 인내해야 한다. 더 이상 분노로 모든 것을 망칠 수는….

하지만 그놈이 어떻게 그럴 수 있어.

제 배로 낳은 아이였다. 자랑스러운 노르투그의 기사를 아비로 둔 놈이었다. 폭정에 신음하는 고향을 보고 자랐으면서 천한 계집 따위에게 눈이 멀어 고향을, 가족을, 이 어미를 배신했다. 동부의 정통성을 고스란히 이은 몸으로 감히 빌헬미나의 아들이 되었다.

“나까지 엄마의 지옥으로 끌어들이지 마.”

찢어 죽여도 모자랄 놈! 제 자식만 아니었다면 육시를 내어 천하에 본보기를 보였을 테다!

아직도 그놈 낯짝만 떠올리면 머리가 저며질 듯 열이 오르고, 바위를 삼킨 것처럼 속이 갑갑해졌다. 자신이, 이 동부가 고통받는 와중에 원수에게 알랑거리며 호의호식했을 놈을 생각하면 울화가 치밀었다. 그놈을 낳은 자궁이 증오스러워 제 배 속에 칼을 쑤셔 넣고 싶었다.

네놈이 뭐가 부족했다고.

갇혀 산 것은 저 하나뿐이었다. 심심하면 담을 넘어 도시를 쏘다니던 어린놈을 총독부가 눈감아 주었던 것을 내 모를 줄 아느냐. 넌 모든 것을 다 가졌었다. 저 바깥엔 배곯아 죽는 애들이 널렸는데, 너는 고기가 퍽퍽하다며 철없는 소리나 지껄였었지.

한데 막상 배반자가 되고 보니 이곳이 그립더냐.

도대체 무슨 낯짝으로 내게 돌아오려 해.

나는 네게 모든 것을 주려 했었다. 반항하고 거부한 것은 너였다. 배신을 일삼으며 모든 것을 가볍게 여기는 네가 밉다. 네가 가벼이 여기는 모든 것이 내겐 목숨보다 값진 것인데. 어느 하나 마음에 드는 것이 없는 너를, 그럼에도 받아들여야 하는 내 처지가 우습다.

그럼에도, 너는 내 아들이니까.

“…걱정 마라, 클라우스. 그 녀석은 어떻게든 내가….”

힘겹게 말을 잇던 이리니가 손바닥에 머리를 박으며 꾸역꾸역 분노를 삼켰다. 애끊는 소리가 잇새로 흘러나왔다. 벌겋게 실핏줄 터진 눈알에 참지 못한 노기가 역동했다.

제 몸을 때리고 쥐어뜯으며 끓어 넘치는 분기를 간신히 진정시킨 이리니가 비틀거리며 몸을 돌렸다. 끝내 매듭짓지 못한 광기의 유령은 문틈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절뚝이는 발걸음이 멀어졌다.

복도는 어두웠다.

***

동부의 거병 소식은 순식간에 일파만파로 퍼져 나갔다. 성도가 발칵 뒤집힘과 동시에 원탁회의가 소집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이게 말이나 되느냔 말입니다!”

시뻘겋게 얼굴을 물들인 아나클레토가 주먹으로 원탁을 마구 두들겼다. 3년 전 원탁에 새로이 들어온 두 명의 추기경들이 얼른 그의 비위를 맞춰 주었으나, 그의 분노는 가실 줄 몰랐다.

“동부는 황제 폐하의 현명하신 통치 아래 진즉 안정되었던 곳입니다! 그런 곳을 들쑤시고 다닌 것으로도 모자라 페임하른에게 헛된 야망을 불어넣어? 이게 과연 성스러운 불의 사도가 할 짓입니까!”

“아, 아직은 확실한 것이 아무것도 없지 않습니까. 침착하게 소식을 기다리다 보면….”

“확실한 것이 아무것도 없긴! 페임하른의 수족이 죄 잘려 나간 지 오래인데, 그 역도가 무슨 힘이 있어 반란을 일으켰느냔 말입니다! 십중팔구 엘피도 공작의 간계가 틀림없어요!”

피를 토하는 아나클레토의 열변에 두 추기경이 땀을 뻘뻘 흘리며 맞장구를 쳤다. 반면에 일찌감치 그와 사이가 좋지 않은 보나벤투라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는 양 두 눈을 지그시 감고 있었고, 일단은 한패인 솔란지아마저 얼음장 같은 얼굴로 그에게서 돌아앉았다.

“지겨워.”

작게 혼잣말하는 그녀의 낯에 짙은 경멸감이 배어 있었다.

다행히도 아나클레토의 독무대는 비올라의 입장을 끝으로 막을 내렸다. 자색 추기경 의복 위로 흑단 같은 머리칼을 늘어트린 비올라는 그 자태만은 여왕처럼 당당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녀를 보좌해 들어오는 퀴테리아 추기경 역시 자매답게 닮은 모습이다.

“어찌 이리 늦으셨습니까.”

오매불망 그들만을 기다려 왔던 보나벤투라가 겨우 한시름 놓은 듯이 말했다.

“자. 이제 알비야 공작 전하께서도 오셨으니 이만 회의를 시작….”

“아, 아직 한 분 오지 않으셨습니다!”

구석에 박혀 연방 좌중의 눈치만 살피던 어느 추기경이 냉큼 말했다. 그는 3년 전 은퇴한 글리체리아의 후임으로, 라발의 수도인 누미디아를 담당하는 대주교였다.

모두가 잊고 있었던 그의 존재감을 되새기고 나자, 자연스레 빈자리들로 시선이 향했다.

먼저 가장 상석인 교황의 자리. 이제는 비어 있는 것이 자연스러운 곳이다.

그리고 시계 방향으로 이어지는 엘피도 공작과 마가 공작의 자리. 더 말할 필요도 없다.

마지막 빈자리는 현재 교국의 실세인 알비야 공작 비올라의 다음번 자리였다. 추기경들의 낯빛에 아차 하는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화려했던 그의 이력을 상기하면 절대 잊어선 아니 될 인물이나, 기실 성궁의 문지기도 요즘의 그보단 존재감이 뚜렷할 터였다.

때마침 문이 열리며 그가 휘적휘적 안으로 들어왔다.

침묵하는 좌중의 눈길이 그에게로 쏠렸다. 그러나 따가운 시선은 느끼지도 못한다는 듯 그는 지극히 무료한 얼굴로 제자리를 찾아 앉았다. 흐트러진 의복을 가다듬고 경전을 내려놓는 손길이 단정하다.

페아노라의 대주교이자 한때 원탁을 휘어잡았던 추기경, 클레멘스.

지난 3년 사이 그는 인생사 죄 의미 없다는 은둔자가 되어 버렸다.

“크흠. 거, 오랜만에 뵙습니다, 클레멘스 추기경.”

아나클레토가 넌지시 속을 떠보듯 말을 걸었다. 아나클레토를 뒷배로 삼은 나머지 두 명의 추기경들도 눈치껏 말을 보탰다.

“얼굴 좀 자주 보여 주십시오. 이러다간 그대의 번듯한 얼굴도 다 잊어 먹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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