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4화 (124/328)

좌중이 술렁거렸다. 이리니의 왼편에 앉은 노장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제가 확인해 봐도 되겠습니까?”

이리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서신을 일독한 노장은 말단에 찍힌 요앙 오귀스트의 인장을 확인하고도 도저히 믿을 수 없단 표정이었다.

이리니가 냉담하게 말을 이었다.

“이미 라발의 1차 보급품이 출발했다고 들었소. 별일이 없다면 이달 내로 도착하겠지.”

“경로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위스누아는 우릴 돕지 않을 것이고, 늘 중립을 견지하는 교국이 길을 열어 줄 리도 만무한데….”

“프라가를 거칠 것이오. 경들도 알다시피 위스누아와는 썩 사이가 좋지 않은 도시지.”

비올라가 사도로 각성한 뒤 리누스 도시 연맹을 주도하는 것은 위스누아였지만, 연맹의 전통적인 맹주는 본디 동쪽의 프라가였다. 지리적으로는 바스토뉴와 가까울 정도로 중앙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예로부터 교국의 영향력이 약한 곳이기도 했다.

“통행세를 세게 부르긴 했지만, 군량과 무기를 구입할 돈이 대거 절약되어 문제는 없을 것이오.”

“아니…. 라발이 어찌 우릴 돕는단 말입니까?”

“탐보프를 견제하기 위함이 아니겠습니까? 안 그래도 요 몇 년, 세잔과 탐보프의 국경에서 크고 작은 다툼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요앙 오귀스트가 세잔과 라발을 동시 통치하기 시작한 이후로 양국은 거의 한 몸처럼 여겨지고 있었다. 대륙을 양분하는 두 대국이 간접적으로나마 접한 세잔의 국경선에선 늘 긴장감이 흘렀다.

예후르가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탐보프가 북방을 통일한 신성 제국으로 발돋움한 뒤로 라발은 늘 탐보프를 견제해 왔지요. 요앙 오귀스트는 동부의 거병이 탐보프에 큰 혼란을 야기하길 몹시 바라고 있을 것입니다. 동부의 독립을 시작으로 북방이 예전처럼 갈라진다면 더할 나위 없겠죠.”

“그 교활한 자가 어떤 꿍꿍이를 품고 있든, 우리에겐 잘된 일입니다. 보급만 넉넉하다면 무서울 것이 없으니까요. 그런데 보급 담당자가 누굽니까?”

“접니다.”

매미처럼 벽에 찰싹 달라붙어 있던 막시모가 주춤거리며 몇 발짝 앞으로 나왔다. 그의 왜소한 체격과 허름한 행색에 영 못마땅해하는 눈초리가 꽂혔다.

“그래, 누굴 모시고 있는 기사지?”

“전 기사가 아닙니다만….”

“내 사람입니다.”

예후르의 말에 즉각 불경한 눈초리들이 거두어졌다.

“그, 그래. 보급은 아주 중요한 부분이니 각별히 더 신경을 쓰시게. 알아서 잘하시겠지만….”

막시모는 네, 하고 짧게 대답하며 다시 벽으로 붙었다. 똑같이 벽에 붙어 있던 페기가 힐끗 그를 곁눈질했다. 막시모가 인상을 구기며 중얼거렸다.

“…그만 보십시오. 창피해 죽겠으니까.”

“안 봤어요.”

“누구 눈을 속이려 드는 건지.”

막시모가 중얼중얼 투덜거렸다. 들킨 김에 페기는 아예 고개를 돌려 빤히 그를 쳐다보았다.

“왜 당신이 보급을 맡은 거죠?”

“그러게나 말입니다. 저도 궁금하네요. 엘피도 공작 전하께 직접 한번 여쭤보시죠.”

“정말 상인이 맞아요?”

보급은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는 부분. 기사도 아닌 일개 상인에게 맡기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상인이 아니면 뭐겠습니까? 별 쓸데없는 질문을….”

“세상의 어떤 상인이 타국과 밀약을 맺고 전쟁의 보급을 맡죠?”

“아…. 거참, 끈질기시네. 그러는 아가씨는 정체가 뭡니까?”

페기의 입이 조개처럼 다물렸다. 막시모가 작게 코웃음 쳤다.

“아델라이데 피아제인지 세르페제인지는 모르겠지만, 적당히 지내다가 얻을 거 얻고 떠나십쇼. 그 낯짝도 영원한 게 아닐 텐데요?”

“…알고 있었군요.”

“흥.”

이제 회의는 진군 경로를 정하는 단계로 접어들었다. 터질 듯 시뻘게진 얼굴로 고성을 터트리는 사람들 덕에 둘의 목소리는 아주 자연스레 묻혔다.

“사술에 기한이 있다는 걸 알 정도면 정말로 보통 상인은 아니겠네요.”

“젠장….”

“신경질은 그만 내요. 더 캐묻지 않을 테니까.”

“이미 캐물을 대로 캐물어 놓곤 무슨.”

막시모가 방어적으로 팔짱을 꼈다. 예후르의 반듯한 뒷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페기가 문득 소리 죽여 물었다.

“전하께선 이 전쟁으로 무엇을 얻으시려는 것 같아요?”

“그걸 내가 어찌 압니까?”

“추측은 하고 있을 것 아니에요.”

“아가씨한테는 말 안 합니다.”

“답례로 나도 묻는 말에 하나 대답해 줄게요.”

그 말에 막시모가 냉큼 고개를 돌렸다. 동공과 홍채가 구분되지 않는 까만 눈이 페기를 들여다보았다.

“아가씨는 여기 왜 온 겁니까?”

“진실을 알기 위해서요.”

반지의 행방. 그로써 알 수 있는 내 죽음의 진실.

“혹 공작 전하께 원한이 있습니까?”

“난 질문 하나에만 답한다고 했는데요.”

“모르는 척하지 마십시오. 이건 아가씨와 나의 거래가 아니라, 아가씨와 전하의 거랩니다. 내가 보고 들은 것은 모두 전하께 전해질 것이고, 당연히 전하께선 아가씨가 여기 온 이유쯤은 알고 계실 테죠.”

페기는 수긍했다.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의 억지였으니까.

“아직은 없어요.”

“아직은?”

“밝혀질 진실에 달렸겠죠.”

페기는 짧게 대답했다. 가만히 그녀를 응시하던 막시모가 다시 정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제 추측으로 전하께선… 개인적인 무언가를 이루고자 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게 전부예요? 겨우?”

“겨우라니. 전하를 몰라서 할 수 있는 말씀이네요. 내가 알기로 엘피도 공작 전하께선 지금까지 개인적인 목적을 위해 움직이신 적이 없습니다.”

회의는 막바지에 이르고 있었다. 점차 풀리는 분위기 속에 막시모가 힐끗 그녀를 곁눈질했다.

“그러니 조심하십시오. 여태 전하께서 아가씨만큼 이유 없이 가까이 두려 했던 자는 없었으니.”

“…….”

“사람이 안 하던 짓을 하면 죽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전하께선 고작 그런 일로 돌아가실 분이 아니니, 죽는다면 아가씨 쪽이겠죠.”

“죽음을 쉽게 말하네요.”

“많이 보았으니까요.”

페기가 건조하게 웃었다. 그녀의 미소에서 묘한 위화감을 느낀 막시모가 설핏 미간을 찌푸리려던 순간, 마침 회의가 파하였다.

“어쨌든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다음에 뵙죠.”

막시모가 반색하며 회의장을 빠져나갔다. 사람들이 우르르 일어서는 가운데, 페기는 여전히 벽에 붙어 예후르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바쁘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문득 그와 눈이 마주쳤다.

페기는 자연스럽게 시선을 틀려 했으나, 예후르가 사람들을 물리며 성큼성큼 왔다. 페기는 시름에 잠긴 얼굴로 조용히 한숨을 집어삼켰다.

“내일 조합관에서 자금이 운송되면 네가 맡아 계산을 끝마치도록 해라. 군자금으로 쓰일 금액이니 정확한 액수는 기밀로 붙이고.”

예후르가 작은 열쇠를 넘겼다.

“금고는 네가 보관하도록 해.”

“그 말씀은….”

“앞으로 모든 군자금의 출납은 너를 통해 이루어질 것이다. 가장 중요한 식량과 무기의 보급은 라발을 통할 예정이니, 이 군자금은 현지에서 충당해야 하는 잡품 구입에만 제한된다. 그만하면 너 혼자서도 충분하겠지.”

페기는 아연해졌다. 아무리 그래도 군자금이었다. 전장에서 어떤 위급 상황이 벌어질지 모르는데, 동부와는 아무런 연고도 없는 자신이 이런 중책을 맡아도 되는 것인지 혼란스러웠다.

“너 말고는 달리 맡을 사람도 없다. 동부의 귀족이란 작자들은 하나같이 검에만 몰두하던 문맹이며, 쓸 만한 관리들은 죄 십수 년 전 죽거나 뿔뿔이 흩어졌지. 이제 와 외부에서 사람을 들이기엔 영 믿음직하지 못하구나.”

“군의 반발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상관없다. 어차피 내 상단의 이름으로 끌어 온 자금이니까.”

틀린 말도 아니기에 페기는 입을 다물었다. 그럼에도 그녀의 얼굴에 먹구름처럼 드리운 불안감이 가시지 않자, 예후르가 다독이듯 말을 이었다.

“막시모는 보급을 맡아야 하고, 상단의 나머지 일원은 이곳에 남아 뒷정리를 해야 한다. 일전에 보니 어렵지 않게 장부를 해석하던데.”

“그저 어림짐작했을 뿐입니다.”

“그 정도면 충분해. 내가 너에게 바라는 것은 전문적인 장부가 아니라, 저 무지몽매한 기사들이 군자금을 탕진하지 않도록 제동을 걸어주는 것뿐이니.”

“…알겠습니다”

단념한 페기가 고개를 살짝 숙였다. 눈에 띄게 짧아진 적갈색 머리칼이 뺨으로 흘러내렸다. 바람처럼 스쳐 지나가던 예후르의 눈길이 멈칫 그 위로 내려앉았다.

묘한 침묵이었다. 몇 가닥 머리칼에 시선이 못 박힌 듯 흔들림 없던 예후르가 살며시 손을 뻗어 머리카락 끝을 매만졌다. 페기는 당혹하여 잘게 흔들리는 눈을 내리깔았다. 그의 손가락이 닿는 목덜미로 열이 몰렸다.

“…예쁘네.”

부드럽게 내려앉는 속삭임이 꼭 예전처럼 다정하게 느껴진다면 착각일까.

페기는 혼란스러운 기분에 입술을 감쳐물었다.

오늘의 그는 정말로 이상했다. 어떻게든 건수를 잡아 괴롭히려던 사람이 옛날처럼 다정하게 굴기 시작했다. 그 변덕스러운 간극을 경계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속절없이 당하고 만다.

왜냐하면 이럴 때의 그는 상냥한 오라비의 얼굴을 하고 있으니까.

그녀가 좋아했고, 그녀가 마음에 품었던 그 시절의 모습으로.

가까이 붙어 선 그의 목울대에서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귀에 익은 소리에 까맣게 잊고 있던 것들이 새록새록 떠올라 그녀의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행복했던 시절.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그 시절.

“가자.”

그가 다정하게 그녀의 등허리를 손으로 받치며 걸음을 옮겼다. 페기는 차오르는 말을 삼키며 조용히 그를 따랐다.

과연 너의 눈은 누구를 비추고 있을까.

그녀는 바보가 아니었다. 오랜 기억 속 그의 모습을 발견하는 순간마다 그가 자신에게서 누굴 투영하고 있는지 깨달았다. 하지만 어렴풋한 깨달음만으론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

나는 너의 진의를 알 수 없다.

망자를 겹쳐 볼 때마다 이렇듯 상냥해지는 네가, 정작 내 민낯을 보곤 기뻐할지 아니면 분노할지.

네가 기뻐할 일에 기뻐하고, 분노할 일에 마냥 분노하는 사람이었다면 고민은 깊지 않겠으나 불행히도 너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그리운 사람을 앞에 두고도 너는 망자가 돌아왔다는 사실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할 사람이었다.

하지만 어찌 너만 탓할까. 나조차도 나를 확신할 수 없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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