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3화 (123/328)

“전하!”

상단주가 비명처럼 외치며 그에게로 달려갔다. 그의 발치에 납작 엎드리며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다. 살려 달라는 소리가 차가운 금고 안을 쟁쟁하게 울렸다.

페기는 촛대를 바닥에 내려놓고 잡혔던 오른팔을 살살 어루만졌다. 아직도 뻐근하게 아팠다. 그녀는 한숨을 얕게 내쉬며 지친 듯이 뒤를 돌아보았다가 멈칫 굳었다.

예후르의 시선이 그녀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페기는 당혹하여 빠르게 눈만 깜박였다.

“전하, 제발 저 좀 살려 주십시오. 전하!”

절박한 애원이 들리지도 않는다는 양 예후르는 무심히 그를 지나쳐 페기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그의 그림자 속에서 묘하게 움츠러든 페기를 아주 조심스럽게 일으켜 세웠다. 자칫하면 깨질 듯한 유리 공예품을 다루듯 섬세한 손길로.

예후르는 그녀의 오른팔을 들어 신중하게 소매를 걷어 올렸다. 옷감이 살갗에 쓸리는 것마저 용납하지 못하겠다는 듯 움직임이 아주 더뎠다.

그렇게 벗긴 팔을 한참이나 뚫어져라 들여다보았다. 역광을 진 그의 그림자 속에 갇혀 페기는 자신의 팔이 어떤 상태인지 확인할 수 없었다. 꽤 아팠으니 손자국이 남았으리라 막연히 예상만 할 뿐.

하지만 그는 볼 수 있으리라. 페기는 그의 눈이 얼마나 밝은지 알았다. 어둠은 감히 그의 눈을 가릴 수 없으니. 스스로 제 몸을 들여다보지 못하는 상황은 도리어 그녀에게 초조함과 위축감만 선사했다.

그때, 바닥을 기어 온 졸프소체 상단주가 그의 망토를 잡아당겼다.

“전하….”

쉰 목소리가 닿는 찰나에 그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페기의 팔에 못 박혀 있던 금안이 휙 뒤로 돌아갔다. 페기는 그 순간 그의 눈을 스치는 예기를 감지했다. 그녀는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 들려는 그의 손을 본능적으로 붙들었다.

“…….”

반쯤 돌아간 그의 고개에서 눈만 스르르 그녀에게 굴러왔다. 페기는 뻣뻣하게 굳은 목을 움직여 문가에 엉거주춤 서 있는 병사들을 보았다.

“뭐 합니까! 빨리 잡아가지 않고!”

서슬 퍼런 일갈에 병사들이 허둥지둥 졸프소체 상단주를 끌고 갔다. 돼지 멱따는 듯한 비명 소리가 멀어져 갔다. 잔뜩 움츠린 채 눈치만 보던 마샤도 얼른 금고를 나갔다.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페기는 차마 그의 눈을 마주할 용기가 없어 어중간한 허공에 시선을 얹어 두었다. 머리 위에서 쏟아지는 그의 눈길이 따가웠다.

“왜 막았지?”

그가 조용히 물었다. 페기는 잠시 입술을 물었다가 놓았다.

“하찮은 자입니다. 마귀를 베는 성검이라니, 가당치도 않아요.”

“다르지 않아. 똑같은 버러지일 뿐이다.”

그렇겠지. 저 잘난 눈에 버러지 아닌 사람이 존재하기나 할까.

“…어떻게 때를 맞춰 오셨는지 모르겠지만, 감사합니다. 막아 주셔서.”

페기는 최대한 건조하게 말하며 잡힌 팔을 빼내려 했다. 그러나 팔이 빠지지 않았다.

“전하?”

페기는 눈을 살짝 찌푸리며 고개를 들었다. 어둠에 가려진 그의 얼굴은 여전히 표정을 분간할 수 없었다. 상대는 볼 수 있고 자신은 볼 수 없는 이 상황이 점점 짜증스러워졌다.

“네가 돌아오지 않았다기에 왔다.”

“…네?”

“그러니까 나는….”

고민하듯 아랫입술을 살짝 매만지던 그가 곧 명쾌한 해답을 내놓았다.

“네가 걱정되었나 보군.”

페기는 멍하니 입술을 벌렸다. 그의 믿을 수 없는 발언은 끝나지 않았다.

“갑자기 네가 보고 싶어졌어.”

“…취하셨습니까?”

“마시지도 않았는데?”

“그런데 왜 이러세요?”

페기는 몹시 당황스러웠다. 그가 망가졌을 리 없으니, 그녀의 귀가 망가진 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당혹감을 달래 줄 생각이 없다는 듯 예후르는 말없이 그녀의 팔을 쓸기만 했다. 가만가만한 손길이 낯 뜨거웠다. 졸프소체 상단주가 남긴 손자국 위로 화상이라도 입을 것 같았다.

“널 전장으로 데려갈 것이다.”

“…….”

“다치지 마라.”

문득 내려앉는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이려던 페기가 멈칫했다. 얼굴 근육이 빳빳하게 굳으며 저도 모르게 빈정거리는 소리가 튀어나왔다.

“절 처음 보자마자 머리채를 잡으신 분이 하실 말씀은 아닌 줄로 압니다.”

“내 손에만 다쳐.”

“전하.”

“널 볼 때마다 아껴 주고 싶고, 네 목을 비틀어 주고 싶다. 아낌도 상처도 나만이 줄 수 있어. 넌 그저 모든 일이 끝날 때까지 얌전히 내 곁을 지키기만 하면 돼.”

말도 안 되는 억지였다. 그답지 않은 고집이고, 그녀가 아는 수사의 예후르는 할 수 없는 말이었다. 페기는 문득 눈앞의 남자가 몹시 낯설어졌다.

“…제가 싫다면요?”

“네게 감히 그런 말을 할 자유가 있던가?”

예후르가 부드럽게 그녀의 뺨을 어루만졌다. 묻는 말에는 묘한 웃음기마저 섞여 있었다. 페기는 주춤거리며 고개를 살짝 틀었다. 그의 손길이 닿을 때마다 수런거리는 속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가만히 뺨을 쓸던 그의 손끝에 문득 머리칼이 걸렸다. 천천히 거두어지는 그의 손길을 따라 머리칼이 길게 늘어졌다. 이상하게도 예후르는 조금 당황한 기색이었다. 보다 못한 페기가 눈치껏 자신의 머리칼을 잡아당겼다.

머리카락이 걸렸던 손을 잠시 멀뚱히 들여다보던 예후르가 아연하게 속삭였다.

“이제 보니 머리가 길군.”

페기는 코웃음을 치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았다. 거짓된 모습으로 그와 재회했을 때부터 머리칼은 이미 충분하게 길었다. 거의 매일같이 얼굴을 맞댔는데도 이제야 깨달았다니.

“원래 길었습니다.”

“마음에 안 들어.”

“네?”

“자르도록 해.”

울컥한 페기가 한마디 하려던 찰나, 예후르가 자연스럽게 그녀의 어깨를 끌어안으며 걸음을 옮겼다. 페기가 당황하여 뒤를 돌아보았다.

“아직 금고 확인을 못 했는데….”

“내일 다시 사람을 보내마.”

그의 나지막한 숨결이 정수리를 간질였다. 페기는 머리 위를 가리고픈 충동에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꼼지락꼼지락 그의 품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예후르는 도통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결국 포기한 페기가 지친 듯이 중얼거렸다.

“오늘 정말 이상하십니다.”

“나도 알아.”

그가 찡그리듯 웃었다.

“네가 이해해 다오.”

살짝 찌그러지는 그의 눈가에 어쩐지 피로와 슬픔이 한가득 매달린 듯했다. 페기는 머뭇머뭇 눈을 내리깔았다.

오늘의 그는 정말 이상했다. 그리고 그에 반응하는 자신 역시, 정말로 이상하다.

***

그날 밤, 본격적인 출정을 앞두고 주요 인사들이 모였다. 페기는 예후르의 보좌관 자격으로 회의장에 들었는데, 그곳에서 돌아왔다는 말만 들었던 막시모와 마주쳤다.

“하, 하하. 오랜만에 뵙습니다.”

이상하게도 막시모는 어색한 기색으로 눈을 피했다. 페기는 그가 돌아왔으니 보좌관에서 물러나야 하나 싶었는데, 예후르가 그런 그녀의 생각을 정정해 주었다.

“막시모에게는 따로 내려 둔 명령이 있다.”

“그럼요, 예….”

허허롭게 웃으며 뒤로 물러난 막시모가 콧잔등에 몰래 주름을 잡으며 무어라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내키지 않는 명령인 듯했다.

회의는 이리니 페임하른이 들어오며 시작되었다.

젊은 기사가 병력에 대한 보고를 올렸다. 속속들이 모인 방벽 수비대와 동부의 유력 귀족들이 거느리고 온 군사, 징병된 젊은이들, 고용된 바스토뉴의 용병대가 모여 총 병력은 일만을 훌쩍 넘겼다.

“바도비체 후작이 비상시에 가용할 수 있는 총 병력은 10만을 넘지만, 한 달 내로 그 병력을 모두 끌어모으기는 무립니다. 아마도 오스트라트 전진 기지에 상주하는 5천과 인근에서 급히 끌어모은 2만 정도가 최대겠지요.”

“병력에서 밀린다면 오스터캄프에서 농성을 벌이는 것이 어떻습니까?”

“가뜩이나 군량도 부족한데 몇 달, 몇 년이 갈지도 모를 농성을 펼치잔 말이오? 그사이 저 더러운 탐보프 놈들이 동부의 땅을 유린하고 다닐지도 모르는데?”

“그렇다고 허허벌판에서 싸울 순 없잖습니까?”

동부는 땅이 평탄하다. 소규모 병력이면 모를까, 일만 대군을 이끌고 지형적 이점을 삼을 만한 곳은 없었다.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군량이 간당간당합니다. 근처 곳간을 싹 털고 왔는데도 시원찮아요.”

“빌어먹을 놈들이 다 훔쳐 가서 그렇죠.”

“거, 다 아는 소리는 그만하고 해결 방안을 좀 내어 놓읍시다. 자칫 전쟁이 길어지기라도 하면 다 굶어 죽는 수가 있어요.”

“리누스 도시 연맹에서 사들이면 어떻겠습니까? 다는 충당 못 하더라도 얼마간 도움은 되지 않겠습니까?”

“그 장사치들이 가격을 얼마나 부를지 생각하니 벌써 뒷골이….”

“군자금은 최대한 아껴야 합니다. 무기는 어디 땅에서 나온답니까?”

“일단은 위스누아로 사자를 보내서 거래 의사를 타진하는 것이 좋지 않겠소? 선택할 수 있는 폭은 넓을수록 좋으니.”

“위스누아는 돕지 않을 것입니다.”

유려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가장 상석인 이리니 페임하른의 오른편에 앉은 예후르였다.

“전하. 왜 위스누아가 우릴 돕지 않으리라 말씀하십니까? 그 장사치들이야 돈이면 쓸개도 빼 줄 위인들인데….”

“내가 이곳에 있으니까요. 위스누아가 가장 공들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다들 잊은 모양입니다.”

그의 사근사근한 빈정거림에 모두가 낮은 침음을 흘렸다. 현재 위스누아를 지배하는 만포르차 가문은 가주의 둘째 여식인 알비야 공작 비올라를 교황으로 추대하기 위해 혈안이 된 상태였다.

“타고나길 영리한 장사치들이니 내게 조금이라도 득 될 일은 하지 않겠죠.”

“아니, 그럼 남쪽도 주시해야 한다는 겁니까?”

곳곳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리누스 연맹의 도시들은 바스토뉴의 용병대를 고용하여 일부 방비를 맡길 만큼 군사적으로는 열악한 나라이나, 동부를 괴롭히려 든다면 아주 골치가 아파질 상대였다. 수많은 상단을 거느린 그들의 돈줄은 마르지 않는 샘물이었기 때문이다.

자연스레 비관적인 분위기가 퍼졌다. 그럼 대체 부족한 군량은 어디서 구하고, 부족한 무기는 어디서 충당하며, 어찌 이 모든 것을 고려하지 않고 섣불리 거병했느냐는 불평 어린 속삭임들이 흘렀다.

그러자 예후르가 이리니에게 조용히 눈빛을 보냈다. 이리니는 고개를 작게 끄덕이며 서신 하나를 탁상에 올렸다.

“부족한 물자는 라발에서 지원해 줄 것이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