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9화 (119/328)

그의 염원을 담은 매는 드높은 상공을 거침없이 날았다. 황량한 들판과 얼어붙은 강물, 잡풀이 다 죽어 버린 구릉과 맥없이 움츠러든 산맥,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사는 시골 마을과 오랜 성벽이 버티어 선 도시, 수없이 갈래갈래 이어진 길들이 그 아래로 펼쳐졌다.

그럼에도 동쪽으로, 더욱 동쪽으로.

제국의 서부와 동부를 연결하는 아리페르트 가도 위로 마차와 짐수레와 일꾼들이 지렁이처럼 기어간다. 초목은 옅어지고 하늘은 낮아졌다. 동부를 견제하는 오스트라트 전진 기지 위로 탐보프를 상징하는 푸른 늑대 깃발이 휘날렸다. 날카로운 창검을 든 기사들은 경계하는 눈으로 동쪽을 주시한다.

이제 하늘 아래 펼쳐진 땅은 온통 굶주린 자들의 집이었다. 올 한 해 풍작을 거둔 농부들이 먹을 것이 없어 허덕이고, 북방에서 가장 풍요로운 땅 위로 아사한 시신이 끝없이 쌓였다. 부모 잃은 아이가 울고, 아이 잃은 부모가 통곡한다. 절망의 땅, 체념의 땅이여.

그리 동부 깊숙이 들어온 매가 미끄러지듯 하강했다. 몇 날 며칠 쉼 없이 날아온 매는 이제 지칠 대로 지쳤다. 허공에서 흐느적거리며 추락하는 매를 어느 부드러운 손길이 잡아 올렸다.

예후르는 경련하는 매를 품에 안고 다리에서 작은 쪽지를 꺼내 들었다. 길지 않은 쪽지에 시선이 오래 머물렀다. 이윽고 그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시작해라.”

그에 복면을 쓴 이들이 제각기 자취를 감추었다. 예후르는 달달 떠는 매를 자비롭게 쓰다듬으며 물끄러미 창밖을 내다보았다. 금방이라도 비를 퍼부을 듯 찡그린 하늘 아래, 곧 불길에 휩싸일 도시가 펼쳐져 있었다.

***

도미에 변경백은 퍼뜩 선잠에서 깨어났다. 눈에 띄게 줄어든 양초에서 촛불이 불안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어두운 허공을 멍하니 응시하던 그는 정신을 차리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탐보프의 동쪽 국경, 험준한 다그마르 산맥을 접한 알프도르트 방벽은 날이 어두워지면 고산에서 쓸려 내려오는 냉기에 휩싸이곤 했다. 한여름 밤에도 입김이 피어오르는 곳이니 계절의 구분은 무의미하다.

정북 방향의 엔케 강 상부에서 태어나 자란 그는 고향의 추위를 떠올리려다 말았다. 마지막으로 고향 땅을 밟은 지 어언 10년이 넘어가고 있었다. 고향이 멀게 느껴지고 타향이 가깝게 느껴진다는 것은 즉, 어느 하나 마음 붙일 곳이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는 두꺼운 망토를 걸치고 바깥으로 나왔다. 살갗을 가르는 칼바람이 옷 사이로 스며들었다. 저 멀리 초소에선 아슬아슬한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대장님.”

부관이 그를 알아보고 다가왔다. 종자도 없이 혈혈단신으로 임관한 그를 지난 몇 년 동안 충심으로 받쳐 준 부하였다.

“교대는?”

“제가 확인했습니다. 날이 찬데 이만 들어가십시오.”

변경백은 말없이 성벽 위로 걸음을 옮겼다. 부관이 잠자코 그의 뒤를 따랐다.

별도 뜨지 않은 어두운 밤이었다. 산바람에 이리저리 휘날리는 횃불은 벌레들만 꼬일 뿐이었다. 평소보다 어둡게 내린 오늘 같은 밤은 으레 방벽 앞에 버티어 선 고산을 더욱 위압적으로 느껴지게 했다.

변경백은 다가오는 빛을 모조리 삼켜 버린 듯 암암한 산을 조용히 올려다보았다. 경이로운 자연 앞에서 인간과 인간의 모든 피조물은 부질없게만 느껴졌다. 그는 산을 휘감은 정적에 가만히 귀 기울였다.

“오늘따라 더 조용하네요.”

부관이 속삭이듯 말했다. 그 역시 산을 응시하고 있었으나, 산의 고요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척후병에게선 연락이 없나?”

“며칠 전 받은 보고에선 크게 눈에 띄는 사항이 없었습니다. 저놈들 분명 식량이 바닥났을 텐데 이상할 정도로 움직임이 없습니다.”

변경백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는 아직 젊지만 전장에서의 경험은 누구 못지않았다. 그리고 경험상 적의 고요는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

“내일 날이 밝기 전에 척후병을 더 뽑아 보내도록 해라.”

“마침 지난달 후방으로 실려 갔었던 마크와 게일이 귀환했습니다. 그들을 보내도록 하죠.”

변경백은 고개를 끄덕이며 성벽 아래로 발길을 돌리려 했다. 그때, 갑자기 휙 돌아간 시선이 성벽 아래 깊숙이 꽂혔다.

“…왜 성문이 열려 있지?”

“예?”

부관이 멍청하게 반문했다. 섬뜩함이 등골을 타고 올랐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심해처럼 층층이 깔린 어둠 속에서 활짝 열린 성문이 바람결에 끼익, 끼익 흔들리고 있었다.

별안간 등 뒤에서 쾅! 폭발음이 울려 퍼졌다.

훅 끼쳐 오는 돌풍에 휘청거렸던 변경백이 바람을 헤치며 뒤를 돌아보았다. 무기고에서 불길이 치솟고 있었다. 동시에 발아래가 진동하며 야만족들의 고함 소리가 암암한 사방에서 몰아치기 시작했다.

변경백이 다급히 외쳤다.

“종을 울려라! 적습이다!”

***

“또 오르골리오 상단이야?”

오스터캄프의 성문 문지기가 불쾌한 기색으로 혀를 찼다. 막시모가 민망한 듯이 머리를 긁었다.

“좀 봐주십시오. 저희야 그냥 윗선의 말씀을 따를 뿐인걸요.”

“아무리 그래도 정도가 지나치잖아. 저번에 하인들까지 대거 들어왔던 게 열흘이 채 되지도 않았는데, 어이구, 이번엔 더 많아.”

하인들의 수를 대강 헤아리던 문지기가 그들의 우락부락한 인상을 보고 몰래 흉을 봤다.

“어디서 깡패처럼 생긴 놈들만 데려와선….”

“원래 이렇게 생긴 놈들이 일도 잘합니다. 번질번질한 놈들 데려다 놨다가 그 뒷수습하느라 골치 아팠던 게 한두 번이어야 말이죠.”

“하긴. 얼굴값 한다는 말이 괜히 있나?”

문지기가 내키지 않는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짐수레를 흘끗 보았다.

“일단 그것들부터 좀 열어 봐. 뭘 또 그렇게 바리바리 싸 들고 왔는지 확인해야 하니까.”

“저희가 뭘 가져왔겠습니까. 다 남쪽의 와인이죠.”

“아는데, 절차상 내 눈으로 확인은 해 봐야 하니까… 이게 뭐 하는 짓이야?”

막시모는 묘한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문지기는 짐짓 불쾌하단 기색으로 주머니를 돌려주었다.

“나 이제 이런 거 안 받기로 했어. 북쪽 성문 문지기 알지? 그놈이 글쎄 뇌물 받은 걸 들켜서 쫓겨났지 뭐야. 난 그렇게 되기 싫어.”

“이건 뇌물이 아니라 사소한 성의입니다. 아무렴, 사도이신 엘피도 공작 전하의 금고에서 나오는 깨끗한 돈인 것을요.”

“…사도의 금고에서 나오면 다 깨끗해지나?”

“당연한 말씀을. 게다가 제가 뒤가 구려서 이런 걸 드리는 게 아니라, 저희 공작 전하께서 워낙 시간 엄수를 중요하게 여기셔서 그렇습니다. 안 그래도 늦었거든요, 지금. 더 늦었다간 제 이 목, 이 목이 성검에 뎅겅 잘릴지도 모릅니다.”

막시모가 목을 빼어 손가락질했다. 거북한 기색으로 고개를 뒤로 물린 문지기가 헛기침했다.

“좋아. 대신 이번만이야. 다음번엔 국물도 없어.”

“알겠습니다. 다음번엔 더 좋은 것으로 마련해 드리죠.”

“어허, 이 사람이!”

화난 목소리와 달리, 문지기는 싱글벙글 웃는 얼굴로 막시모 일행의 입성을 허가했다. 짐수레가 느릿느릿 굴러가기 시작했다. 귀머거리처럼 멀뚱히 서 있던 하인들이 은근슬쩍 막시모의 뒤로 달라붙었다.

“어이, 장사치 양반. 이제 시작하면 되나?”

“멍청아. 여섯 번째 짐수레까지 성문을 넘으면 그때 움직이라고 했잖아.”

“여섯 번째가 아니라 다섯 번째 아니야?”

“난 일곱 번째로 아는데?”

막시모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디 보자… 지금 세 번째 짐수레까지 들어왔네.”

“그냥 지금 하면 안 돼?”

“아, 일곱 번째까진 기다리라고!”

“일곱 번째가 아니라 여섯 번째야, 병신아!”

언성이 높아지자 이쪽을 힐끔거리는 시선이 늘어났다. 막시모는 주름진 미간을 꾹꾹 누르며 뒤를 돌아보았다.

“목소리 죽이라고 신신당부했잖습니까. 댁들 억양이 독특해서 금방 들킬 거라고….”

막시모의 말이 우뚝 멈추었다. 이쪽을 주시하던 병사 하나와 눈이 마주쳤다. 갓 입대한 듯 여드름 난 얼굴이 허옇게 질려 있었다. 그가 한 발짝 뒤로 물러나자, 어찌할 도리 없이 한숨이 새어 나왔다.

“…시작해요.”

“뭐? 진짜?”

두 눈을 끔벅끔벅하던 사내가 금세 헤벌쭉 웃었다. 그러곤 가까운 짐수레로 팔을 쑥 집어넣더니, 곧장 단검을 뽑아 멀리 달아나던 병사의 뒷머리로 날렸다.

머리에 단검이 꽂힌 병사가 피를 죽죽 쏟아 내며 허물어졌다. 사내가 상쾌한 얼굴로 외쳤다.

“시작하라신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하인들이 짐수레에서 무기를 꺼내 들기 시작했다. 무료하게 성문을 지키던 병사들의 목이 순식간에 날아갔다. 평화롭던 성문이 단숨에 피 냄새로 물들며 곳곳에서 비명이 솟구쳤다.

그런 난장판을 뒤로한 채 막시모는 후련하게 중얼거렸다.

“징그러운 놈들. 드디어 네놈들이랑 이별이다.”

가모브 총독은 미친 듯이 금고를 뒤졌다. 시간이 없었다. 빨리 기밀 서류를 찾아 이곳을 떠야만 했다.

“젠장….”

총독은 식은땀을 닦으며 욕지거리를 뇌까렸다. 도대체 일이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분명 평소 같은 아침이었다. 느긋하게 아침 식사를 하던 중 성문 쪽에서 소요가 벌어졌단 보고를 들었으나, 요사이 심심찮게 일어나는 폭동이겠거니 여겼다. 본토에서 정식 훈련을 받은 치안대가 그깟 정체도 모를 놈들에게 무너질 리가….

정신없이 금고를 헤집던 손끝으로 그토록 찾던 서류가 걸렸다. 겨우 한시름 놓은 총독이 서류를 구겨 쥐는 순간이었다.

문이 활짝 열렸다.

“각하! 피하셔야 합니다! 지금 페임하른 공작이….”

푹, 싸늘한 칼날이 부관의 심장을 관통했다. 핏물이 주르르 쏟아지며 검이 뽑혔다. 고꾸라지는 부관의 시체 너머로 이리니 페임하른이 우뚝 서 있었다.

그녀는 핏물이 묻은 검을 느리게 털어 내며 시체를 넘어 총독의 집무실 안으로 들었다. 단단한 군홧발 뒤로 피 묻은 발자국이 시뻘겋게 남았다. 큰 키에 근육질 몸, 검은 갑옷을 온통 피 칠갑한 그녀는 지옥에서 올라온 마귀처럼 보였다.

“페, 페임하른 공작….”

총독이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했다.

“이, 일단 진정하십시오. 이러는 게 능사가 아닙니다. 현명하게 처신하셔야지요!”

“…….”

“이, 이미 오스트라트 전진 기지로 급보를 날렸습니다! 머잖아 바도비체 후작이 군대를 이끌고 당신을 짓밟으러 올 거요! 그 머리로 생각이란 걸 할 수 있다면 이런 멍청한 짓은 저지르지 않았을 텐데! 감히 그대를 살려 준 황제 폐하의 은혜도 못 알아보고….”

다가오는 이리니 페임하른의 발걸음이 멈추지 않았다. 뒷걸음질 끝에 창가에 닿은 총독이 황망히 말을 잇지 못하다가, 돌연 서류를 구겨 입 안으로 쑤셔넣었다.

칼날이 깔끔하게 총독의 목을 베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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