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8화 (118/328)

차라는 짐마차 안으로 들어가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온몸을 구기고 있던 알리오나가 파리한 낯을 들어 올렸다. 차라는 말없이 그녀의 어깨를 잡고 부축해 주었다. 겁먹은 발걸음이 한 발, 한 발, 볕 아래로 나아갔다.

복면의 사내와 시시덕거리던 요슈아가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요, 요슈아! 와서 같이 부축 좀….”

쓰러질 듯 휘청거리는 알리오나를 황급히 붙들어 주던 차라가 순간 할 말을 잊었다.

요슈아의 얼굴이 얼음처럼 차갑게 굳어 있었다.

차라가 말을 잇지 못하는 사이, 요슈아가 성큼성큼 다가와 알리오나의 팔을 홱 잡아챘다. 알리오나는 식은땀을 비처럼 흘리며 간신히 눈을 떴다.

“얘 뭐야.”

요슈아가 한 글자, 한 글자 씹어뱉듯 말했다. 차라는 저도 모르게 그의 시선을 피했다.

“…일단 약부터 먹이자. 상태가 너무 안 좋아 보여.”

“지랄하네.”

요슈아가 거칠게 알리오나를 차라의 품으로 밀었다.

“너 잠깐 나 좀 봐.”

차라는 얼결에 안게 된 알리오나의 옷깃을 꽉 잡아 쥐며 요슈아의 길쭉한 뒷모습을 응시했다. 그는 흐느적거리는 알리오나를 짐마차에 앉힌 뒤, 애써 웃어 보였다.

“…여기서 조금만 기다려. 금방 올게.”

알리오나는 힘겹게 눈꺼풀만 팔락였다. 차라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애써 옮겼다. 요슈아는 버려진 성터에서 우두커니 이마를 감싸 쥐고 있었다.

“너 제정신이야? 여기가 어딘 줄 알고 쟬 데려와?”

차라의 발소리가 가까워지기 무섭게 요슈아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앞으로 어쩌게? 지금쯤 쟤 사라진 거 황궁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 텐데, 그냥 바람 좀 쐬어 주고 싶어서 데리고 나왔다고 말하려고?”

“네가 데려가.”

“미쳤냐?”

요슈아의 얼굴이 왈칵 일그러졌다. 차라는 지지 않고 그를 마주 보았다.

“네가 사라지면 알리오나는 얼굴도 모르는 사람이랑 결혼해서 죽을 때까지 거기 갇혀 살아야 한대. 가족이잖아. 불쌍하지도 않아?”

“불쌍하면 다야? 앞으로 가야 할 길이 첩첩산중인데 병자를 어떻게 데리고 가!”

“끝까지 데리고 가라는 게 아니잖아! 중간에 굴리엘모 수도원까지만 데려다줘. 알리오나도 끝까지 황제의 추격을 피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은 안 해. 그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아버지 얼굴을 보고 싶다고….”

요슈아가 싸늘하게 조소했다.

“너 쟤 좋아해?”

“뭐? 뜬금없이 무슨 소리야?”

“좋아하는 것도 아닌데 쟤 일에 왜 그렇게 열성을 들여? 막말로 너랑 쟤가 무슨 사인데? 고작 며칠 전에 만난 사이 아니야?”

차라는 떨리는 목구멍을 꽉 죄었다.

“그래. 난 알리오나를 잘 몰라. 그런데 저 애의 마음은 잘 알겠어.”

영영 헤어져 버린 가족을 그리는 마음이 얼마나 애달픈지, 그는 누구보다 잘 안다. 타의로 고향을 떠났을 때 그러했고, 겨우 마음 붙인 가족이 죽어 사라졌을 때도 그랬다.

“웃기시네. 몇 년을 본 나도 쟤가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는데, 네가 어떻게 쟤 마음을 알아?”

“너처럼 잘난 애는 모르겠지.”

“어, 그래. 말 한번 잘했다. 나는 잘나서 여기 붙었다, 저기 붙었다, 내 맘대로 살아도 돼. 그런데 쟤는? 평생 궁전에서 갇혀 산 공주님이 뭘 할 줄 아는데? 짐밖에 더 되냐고.”

“…….”

“너도 마찬가지야. 네가 뭐가 잘났다고 나한테 짐을 떠맡겨? 착각하지 마. 실질적으로 날 돕는 건 네가 아니라 엘피도 공작이야. 네 같잖은 명령, 들어줘야 하는 의무 없다고.”

요슈아가 검지로 차라의 가슴팍을 쿡쿡 찔렀다. 마치 심장이 관통당하는 느낌이었다.

“…나도 알아.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거.”

쇠퇴하던 교국을 부흥시킨 레오폴트. 범접할 수 없는 권능을 지닌 예후르. 홀로 방랑하는 안드레아.

모두들 자신의 힘으로 자신의 생을 일구어 나가고 있었다. 재수 없는 비올라조차 권력을 틀어쥔 능력만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무너진 사람을 일으켜 세우는 것은 그들이 아니었다. 잘난 사람들은 얼핏 평범해 보이는 일에 무너지는 사람을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가 겪는 참담함을 그들은 모른다.

어린 나이에 외딴곳으로 떨어진 그를 위로하고 보듬어 준 것 역시 그들이 아니었다.

차라는 지금도 힘들 때마다 저를 벨렘성으로 데려다주었던 페기의 따스한 손길을 떠올렸다.

“알리오나를 데려가라고 명령하는 것도 아니야. 내가 뭐라고 너한테 감히 그런 명령을 하겠어. 그저 데려가 달라는 부탁이야. 넌 그럴 만한 능력이 되니까. 죽음이 멀지 않은 가여운 애를 조금만 도와 달라는….”

더듬더듬 말을 잇는데, 가냘픈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다급히 유적지 밖으로 뛰쳐나가려던 차라를 요슈아가 붙잡아 커다란 바위 뒤로 질질 끌고 갔다. 바위 밖으로 고개를 살짝 빼자, 탐보프의 갑옷을 입은 기사 두 명이 알리오나를 옭아매는 모습이 보였다.

“이거 놔, 놓으라고!”

알리오나가 시퍼레진 얼굴로 반항했다. 요슈아는 싸늘한 눈으로 사방을 훑었다.

“아직 본대가 돌아오진 않았어. 그나마 다행이네.”

갈팡질팡하던 차라는 근처 바위 뒤에서 몸을 숨기고 있던 복면의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명령을 기다리는 맹견처럼 온순한 눈빛이었다. 차라가 입을 열려는 순간, 요슈아가 차갑게 말을 내뱉었다.

“하지 마.”

“…….”

“잔인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알리오나 입장에선 차라리 지금 붙잡혀 가는 게 나아. 앞으로 매일같이 추격자들이 들끓을 텐데 쟤가 그 험난한 길을 어떻게 버티겠어? 난 쟤 보호 못 해. 내가 살 수만 있다면 추격자들한테 쟬 먹이로 던져 줄 거야.”

거짓을 말하는 눈이 아니었다.

물끄러미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던 차라가 그의 허리춤에서 검집째 검을 가져갔다. 요슈아의 미간이 왈칵 좁혀 들었다.

“내 말 이해 못 해? 얼마 남지 않은 삶이나마 편하게 살게 해 주라고. 내가 데려갔다간 쟤 죽을지도 몰라.”

“그건 너도 마찬가지잖아.”

“…….”

“죽음을 각오하고 떠나는 거잖아. 여기서 이렇게 살고 싶진 않으니까.”

차라는 검을 들고 바위 밖으로 나갔다.

저항하는 알리오나의 사지를 묶던 기사들이 인기척에 뒤를 돌아보았다. ‘도련님?’ 하고 부르는 얼굴에 의아함이 깃들었다. 차라는 검집에서 검을 빼내려 했으나 쉽지 않았다.

“…뭐 하십니까?”

기사가 실소했다. 차라는 벌게진 얼굴로 낑낑 힘을 썼다. 어처구니없다는 듯 시선을 주고받은 기사들이 설렁설렁 다가왔다.

“도련님. 그렇게 위험한 물건은 저희에게 넘겨주십시오. 다치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차라는 이를 꽉 깨물며 온 힘을 다해 검을 뽑아 들었다. 황급히 검의 그립을 붙잡고 기사들을 향해 겨누어 보지만, 그들은 어린애 달래듯 양손을 들어 올리며 워워 소리를 낼 뿐이었다.

“침착, 침착하십시오.”

기사들이 느긋하게 다가왔다. 도리어 검을 가진 차라가 멈칫멈칫 물러났다. 요슈아는 한 손으로도 잘만 휘둘렀던 검이 양손으로도 버거웠다.

초조해진 그는 팔을 후들후들 떨며 짐마차 구석에 내동댕이쳐진 알리오나를 곁눈질했다. 생기 없는 연옥색 눈이 느리게 껌벅였다. 어찌할 길 없이 가면 속 레오폴트의 죽어 가던 녹안이 떠올랐다. 속 안에서 응어리진 무언가 울컥 치솟았다.

“…오지 마.”

기사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차라는 힘겹게 검을 들어 제 목에 갖다 댔다.

“한 발짝만 더 다가오면 그어 버릴 거야.”

기사들이 발을 멈추었다. 여유롭기 그지없던 얼굴이 쩡하니 굳었다.

“도, 도련님.”

“교황 성하가 날 얼마나 아끼시는 줄 알아? 페기가 죽은 뒤로, 그 사람은 나까지 어떻게 될까 봐 매일을 노심초사하며 지내.”

“…….”

“성하만 그런 줄 알아? 안드레아는? 너희도 망나니 사도 들어서 알지? 그 사람도 꼬박꼬박 나한테 편지해. 내가 잘못되면 너희 목부터 따려고 들걸?”

차라는 달뜬 숨을 뱉어 냈다.

“그리고 엘피도 공작도 있지.”

“…….”

“뱀을 죽인 성검이 궁금하면 어디 한번 계속 다가와 봐. 곧 보게 될 테니까.”

기사들의 발걸음이 조금씩 물러났다. 차라가 추상같은 얼굴로 외쳤다.

“꺼져!”

멈칫, 뒤돌아서던 기사들의 시선이 알리오나를 향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차라가 다시 악을 질렀다.

“빨리 꺼지라고! 내 말 안 들려?!”

고함 소리에 불붙은 듯 기사들이 황급히 줄행랑쳤다. 차라는 그대로 검을 떨어트리고 짐마차로 달려갔다. 알리오나는 거의 실신한 상태였다. 식은땀이 흐르는 피부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잘하는 짓이다.”

저벅저벅 다가오던 요슈아가 떨어진 검을 주워 허리춤에 꽂았다.

“이제 어떡할 거야? 쟨 내가 데려간다 치더라도, 넌 황녀의 도주를 방조한 죄를 피하지 못할 텐데.”

“나도 갈 거야.”

차라는 외투를 벗어 알리오나의 고개 뒤에 받쳐 주었다. 요슈아가 눈살을 찡그렸다.

“뭐?”

“너 못 믿겠어. 네 말대로, 넌 혼자 살겠다고 알리오나를 추격대의 먹이로 던져 줄 놈이니까.”

“그래서 네가 알리오나를 지켜 주겠다고? 검도 제대로 못 들면서 무슨…! 야, 난 너희 둘 다 못 지켜 줘!”

“걱정 마. 너한테 부탁 안 해.”

차라는 복면 쓴 사내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기척 없이 다가온 그가 차라의 발치에 한쪽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엘피도 공작 전하께서 막내 도련님은 영특하니 늘 옳은 선택을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

“명을 내려 주십시오. 따르겠습니다.”

“말도 안 돼….”

중얼거린 요슈아가 영혼이 빠져나간 듯한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차라는 시큰거리는 팔목을 감싸며 눈을 질끈 내리감았다. 불어오는 바람에 넘어질 듯 몸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마차는 쉼 없이 달렸다.

덜컹거리는 마차 안에서 알리오나는 끙끙 앓았다. 요슈아는 불안할 정도로 고요한 들판을 초조하게 내다보았고, 차라는 미리 준비된 매의 다리에 편지를 끼우며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곧장 예후르에게 가 줘.”

“…….”

“부탁이야. 최대한 빨리.”

까만 눈으로 그를 응시하던 매가 이내 창밖으로 높이 날아올랐다. 동쪽으로 날아가는 매를 한없이 바라보던 차라가 파들파들 떨리는 손을 깍지 끼며 조심스레 이마를 받쳤다.

제발 모두가 무사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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