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6화 (116/328)

날이 밝기 무섭게 별궁을 찾아온 차라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밤새 무슨 일 있었어? 안색이 파리해.”

알리오나는 어렵사리 웃으며 자신은 늘 파리하다고 대꾸했다. 차라는 여전히 미심쩍어하는 기색이었으나, 그녀의 오랜 지병을 알아 무던히 넘겼다.

“나 내일은 못 올 거야. 요슈아랑 지그룬 유적을 구경하러 가기로 했거든.”

차라는 늘 그렇듯 일상적인 얘기를 조잘거리기 시작했다. 별궁에 갇혀 사는 알리오나가 바깥세상을 궁금해했기 때문이다. 평소라면 귀를 쫑긋 세우며 들었을 테지만, 오늘의 알리오나는 긴장감에 사로잡혀 그의 말을 거의 알아듣지 못했다.

“…그런데 요슈아가 자기는 한 번도 지그룬 유적을 안 가 봤다는 거야. 여기서 엄청 가까운데….”

“사도님.”

“어?”

알리오나는 말없이 왼손을 내밀었다. 뿌리까지 싹둑 잘려 나간 약지의 빈자리를 보고 차라가 조금 어색하게 눈을 피했다. 알리오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황제 폐하께서 이렇게 만드신 거예요.”

차라의 얼굴에서 표정이 싹 사라졌다.

“제 위로 오빠 둘이 있었다는 건 아시죠? 그 둘도 어머니가 죽이셨어요.”

“그게…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황제 폐하께서 왜….”

“흉한 병을 타고났으니까요.”

탐보프의 발데마르 황가는 수백 년 가까이 근친혼을 자행했던 가문.

순수한 혈통을 유지하기 위한 노력은 가문의 오랜 내력을 함께 꽃피웠다. 처음에는 크게 문제될 것이 없었으나, 건강하지 못한 세대가 태어나고 그 아래로 또다시 건강하지 못한 세대가 태어나며 치명적인 독이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바로 유전병이었다.

“병에 걸려서 죽였다고? 무슨 헛소리야! 병에 걸렸으면 치료를 해 줘야지!”

“치료해서 살아날 수 있느냐 없느냐는 어머니께 중요하지 않아요. 병에 걸렸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하지.”

“…….”

“아시죠? 교황 성하의 병.”

차라가 멈칫 굳었다.

“살이 썩어 드는 병이라 들었어요. 다행히 축복받은 사도이시기에 다른 사람들처럼 요절하진 않으셨지만, 교황 성하의 그 끔찍한 병이 발데마르 황가의 저주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아요. 죽은 오라비들과 제 꼴을 보면 그 의심이 완전히 틀렸다고 보기도 어려울 것 같네요.”

입술을 꾹 깨문 알리오나가 손등까지 덮어 가리던 소매를 홱 끌어 올렸다. 훤히 드러나는 앙상한 팔엔 울긋불긋한 멍자국이 가득했다.

충격받은 차라의 얼굴을 보고 알리오나가 가늘게 웃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맞은 건 아니니까.”

“…….”

“이게 제 병이에요. 부딪히지 않아도 자주 멍이 생기고 피멍이 올라와요. 가장 끔찍한 건 피가 그치지 않는단 거죠. 선천적으로 지혈이 어려운 병이래요.”

당연히 약은 없었다. 의사들은 그저 몸을 조심하시라, 다치지 마시라 신신당부할 뿐이었다.

“전 교황 성하처럼 축복받은 사람이 아니기에 앞으로 10년을 버티지 못하고 죽을 거예요. 하지만 이 역시 황제 폐하께서 제 손가락을 자르고 오라비들을 죽이신 것과는 무관해요. 폐하께선 어린 자식들의 앞날이 가여워 고통 없이 보내 주려는, 그런 자비로운 분이 아니니까.”

발데마르 황가의 영광으로 태어났으나 끔찍한 병에 걸린 교황 레오폴트.

그리고 줄줄이 유전병을 안고 태어난 세 아이들.

“폐하께선 더 이상 황가에 오점을 남기고 싶어 하지 않으세요. 최초로 북방을 통일한 아리페르트 6세의 후손들은 완벽해야 하며, 우리 발데마르 황가는 영원토록 영광되어야 하므로.”

갓 북방을 통일했을 당시, 아리페르트 6세와 발데마르 황가를 보는 시선은 그리 곱지 못했다. 그에게 굴복당한 북방의 수많은 가문들은 저들이 자신과 다를 것이 무에 있냐며 이를 갈았고, 번영한 남방의 국가들은 그래 봤자 북방의 야만족들이라 손가락질했다.

그러나 사도 레오폴트의 탄생으로 모든 것이 바뀌었다.

북방의 미개한 지배자였던 아리페르트 6세는 순식간에 사도의 어버이가 되었다. 발데마르 황가는 북방의 수많은 가문들 위로 우뚝 올라섰으며, 남쪽의 국가들도 더 이상 그들을 무시하지 못했다.

벼락 맞은 듯한 행운으로 격상된 황실을 지키는 것은 이제 빌헬미나의 몫이었다. 아리페르트 6세의 위대한 과업을 물려받은 그녀는 탐보프와 발데마르 황가에 온 인생을 내걸었다. 자신이 배 아파 낳은 자식들이 감히 황실의 가치를 격하시키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었다.

“그래서 아이들을 죽였다고…?”

“아버지는 반대하셨다고 해요. 당연한 일이죠. 아내가 자식을 죽이려는 걸 누가 반기겠어요. 그럼에도 충성을 바친 주군을, 사랑하는 아내의 뜻을 거스르지 못하셨지만 저마저 병세가 나타나자 더 이상 참지 못하셨어요.”

“…….”

“은밀히 반란을 일으킬 준비를 하셨죠.”

그리고 반란의 선봉장이었던 뉘벨 공이 계획한 차기 황제는 다름 아닌 알리오나였다.

“이제는 얼굴조차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 아버지이지만, 전 그분을 원망하지 않아요. 비록 아버지의 계획이 실패하여 이렇게 갇히게 되었지만, 지금껏 절 살리기 위해 목숨을 걸었던 사람은 아버지가 유일하니까요.”

“…그 이후로 아버지는 한 번도 못 본 거야?”

“네. 자비로우신 황제 폐하께선 역심을 품은 남편을 용서하여 먼 수도원에 가두셨지요. 또한 다시는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저를 황위에 오를 수 없는 몸으로 만드셨고요.”

알리오나는 무표정한 얼굴로 사라진 약지의 자리를 매만졌다. 그녀는 여전히 잘린 약지에서 환지통을 느꼈다. 신기루 같은 고통으로 그날의 비극과 어머니를 향한 원망을 되새겨 왔다.

“제 오라비들은 무참히 죽이셨던 분이 저는 왜 살려 두셨을까요?”

“…….”

“황실의 가치를 깎아 먹는다는 점에서 저는 죽은 오라비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아요. 그럼에도 절 살려 두신 건 제가 어머니의 마지막 보루이기 때문이에요.”

북방의 오랜 관습에 따라 신체의 결격이 있는 자는 황위에 오르지 못한다. 그러나 배우자와 자식에겐 황위를 잇는 교두보가 되어 줄 수 있었다.

“요슈아가 사라지면 전 황제 폐하의 뜻에 따라 결혼하게 될 거예요.”

그리고 이 지옥 같은 황궁에서 쓸쓸히 말라 죽겠지.

“사도님… 저는 그러고 싶지 않아요. 더는, 더 이상은 못 하겠어요. 폐하께 짓눌려 이런 곳에 갇혀 사는 건 지난 스무 해로 충분하잖아요.”

알리오나는 그렁그렁한 눈을 들어 올렸다.

날 동정하세요.

날 불쌍히 여기세요.

외딴 별궁에 갇힌 내가 가엾어 매일같이 찾아오던 당신이라면, 날 외면하지 않을 거잖아요.

“제발 도와주세요.”

차라의 표정이 흔들렸다.

알리오나는 그제야 안도의 눈물을 떨구었다.

***

이튿날, 차라가 머무는 궁전은 새벽부터 몹시 분주했다. 지그룬 유적은 마차를 타고 약 반나절 가량 떨어진 가까운 곳이지만, 귀한 분께서 움직이시는 데는 마땅히 준비가 필요한 법이었다.

호위대로는 교국에서 함께 온 장미 기사단 일부와 탐보프의 근위대가 따라붙기로 했다. 사절단이 머무르는 동안 차라를 잘 보필하란 황제의 명을 받은 요슈아 역시 동행할 예정이었다.

흐흥, 아침 일찍 일어난 차라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가볍게 뛸 듯이 계단을 내려갔다. 뒤에서 하녀들이 물가에 내놓은 어린애 보듯 불안한 표정을 했지만, 차라는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기분이 최고조였다.

그러나 건물을 나오는 순간, 찬물을 맞은 듯 가라앉았다.

대기 중인 마차 앞에서 아주 낯익은 여자가 요슈아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어, 사도님! 여기!”

차라를 발견한 요슈아가 손을 번쩍 들었다. 차라는 소태 씹는 얼굴로 뭉그적뭉그적 다가갔다.

“표정이 왜 그래? 어젯밤에 설레서 잘 못 잤구나?”

“아니야….”

“아니긴. 아, 여기는 바도비체 후작의 따님.”

세도파가 화사하게 웃었다.

“오랜만에 뵈어요. 차라 도련님.”

“네에, 뭐….”

“둘이 아는 사이야?”

“제 약혼자가 누군지 잊으셨나 봐요, 전하.”

곰곰이 기억을 더듬던 요슈아가 곧 작은 탄성을 질렀다. 깜빡 잊었다는 둥, 서운하다는 둥 화기애애한 대화가 오갔다.

그 사이에서 혼자 시큰둥한 차라는 괜스레 돌멩이만 툭툭 차며 남몰래 세도파를 훔쳐보았다.

벌꿀처럼 달콤한 금발을 늘어트린 저 아리따운 아가씨가 그는 참으로 불편했다. 저와는 맞지 않는 사람이라 단정 짓기엔 말 한마디 제대로 나눠 본 기억이 없으니, 이는 모두 예후르의 탓이리라.

“그 여자랑 결혼할 거야?”

그러니까, 페기가 죽은 뒤로 실종되었던 예후르가 다시 나타나 성궁에서 지내던 때였다. 어딘가 불안정해 보이고 툭하면 레오폴트와 언쟁을 벌이던 그였지만, 차라에게만은 여전히 상냥했었다. 사실 레오폴트도, 안드레아도 그에게만은 꽤 다정했다.

하지만 상냥하고 다정하다고 모든 것을 알려 주는 건 아니었다. 기실 그들 모두 그에게는 알려 주는 것이 없었다. 그때마다 차라는 ‘어리고 순진하며 아는 것 없는 막내 사도’란 자신의 위치를 절감했다. 그는 결코 다른 사도들과 동등할 수 없었다.

“그 여자 또 왔어. 널 보러 온 거잖아.”

당시 예후르는 사방에서 결혼 압박을 받고 있었다. 하루빨리 그에게 줄을 대려는 탐보프는 물론이요, 페기의 죽음 이후로 방황하는 그가 속히 가정을 이루어 자립하길 바라는 레오폴트의 숙원이기도 했다.

“제대로 만나 주지도 않아, 그러면서 파혼한단 말도 없어. 대체 왜 그러는 거야? 저 여자가 너한테 뭐 잘못했어?”

“…….”

“페기 때문에 그래? 난 행복할 자격이 없다, 이런 거야?”

탐보프에서 성도까지, 짧지 않은 거리를 왕복하며 세도파는 예후르에게 매달리고 또 매달렸다. 열리지 않는 문 앞을 반나절 넘게 지키고, 굵은 소나기를 맞으며 그를 기다렸다.

그럼에도 예후르는 그녀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럼에도 세도파는 그를 포기하지 않았다.

“너 진짜 이상해.”

대체 사랑이 뭐길래.

차라는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세도파를 보았다. 예후르가 지금 동부에서 반란을 준비하고 있다는 걸 알면, 그때도 저렇듯 밝게 웃을 수 있을까?

그때도 저 위대한 사랑이 영원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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