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종의 안내를 받아 들어간 곳은 황제의 접견실이었다. 높은 천장에 매달린 채광창에서 눈부신 햇살이 쏟아져 내려와 마치 봄날처럼 따스한 공기가 맴돌았다. 이 방을 제작하기 위해 황제는 억만금을 들여 라발의 기술자들을 유치해 들였다.
“폐하.”
바도비체 후작이 기사답게 인사를 올렸다. 그림처럼 상석에 앉아 찻잔을 기울이던 빌헬미나가 천천히 입술을 뗐다.
“동부는?”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이제는 오스터캄프 뿐만 아니라 셀비어크, 토랄 같은 도시에서도 연이어 폭동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빌헬미나는 말없이 찻잔에 입술을 붙였다. 바도비체 후작이 못내 초조한 기색으로 말을 이었다.
“페임하른 공작의 움직임도 수상합니다. 오래전 연락이 끊겼던 가신들에게 사람을 보내 안부를 묻고 있다더군요. 생활이 고된 이들에겐 금전적으로 지원까지 해 준다는데, 페임하른 공작에게 어디 그럴 만한 돈이 있습니까?”
이리니 페임하른은 빌헬미나 3세에게 패배한 뒤 봉토와 가산을 몰수당했다. 그녀에게 남은 것이라곤 낡아 빠진 옛 왕성과 그 성을 지키기도 모자란 수의 기사단뿐이었다.
“총독부에서 지급하는 연금으론 기사단을 운영하기도 빠듯할 겁니다. 십중팔구 엘피도 공작이 도움을 주고 있겠지요.”
“가모브 총독이 엘피도 공작의 뜻을 전하지 않았소.”
“이젠 그것도 믿을 수 없습니다. 동부가 이렇게 들끓게 된 계기가 바로 파르나 수도사의 화형식에서 벌어진 기이한 이적 때문이 아닙니까? 혹 엘피도 공작이 뒤에서 간악한 수를 부렸을지 누가 압니까?”
“간악한 수? 설마 엘피도 공작이 수도사의 죽음을 기려 하늘에서 빛이라도 내렸단 말이오?”
빌헬미나가 가늘게 웃었다.
“후작은 진정 그것이 가능하리라 믿소?”
바도비체 후작이 망연히 입을 닫아걸었다. 빌헬미나는 코웃음을 치며 우아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십수 년 전, 그녀는 성도 오스피나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동부의 반란을 진압하여 유일무이한 황위 계승자의 자리를 굳힌 시기였다. 탐보프는 아리페르트 6세 때부터 교황에게 손수 황제의 관을 수여받는 신성 제국으로 발돋움했고, 이에 빌헬미나도 부황의 뒤를 이어 그 영광을 누리고자 했다.
그곳에서 그녀는 어린 사도를 만났다.
당시의 그는 갓 열 살을 넘긴 어린아이였다. 사막에서 왔다는 소문대로 그을린 피부와 이국적인 외모가 인상 깊었으나, 그 나이대답지 않은 현명함과 조숙함이 유독 기억에 오래 남았다. 빌헬미나는 장차 그가 강력한 교황이 되리라 여겼다.
그러나 강력한 사도로는 생각하지 않았다.
이미 오래전 신성함이 사라진 시대였다. 한때 산을 가르고 들을 뒤덮었다던 뱀의 마귀 군단조차 이제는 낡은 연회장 하나 간신히 집어삼켰을 뿐이다. 부활한 뱀은 미력했고, 그 뱀을 죽인 사도 역시 대단치 못했다.
“죽어 가던 수도사에게 한 줌의 햇빛이 내려온 것은 그저 불운한 우연일 뿐이오. 하지만 우연을 이용해 거병을 꾀한다면, 그것은 진정 어리석은 짓이지.”
수사의 예후르는 3년 전부터 이해할 수 없는 행보를 보였다. 교황과 척을 지고 만인이 보는 앞에서 행패를 부리며 당연시되던 차기 교황으로서의 자리를 스스로 무너트렸다. 고통받는 자들을 구하기 위해 동부로 왔다던 총독의 보고 역시 미덥지 못했다.
그럼에도 적으로 돌아선다면 꽤나 골치 아플 것이다.
사도로서의 권능 때문이 아닌, 뱀을 죽인 영웅을 칭송하는 민심 때문에.
“엘피도 공작의 배반은 염두에 두시오. 오랫동안 공들인 동맹이라 하나, 기실 3년 전에 파탄 난 것이나 다름없지. 도대체가 동부에서 갑자기 저러는 이유를 알 수가 없어.”
신경질적으로 관자놀이를 짓누르던 빌헬미나가 문득 고개를 돌려 후작을 보았다.
“그대의 딸에게는 안된 일이군.”
바도비체 후작이 쓰게 웃었다. 자식의 눈먼 사랑만큼 부모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도 없었다.
“폐하. 저는 영지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후작이 낯빛을 바꾸어 속삭였다.
“황태자 전하의 생일 연회에선 세도파가 저를 대신할 수 있으나, 오스트라트의 기사들을 통솔하는 제 역할은 누구도 대신하지 못합니다. 폐하, 이리니 페임하른은 강력한 무장입니다. 구심점 없는 기사들이 어찌 그녀를 당해 낼 수 있겠습니까?”
그의 말이 옳았다. 동부를 견제하는 오스트라트 전진 기지의 병력은 물론이요, 현재 동부에 주둔 중인 본토 병력의 실질적인 지휘관이 바로 바도비체 후작이었다.
“도착한 지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다시 먼 길을 돌아가야겠군.”
“폐하의 땅을 지키기 위함입니다. 어찌 피로 따위가 문제 되겠습니까.”
“최근 개발된 신식 화기를 뒤따라 보내겠소. 부디 도움이 되면 좋겠군.”
“신식 화기라면 설마….”
빌헬미나가 붉은 입술을 비틀며 미려하게 웃었다.
“교국도 라발도 반백 년 전 성전에서 체득한 대(對) 용 화기를 전부 기밀에 부치고 있지 않소. 하나 우리와 맞닿은 저 남쪽 교국 땅에 수십 마리 용이 날아다니고 있는데 어찌 가만있을 수 있을까.”
“개발에 성공하신 겁니까?”
“사거리와 정확도를 개선한 것뿐이오. 하지만 날아다니는 용을 맞히기엔 그것만으로도 족할 테지. 숙련된 포병을 함께 보낼 테니, 어디 한번 엘피도 공작의 그 잘난 백룡을 맞혀 보시오.”
빌헬미나가 배부른 사자처럼 느른하게 소파에 기대었다. 한층 밝아진 낯빛으로 고개를 조아리던 후작이 불현듯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폐하. 알프도르트 방벽에는 알리지 않으실 겁니까?”
“…….”
“물론 알프도르트 방벽의 역할도 중요하긴 합니다만… 방벽 수비대는 그대로 두고 도미에 변경백만 합류해도 큰 힘이 될 것입니다. 전장에서 그만큼 믿음직스러운 기사도 없….”
“도미에 변경백은 방벽을 지킬 것이오.”
후작이 멈칫 입을 다물었다. 빌헬미나의 따사로운 연옥빛 눈에서 온기가 달아나고 있었다. 후작의 머릿속에서 경계음이 빠르게 울렸다.
“…명 받들겠습니다.”
맹목적인 충성을 표하며 후작이 접견실에서 물러났다. 고요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물오른 화초의 잎사귀에서 맑은 이슬방울이 떨어졌다.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던 빌헬미나가 시종장을 불렀다.
“아나클레토와 솔란지아에게 보낼 밀서의 초안을 작성하라 일러라.”
“또 분부하실 바가 있으신지요?”
“음… 지금 바로 근위대장을 봐야겠구나.”
빌헬미나는 도톰한 아랫입술을 톡톡 두드렸다.
비록 한 배를 탄 교황 레오폴트는 뒤로 물러난 지 오래이나, 아나클레토와 솔란지아를 위시한 교국 내 탐보프의 세력은 여전히 막강했다. 더욱이 엘피도 공작을 제칠 수만 있다면 알비야 공작과 퀴테리아 추기경도 쌍수 들고 합세할 터.
만에 하나 엘피도 공작이 반란에 가담한다 해도, 원탁의 결정을 통해 그를 압박할 수 있을 것이다.
곧 근위대장이 들어왔다.
“폐하.”
“황태자의 동태는?”
“송구합니다. 사나흘에 한 번 꼴로 행방이 묘연해지시는데, 궁내에서는 그분의 흔적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감히 예상하건대 궁 밖으로 나가시는 것이 아닐지….”
근위대장이 흘끗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빌헬미나는 천천히 부채를 부치며 냉담하게 말했다.
“연회가 목전이라 근위대의 업무가 과중한 것은 내 알고 있으나, 황태자를 단속하는 것이야말로 그대들의 가장 중요한 임무요.”
“하오나 황태자 전하께서 워낙 날래신 탓에…!”
착! 부채가 접혔다.
“이리니 페임하른이 불온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소. 이것이 무슨 뜻인진 그대도 잘 알겠지.”
근위대장이 얼어붙었다. 빌헬미나는 싸늘한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황태자에게서 절대 눈을 떼지 마시오. 황태자의 말 한마디, 오가는 편지 하나까지도 제대로 감시하란 말이오.”
“분부 받들겠습니다.”
“사도는 어찌 지내시지?”
근위대장의 낯이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대체로 조용히 계십니다만, 황태자 전하와 자주 어울리십니다.”
“황태자와?”
“서로 경어를 사용하지 않으시는 모습이 제법 친밀해 보였습니다. 그리고….”
“말하시오.”
“…사도께서 몰래 별궁을 방문하신다고 합니다.”
부채로 손바닥을 두드리던 빌헬미나의 손길이 우뚝 멈추었다. 근위대장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황태자 전하께선 그 자리에 계시지 않았으나….”
“황태자의 짓이겠지. 멀리서 온 사도가 어찌 별궁을 안단 말이오.”
유독 날 선 목소리로 대꾸한 빌헬미나가 심기 불편한 표정으로 소파 등받이에 팔을 올렸다.
아뎃사의 차라.
가장 어린 사도이며, 가장 존재감이 옅은 사도였다. 엘피도 공작과의 친분은 깊지 않다고 알려졌으나, 두 사람 모두 3년 전 죽은 카니나의 페기와 돈독한 사이였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고작해야 성년도 못 된 어린 사도. 그 혼자서 이룰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으나, 사도라는 특별한 위치는 때로 기름이 되어 들불을 퍼트리곤 했다.
빌헬미나가 느릿하게 입술을 뗐다.
“사도에게 은밀히 사람을 붙이고… 굴리엘모 수도원의 방비를 강화하라 이르시오.”
“…….”
“쥐새끼 한 마리, 뉘벨 공과 접촉하면 아니 될 것이오.”
연옥빛 눈동자가 써늘하게 가라앉았다. 근위대장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숙여 보였다. 물러나는 그의 뒷모습으로 빌헬미나의 날카로운 시선이 박혔다.
알리오나는 그녀의 가장 큰 약점이자, 최후의 보루.
그녀만은 누구에게도 넘겨줄 수 없었다. 설사 천사의 대리인이라 할지라도.
***
차라는 방구석에 박혀 책을 읽고 있었다. 두께는 딱 베개로 삼기 좋고 글씨는 모래알보다 작았으나, 그가 찾아 헤매던 정보는 정확하게 담고 있었다.
뉘벨 공작. 즉, 빌헬미나 3세의 남편.
다른 책에선 의도적으로 삭제되었던 그의 이름을 이 두꺼운 책에서나마 찾을 수 있었으니 행운이다. 차라는 아무도 읽지 않았을 이 책의 저자에게 마음속 깊이 감사를 표했다.
굴리엘모 수도원은 뉘벨 공작이 은거하고 있는 장소로도 유명하다. 그는 연달아 자식을 잃은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수도원으로 들어갔는데, 그곳의 아름다운 풍광이 그의 다친 마음을 어루만져 주고 있다는 풍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