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1화 (111/328)

“긴 여정에 고단하셨을 테니 오늘은 이만 쉬십시오. 조만간 부끄럽지 않은 만찬으로 환대하겠습니다.”

따스한 눈으로 차라를 응시하던 빌헬미나가 고개를 돌려 요슈아에게 말했다.

“네가 잘 챙겨 드리려무나.”

“염려하지 마세요.”

요슈아가 듬직하게 웃어 보였다. 그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여 준 빌헬미나가 곧 시녀들을 데리고 자리를 떴다.

어느새 접견실 안에는 둘만 남았다. 차라는 숨을 고르게 내쉬며 지금부터 쏘아붙일 말을 차근차근 정리했다. 이 사기꾼, 내 목걸이 내놔. 좋아.

“무지 닮았을걸.”

“이 사기… 어?”

“교황이랑 저 사람. 무지 닮았을 거라고.”

눈 깜짝할 새 소파에 방만하게 늘어져 앉은 요슈아가 금방 빌헬미나가 나간 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 발데마르 황가는 선대까지 근친혼만 하던 미친 가문이거든. 너는 네 누나랑 입 맞추고 살 섞는 걸 상상할 수 있니?”

“무슨 끔찍한 소리야!”

페기의 얼굴만 떠올렸을 뿐인데도 살갗에 오스스 소름이 돋았다. 질색하는 차라의 반응이 마음에 든다는 듯 요슈아가 입을 크게 벌리며 웃었다.

“다행히 저 사람은 그런 쪽으론 상식적이라 근친혼을 금지했지만, 교황이랑 저 사람은 근친혼의 산물이라 이 말이지. 나중에 여기 조상들 초상화나 한번 구경해 봐. 죄다 백금발에 녹안. 틀에 박은 것처럼 똑같이 생겼다니까?”

어우, 내가 할머니를 절반만 닮아 다행이지. 요슈아가 어깨를 부르르 떠는 동안, 차라는 곰곰이 빌헬미나의 아름다운 얼굴을 떠올려 보았다. 거기서 긴 머리를 짧게 치고 부드러운 얼굴선에 조금 더 힘을 준다.

어쩌면 이것이 레오폴트의 얼굴일지도 몰랐다.

차라가 망연자실하게 있는 동안, 요슈아는 다리를 꼬고 앉아 사과를 껍질째 베어 물었다. 목을 옥죄던 단추를 서너 개 푸르고, 하녀들이 공들여 다듬어 주었던 머리는 손가락으로 갈라 헝클였다. 그제야 후, 하고 속 시원한 한숨이 새어 나왔다.

복잡한 기분으로 고개를 들던 차라가 그 모습을 보고 왈칵 낯을 구겼다.

“이 사기꾼!”

요슈아가 사과를 입에 문 채 눈만 댕그랗게 떴다. 저 순해 보이는 얼굴에 속으면 안 된다. 저 얼굴이 어찌나 변화무쌍한지 그는 너무나도 잘 알았다.

차라가 씩씩거리며 눈을 부라렸다.

“너는 무슨 황태자씩이나 되어서 남 등쳐 먹고 다니냐! 네가 그러고도 이 나라의 황태자야? 어?!”

“그럼. 내가 보고 배워 먹은 게 그건데.”

“뭐, 뭐?”

“아까 그 사람은 동부 전체를 등쳐 먹고 아주 호화스럽게 잘살고 있잖아. 황제란 자고로 나라에서 제일가는 사기꾼인 법이지. 훗날 황제가 될 사람의 자질로는 충분하지 않아?”

차라는 그만 말문이 막혔다. 요슈아는 그의 아연한 표정을 보며 실실 웃었다.

“아니면 이걸 찾는 거야?”

요술처럼 그의 손아래로 목걸이가 늘어졌다. 차라가 황급히 손을 뻗어 보았지만, 요슈아가 냉큼 목걸이를 먼저 채 갔다.

“하하. 그렇게 쉽게 돌려줄 줄 알고?”

“내놔!”

“내 부탁 하나만 들어주면 고이 드릴게.”

“웃기시네. 네가 뭐가 예쁘다고 네 부탁을 들어줘?”

“어? 그럼 이거 내가 가진다?”

요슈아는 제 눈앞으로 목걸이를 늘어트리며 종알댔다.

“다시 가 보면 알겠지만 거기 공방은 똑같은 거 두 개는 안 만들거든. 꽤 신중하게 고르지 않았어? 소중한 사람한테 줄 선물인 것 같은데.”

“…….”

“아니면 말고.”

요슈아가 도로 목걸이를 주머니에 집어넣으려는 순간이었다. 차라가 그쪽으로 몸을 비틀며 성급하게 물었다.

“너, 너 설마 내가 사도라는 걸 알고 접근한 거야? 일부러?”

“당연하지. 너 엄청 티 났거든.”

교국의 상징인 동심원을 매단 마차. 삼엄한 호위대. 거기서 가장 고귀해 보이되, 성직자의 차림은 아닌 소년.

“하나밖에 더 있나. 내 생일을 축하하러 온다는 사도겠지.”

차라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거의 소파에 드러누울 듯이 앉은 요슈아가 턱을 괴며 물었다.

“그런데 너 진짜 왜 온 거야? 처음 작성된 사절단 명단엔 너 없었다며. 그렇게나 내 생일을 축하해 주고 싶었어?”

“아니야!”

“아니야?”

차라는 다시 입술을 꾹 다물었다. 순진한 아이처럼 동그란 눈을 깜박이던 요슈아가 팔걸이 위로 두 다리를 올리며 양팔을 쭉 뻗었다.

“뭐, 너한테 무슨 속셈이 있는진 모르겠는데 급한 거 아니면 내 부탁 좀 들어줘. 그럼 목걸이도 돌려주고, 혹시라도 내 힘이 필요하면 내가 널 도와줄 수도 있잖아.”

그 말에 차라가 멈칫하며 미심쩍게 그를 바라보았다.

“부탁이 뭔데?”

“들어줄 거야?”

소파에 늘어져 있던 요슈아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짙푸른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일단 들어는 보고.”

“흐음, 좋아. 일단 일어나 봐.”

깡충 바닥으로 뛰어내린 요슈아가 차라의 팔을 잡고 창가로 질질 끌고 갔다. 좁은 창 너머로 사시사철 푸른 침엽수가 정원을 이루고 있었다. 요슈아는 그 사이로 들어가는 외진 길을 가리켰다.

“저기로 쭉 들어가면 웬 외딴 별궁이 나오거든? 문 두드려도 열어 주지 않을 테니까 괜히 그 앞에서 설치지 말고, 담벼락 오른쪽으로 빙 돌아가서 산딸기 맺힌 수풀 아래로 기어들어 가. 거기에 내가 개구멍을 하나 파 둬서 안으로 들어갈 수 있어.”

“별궁, 오른쪽, 산딸기….”

“일단 안으로 들어가면 쉬워. 건물 뒤쪽으로 가면 커다랗고 줄기가 막 뒤틀린 나무 한 그루가 있거든? 그거 기어 올라가면 3층에 분홍색 커튼이 쳐진 방이 보일 거야. 그럼 그 창문에다가 막 돌멩이를 던져. 누군가 창문을 열 때까지. 딱 보기에 하녀면 꼬리 말고 도망치고, 웬 성질 더러워 보이는 애가 나오면 네 이름을 대.”

쉽지? 요슈아가 어깨를 으쓱였다. 차라는 물끄러미 그를 쳐다보았다.

“그러니까 3층 높이의 나무를 오르라고.”

“응.”

“하녀가 나오면 도망치고.”

“응.”

“너 미쳤어?”

“왜? 난 맨날 그렇게 했는데.”

건들거리며 목을 좌우로 꺾던 요슈아가 잽싸게 창틀을 뛰어넘었다. 차라는 순식간에 창밖으로 나간 요슈아를 어처구니없다는 듯 보았다.

“난 너처럼 짐승 같지 않거든?”

“사도잖아. 무슨 특별한 능력 없어?”

“사도가 무슨 요술쟁이인 줄 알아?”

요슈아가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그럼 어쩔 수 없네. 이 목걸이는 내가 가지는 거로.”

“자, 잠깐!”

차라는 홀연히 가 버리려는 요슈아를 황급히 붙들었다.

“해, 해 보긴 할 텐데 들키면 어떡해.”

“그냥 순순히 잘못 들어왔다고 말해. 네 말을 믿든 안 믿든, 어차피 네 털끝 하나 못 건드리니까.”

“…실패하고 돌아와도 목걸이는 돌려주는 거지?”

“물론.”

요슈아가 씩 웃었다. 도무지 미덥진 않았지만 차라는 애써 마음을 다독이며 낑낑 창틀을 넘었다. 요슈아가 진심으로 감탄했다.

“우와. 너처럼 둔한 애 처음 봐.”

“닥쳐.”

신경질적으로 걸음을 옮기던 차라가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넌 같이 안 가?”

“응. 난 그 애가 싫거든.”

“…….”

“가서 내가 보내는 선물이라고 말해 줘. 그럼 대충 알아들을 거야.”

요슈아가 느긋하게 팔짱을 끼고 웃었다. 차라는 머뭇거리며 발치를 내려다보았다.

지금 그의 품에는 페임하른 공작의 친서가 있었다.

그의 목적은 이 친서를 요슈아에게 전달하는 것. 그러나 지금 덥석 건네기엔 니체타의 경고가 마음에 걸렸다.

“듣기로 황태자는 의심이 아주 많다고 합니다.”

얼핏 빈둥빈둥 노는 한량처럼 보이지만, 차라는 요슈아 발데마르, 혹은 요슈아 페임하른이란 자가 어떤 사람인지 아직 가늠하지 못했다. 변화무쌍한 표정처럼 그 속도 몹시 변덕스러울 터.

그러니 일단은 최소한의 신뢰를 얻는다. 이 말도 안 되는 부탁을 들어주면, 괜히 날 의심해서 편지를 내다 버리는 일은 없겠지.

“왜? 부탁 들어주기 싫어졌어?”

“재촉하지 마. 지금 갈 거니까.”

차라는 불퉁하게 중얼거리며 외길로 발을 들였다. 그래 봤자 황궁 안이다. 별일이야 있을까.

별일은 있었다.

차라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눈앞의 거대한 나무를 올려다보았다. 이걸 오르라고? 말도 안 돼.

인적 없는 외길을 걸어 외딴 별궁에 도착한 것까진 좋았다. 굳게 잠긴 문을 지나쳐 산딸기 맺힌 수풀을 발견한 것까지도 좋았다. 숨겨진 개구멍으로 기어들어 가느라 최고급 비단옷이 엉망이 되었지만 거기까지도 괜찮았다. 담쟁이 넝쿨로 칭칭 감긴 음산한 별궁의 모습도 지금 보니 더없이 포근하다.

하지만 이건 아니었다. 서너 그루가 합쳐진 것처럼 이상하게 뒤틀린 나무는 별궁의 지붕에까지 닿을 듯 드높았다. 겨울철 헐벗은 모습이기에 그 기괴함이 더했다.

한참이나 그 아래서 막막하게 서 있던 차라가 일단은 나무를 잡고 엉성하게 발을 올려 보았다. 그러나 힘을 주기 무섭게 발이 주르륵 미끄러졌다. 이건 안 된다. 불가능했다.

야옹.

차라는 화들짝 뒤를 돌아보았다. 고양이 한 마리가 빤히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야옹아. 넌 어디서 왔니?”

낙담하여 쭈그려 앉은 차라가 고양이를 살살 쓰다듬었다. 갸르릉거리며 그의 손길을 즐기던 고양이가 문득 나무를 빙 둘러 반대편에서 폴짝 뛰어올랐다. 순식간에 그의 머리 위로 올라간 고양이가 이리 오라는 듯 꼬리를 흔들었다.

“…널 따라오라고?”

그러자 고양이가 커다란 눈을 깜박였다. 차라는 홀린 듯이 고양이가 지나간 길을 그대로 따라 올라갔다. 신기하게도 나무가 뒤틀린 부분의 홈을 따라 비교적 완만한 기울기가 이어지고 있었다.

고양이가 폴짝폴짝 가볍게 뛰어오르는 길을 차라는 힘겹고 아슬아슬하게 기어올랐다. 벌써 아득해진 발아래를 의식적으로 보지 않으려 노력하며 굼벵이 같은 속도로 나아갔다.

저 앞쪽에서 기다리다 지친 고양이가 야옹야옹 울었다.

“재촉하지 마. 난 이게 최선이란 말이야….”

나뭇가지에 납작 엎드린 차라가 창백해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매달린 나뭇가지는 제법 굵고 탄탄했지만,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우수수 흔들렸다. 페임하른 공작의 친서고 나발이고, 그는 죄 버리고 성궁으로 돌아가고 싶어졌다.

“분홍색, 분홍색….”

나뭇가지가 눈에 띄게 얇아지는 지점에 이르러 차라는 별궁의 창문들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그늘이 진 탓에 커튼의 색깔이 잘 구분되지 않았다. 갑갑하다는 듯 고양이가 또다시 야옹 울며 어느 발코니 안으로 폴짝 뛰어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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