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0화 (110/328)

가장 처음으로 눈에 띈 것은 수정이 박힌 허리띠였다. 레오폴트는 장식을 삼가는 수수한 차림을 선호하지만 허리띠에는 꽤나 신경을 썼다. 뭐, 내가 주는 선물이면 다 좋아하겠지만.

다음으론 예후르와 안드레아를 위해 대충 반지 하나씩을 골랐다. 성의가 없어도 할 수 없었다. 그 둘의 취향을 알기에는 함께했던 시간이 지극히 짧았다.

그리고….

“취향 한번 되게 독특하네.”

“…내가 쓸 거 아닌데.”

차라는 퉁명스럽게 대꾸하며 못생긴 전통 인형을 집어 들었다. 이건 비올라 거.

“그것도 선물이야? 그런 걸 줘도 돼?”

“별로 안 좋아하는 애야.”

“그런데 선물을 왜 줘?”

“가족이니까.”

일단은.

차라는 마지막 말을 삼키며 분주히 마지막 선물을 고르기 시작했다. 제일 신이 나는 순간이었다.

“흐음, 목걸이? 여자 줄 거야?”

“저리 가!”

“그것보단 저게 예쁘네. 그건 걸쇠가 비틀려서 불편해할걸?”

듣고 보니 맞는 소리였다. 차라는 얌전히 남자애가 가리킨 목걸이를 골랐다.

그는 차라가 값을 치르는 동안에도 옆에서 얼씬거리며 지켜보았다. 처음에 갔던 공방보다 절반 이상 저렴한 것을 보니 주인도 남자애의 눈치를 보는 듯했다. 차라는 그에 대한 의심을 조금 거두었다. 생각보단 좋은 애인 것 같았다.

“대신이라고 하긴 뭐하지만 너도 하나 사 줄까?”

“사양하지 않을게. 이거.”

남자애도 덥석 못생긴 전통 인형을 집었다. 차라가 인상을 썼다.

“나한텐 뭐라고 하더니.”

“나도 별로 안 좋아하지만 가족인 애한테 주려고.”

그렇다면야. 차라는 순순히 인형의 값을 지불했다. 남자애는 차라가 꼼꼼히 거스름돈까지 챙기는 모습을 조금 신기하게 쳐다보았다.

“너 좀 특이하다.”

“왜?”

“귀한 도련님들은 보통 돈도 잘 못 세. 너처럼 돈주머니를 갖고 다니지도 않고.”

차라는 아무 말 없이 돈주머니를 윗옷 안주머니에 꼭꼭 집어넣었다. 지금은 이렇게 값비싼 옷을 걸치고 도련님 행세를 하지만 그에게도 분명 엄마 심부름하며 푼돈이나 갖고 다니던 시절이 있었다.

“도련님!”

멀리서 기사가 허옇게 질린 얼굴로 달려왔다. 차라는 심드렁한 얼굴로 남자애를 돌아보았다.

“난 이만 가 봐야겠다. 오늘은 고마웠어.”

“별말씀을.”

남자애가 묘하게 웃었다. 어쩐지 이상한 느낌이 들어 빤히 쳐다보자, 언제 그랬냐는 듯 남자애는 산뜻하게 손을 흔들며 사라졌다. 차라는 슬쩍 인상을 찌푸리고 남자애가 사라진 방향을 응시했다.

“도, 도련님….”

헐레벌떡 달려온 기사가 헉헉거리며 무릎을 짚었다. 차라는 그제야 느릿하게 돌아섰다.

“예쁜 아가씨들이랑 볼일은 다 봤어요?”

“예, 예?”

“난 볼일 다 봤으니까 아저씨는 더 재미 보고 오시든지.”

“아, 아, 아닙니다! 저는 도련님 곁을 지켜야죠!”

차라는 탐탁지 않은 듯 콧방귀를 뀌며 방금 구입했던 레오폴트의 허리띠를 보여 주었다.

“이거 괜찮아 보여요?”

“예, 뭐, 괜찮긴 합니다만… 황궁에 들어가시면 더 질 좋은 물건을 구하실 수 있을 텐데요.”

“아이참, 그런 건 성궁에서도 흔하잖아요. 아저씨는 선물의 의미도 몰라요?”

차라가 투덜거리며 봉투를 들여다보았다. 볼수록 더 못생긴 인형까지 아주 마음에 쏙 들었다. 특히 페기에게 줄 이 목걸이는….

“어?”

차라가 제자리에 멈춰서 봉투를 뒤적이기 시작했다. 허리띠, 반지 두 개, 인형, 다 있다.

“어?!”

목걸이만 없었다.

“왜 그러십니까?”

기사가 의아하게 물었다. 멍하니 정면을 응시하던 차라가 느릿하게 뒤를 돌아보았다. 낯선 사람들만 지나다니는 한가한 거리. 차라의 표정이 더없이 황망하게 일그러졌다.

“금발에 아주 뺀질뺀질해 보이는 놈이에요.”

“예, 금발에 뺀질뺀질…. 그런데 뺀질뺀질한 금발은 흔하지 않습니까?”

“그냥 금발이 아니라 잘못 세탁한 것처럼 물 빠진 금발이었어요. 저기, 저 꽃처럼 시들시들해 보이는 금발.”

“시들시들한 금발….”

기사가 열심히 메모했다. 차라는 아직도 분이 안 가신 표정으로 씩씩거렸다. 남부식으로 화사하게 꾸민 궁내 풍경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눈은 미역처럼 푸르죽죽하고… 아! 푸른 늑대 기사단이랬어요!”

“푸른 늑대 기사단이요? 거긴 탐보프의 정예 기사단인데요?”

“그렇죠? 거짓말이었겠죠? 아, 진짜 사기꾼한테 속았어!”

속상한 차라가 발을 굴렀다.

“하여간 뺀질뺀질한 금발에 푸른 늑대 기사단 행세하고 다니는 사기꾼 발견하면 반드시 잡아서 나한테 데려와요! 절대 용서 안 할 거니까!”

“저, 조금만 더 자세히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뺀질뺀질한 금발 사기꾼이 어디 한둘이어야 말이지요.”

“거참, 눈 좀 풀리고 머리는 엉망이고! …뭐야, 내가 언제 지저분하다고 했어요? 제대로 써요!”

“엉망이란 게 지저분하다는 뜻 아닙니까?”

“바람 맞은 것처럼 엉망진창이라고요! 나처럼 막 헝클어뜨린 머리! 그리고 키는 멀대같이 커서 꼭… 어, 꼭 저렇게! 저렇게 생겼는데….”

차라가 멍하니 눈을 끔벅였다. 기사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저분입니까? 잡아 올까요?”

“…가만있어요.”

차라가 기사의 발등을 콱 짓밟았다. 기사는 억 소리도 못 내고 얼굴을 벌겋게 물들였다. 차라는 혼란스러운 눈으로 성큼성큼 다가오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색이 절반쯤 날아간 듯한 백금발에 푸르죽죽한 눈. 희고 멀끔한 낯짝은 아까와 다르지 않았지만, 엉망이던 머리만은 단정하게 빗어 넘긴 채였다. 무엇보다도 금실로 수를 놓은 화려한 연보랏빛 비단옷은 일개 기사가 입을 만한 옷이 아니었다.

계단을 올라온 남자애가 어느새 차라의 앞에 우뚝 섰다. 아까는 바람 같더니, 지금은 꼭 유리로 만든 검처럼 예리하게 날이 서 있다.

그가 반듯하게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교국에서 온 사도이시지요? 저는 탐보프의 황태자, 요슈아 발데마르입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차라는 입 안의 여린 살을 콱 깨물며 힘겹게 미소를 지어 올렸다.

“…네. 저도 반갑습니다.”

이 사기꾼아.

***

차라는 불편한 기색을 애써 감추듯 목 부근의 단추를 매만졌다. 그럼에도 가시방석에 앉은 듯 배기는 느낌을 참을 수 없자, 공연히 고개를 돌려 접견실 안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이제야 눈에 제대로 들어오는 미에투넨의 황궁은 한마디로 화려함의 극치였다. 벽지는 화사하며 샹들리에는 섬세했다. 남쪽으로 뚫린 창문은 좁았으나 채광을 고려하여 설계되었는지 일조량이 적지 않았다. 군데군데 화초로 장식된 모습이, 비교하자면 교국 남쪽의 별궁들과 유사했다.

“오는 길은 편안하셨는지요?”

문득 들려오는 나긋한 목소리에 차라는 반사적으로 허리를 곧추세웠다. 이상하게 눈을 드는 것마저 무례를 범하는 것으로 느껴졌다. 그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간신히 말문을 열었다.

“…예.”

“사도께서 건너오신 트리스탄 가도와 아리페르트 가도는 돌아가신 부황께서 수십 년을 공들이신 걸작이지요. 덕분에 평안하셨다니 다행입니다.”

흰 손이 찻잔을 내려놓았다. 머뭇거리던 차라가 은근슬쩍 눈을 들어 올렸다.

빌헬미나 3세.

말로만 들었던 북방의 황제를 대면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초상화를 본 적도 없기에 지금껏 뼛속까지 차가운 냉혈한으로만 상상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실제 빌헬미나는 상상과 전혀 달랐다. 백금발을 우아하게 틀어 올리고 밝은 빛의 드레스를 받쳐 입은 그녀는 얼핏 동화 속 귀부인처럼 보였다. 차라는 눈앞의 기품 있는 여인이 수많은 괴담을 거느린 북방의 황제라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어린 사도의 눈에는 내가 신기하게 보이는 모양입니다.”

빌헬미나가 연옥색 눈을 접으며 상냥하게 웃었다. 눈처럼 하얀 얼굴엔 주름살조차 없었다. 마흔을 훌쩍 넘긴 나이에 어쩜 저럴까.

멍하니 생각에 사로잡혀 있던 차라가 뒤늦게 어깨를 퉁겼다.

“네, 네?”

“그리 빤히 쳐다보시니 말입니다. 이 나이에 주책없게 들릴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조금 부끄럽군요.”

빌헬미나가 부채로 입가를 가리며 호호 웃었다. 눈을 껌벅이던 차라가 금세 얼굴을 붉히며 손을 내저었다.

“아, 아니요. 그런 게 아니라….”

“어머니께서 아름다우신 탓이지요.”

요슈아가 장난스럽게 말을 얹었다. 차라는 차마 대놓고 그를 노려보진 못하고, 고개를 숙인 채 그의 신발만 죽어라 노려보았다. 말만 번드레한 저 사기꾼.

“저, 저는 그저 폐하께 여쭙고 싶은 것이 하나 있어서….”

“사도께서 궁금해하시는 것이라면 응당 대답해 드려야지요. 편하게 말씀하세요.”

그 말에 용기를 얻은 차라가 슬쩍 고개를 들어 올렸다.

“레오… 교황 성하도 폐하를 닮았나요?”

빌헬미나는 레오폴트와 동복 남매였다. 아리페르트 6세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나 백 일 만에 사도로 각성하여 성궁으로 보내진 레오폴트를 대신해, 둘째인 빌헬미나가 황위를 이어받은 것이다.

“어머….”

예상치 못했던 질문이라는 듯 빌헬미나가 눈을 조금 커다랗게 떴다. 차라는 빌헬미나의 모든 부분이 어려웠지만, 저 눈만은 어렵지 않았다.

봄철에 돋는 새순처럼 연한 빛의 녹안. 그것은 그가 아는 레오폴트의 전부였다.

“아쉽게도 나 역시 교황 성하의 민낯을 본 적은 없습니다. 그분이 가면을 쓰기 시작하신 지 어언 20년이 훌쩍 넘었으니까요.”

“아….”

차라는 입술을 오므리며 아쉬움을 삼켰다. 레오폴트는 젊은 시절에도 초상화 한 점 남겨 두지 않았다. 그의 병세가 위중하다는 것을 모르지 않지만 솔직히 그의 민낯이 궁금했다.

요슈아가 부드럽게 찻잔을 내려놓았다.

“어머니. 곧 정무를 보실 시간입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군요.”

빌헬미나가 치맛자락을 들며 사뿐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차라는 마시던 찻물을 급히 삼키며 벌떡 일어섰다.

“사도께서 이리 본국을 찾아 주시니 이루 말할 수 없이 기쁩니다.”

빌헬미나가 팔을 뻗어 차라의 손을 가볍게 쥐었다. 보드라운 온기에 차라가 멈칫했다.

“덕분에 황태자의 생일도 더욱 빛나겠지요. 사도께서도 본국에서 소중한 시간을 보내셨으면 좋겠습니다.”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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