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의 종적은 남지 않았다.
하루 씩씩거렸던 총독은 다시 기운차게 일을 시작했고,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수많은 백성들은 이튿날에도 일을 나갔다.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는 듯했다. 빈민굴엔 새로운 건달들이 들어와 행패를 부렸으며, 가진 것 없는 교회는 여전히 침묵했다.
그러나 그날의 일은 물밑에서 번지고 있었다.
“정말 구원자가 나타날까?”
“순교자님의 마지막 말씀이었잖아. 분명히 나타날 거야. 언젠가는.”
불안한 희망이 움트기 시작했다. 빈민들은 빵 대신 분노를 나누어 먹으며 언젠가 도래할 그날을 기다렸다. 자신들을, 이 동부를 구할 영웅이 등장할 그날만을.
한편, 먼 서쪽에서도 계획된 톱니바퀴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저기가 미에투넨이에요?”
마차의 창밖으로 고개를 쭉 뺀 차라가 심드렁하게 중얼거렸다. 초목이 얼어 죽은 허허벌판 위로 드높은 성채가 우뚝 세워져 있었다.
“흐음. 별거 없어 보이네.”
“하하. 어디든 성도에 비할까요.”
“그래도 난 저렇게 별거 없는 거 보려고 한 달 넘게 이 지긋지긋한 마차 여행을 한 게 아니라고요.”
“별 게 없으니 다행이지요. 별일도 없을 게 아닙니까?”
“그게 뭐람….”
샐쭉한 표정을 지었던 차라가 금세 얼굴을 달리 했다. 그는 밝게 웃으며 말했다.
“뭐, 경 말대로 별일이야 있겠어요?”
***
“당장 불러와!”
깨진 접시, 흐트러진 촛대, 조각난 태피스트리. 넝마가 된 방 안에서 알리오나는 하녀의 목을 조인 채 단검을 들이대고 있었다.
“당장 불러오라고!”
“화, 황녀 전하. 진정하십시오.”
그녀와 대치하고 있던 다른 하녀들이 백지처럼 창백해진 얼굴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폐하께선 지금 궁내에 계시지 않습니다. 환궁하시면 꼭 전하를 찾아뵈어 달라 전할 터이니, 부디 그 아이는 놓아주세요!”
“거짓말! 오늘 바도비체 후작이 입궁한 거 다 알아. 그자가 왔는데 어머니가 왜 궁 밖에 나가셨겠어!”
“전하….”
한 발짝 나서려던 하녀를 만류하며 하녀장이 앞으로 나왔다. 그녀는 엉망이 된 실내를 둘러보더니 짤막한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은 또 무엇이 불만이십니까.”
알리오나가 으득 이를 갈았다. 그러곤 하녀의 목 앞에 대고 있던 칼에 더욱 힘을 주었다.
“어머니를 불러와. 당장 뵈어야겠어.”
“폐하께선 다망하십니다.”
“내가 명령하잖아!”
날카로운 일갈에도 하녀장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예, 전하의 명령이시죠. 하지만 전하께서도 본인의 말씀이 통하지 않으리라 여기셨기에 아무 죄 없는 아이의 목숨을 쥐고 협박하시는 것 아닙니까?”
“가서 전하기나 하란 말이야!”
“쓸데없는 일을 아뢰었다며 별궁을 관리하는 하녀들만 억울하게 교체되고 말겠지요. 폐하께서 한낱 하녀의 목숨 따위에 연연하시겠습니까?”
그 말에 알리오나에게 붙들린 하녀가 흐윽, 하며 흐느낌을 토했다. 알리오나는 새파랗게 질린 입술을 콱 짓씹었다. 그러곤 하녀를 밀쳐 버린 뒤 자신의 목에 칼날을 겨누었다.
“그럼 이건 어때.”
“전하.”
“내가 장난하는 것 같아?!”
알리오나가 악을 질렀다. 칼날에 찢긴 그녀의 목에서 가느다란 핏줄기가 흘렀다. 다른 하녀들은 입을 틀어막으며 발만 동동 굴렀으나, 하녀장만은 그녀를 안쓰럽게 보았다.
“이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폐하께선 오지 않으실 겁니다. 다 알고 계시면서 어찌 귀한 목숨을 걸려 하십니까.”
알리오나의 턱이 부들부들 떨렸다. 하녀장은 담담히 깨진 유리 조각을 주워 담곤 하녀들을 문밖으로 물렸다.
“오늘 일은 폐하께 아뢰지 않겠습니다. …부디 제가 수습할 수 있는 선에서만 계셔 주십시오.”
하녀장이 조용히 문을 닫고 나갔다.
죽일 듯이 문을 노려보던 알리오나가 단검을 내던지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 앞으로 일곱 개의 문이 닫히고, 외진 별궁의 문이 닫혔다. 미에투넨의 황궁은 고요했다.
***
맑게 갠 날이었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 아래 햇빛은 청명했고, 도시의 성벽은 더욱 하얗게 빛났다. 늦겨울 날씨마저 제법 따사로우니, 탐보프의 수도 미에투넨의 위용은 더욱 대단하게만 보였다.
“별거 없어 보인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땐 멀리서 성벽만 봤던 거니까….”
차라는 우물거리며 연신 마차의 창밖을 힐끔거렸다. 성도 오스피나를 처음 봤을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오스피나가 오랜 역사를 간직한 순백의 도시라면, 미에투넨은 갓 지어진 황제의 경기장이었다. 그만큼 대로는 널찍하고 건물은 드높았다.
“여기도 꽤 오래된 도시 아닌가? 도대체 얼마나 갈아엎은 거예요?”
“탐보프가 소왕국이던 시절의 수도 미에투넨은 여기서 반나절 정도 떨어진 곳에 있습니다. 이곳은 아리페르트 6세가 기획하고 빌헬미나 3세가 완공한 계획 도시지요. 이름만 같지, 실상은 다른 도시입니다.”
“왜 그런 쓸데없는 낭비를 했대요?”
“이전의 미에투넨은 너무 좁고 초라했으니까요. 북방을 통일한 제국의 수도로는 걸맞지 않다고 여긴 것이겠죠.”
기사의 설명에 차라는 입술을 툭 내밀었다. 지나치게 격을 따지는 사람치고 정상인은 못 봤다.
“맨땅에 도시 하나를 세운 셈이네요. 돈은 다 어디서 났나 몰라.”
“빌헬미나 3세는 현재 대륙에서도 손꼽히는 부자니까요. 돈이야 뭐, 동부든 어디든 나올 곳이야 많겠죠.”
“흐음…. 재미없어.”
차라는 조그만 창문에 팔을 꿴 채로 심드렁한 얼굴을 했다.
제국의 격에 맞을진 몰라도 볼수록 눈이 즐거운 전경은 아니었다. 건물은 물론이요, 가로수를 다듬어 놓은 모양마저 인위적이었다. 차라가 보고팠던 것은 이렇듯 완벽하게 짜 맞추어진 계획도시가 아니었다.
그때, 벌떡 몸을 일으킨 차라가 요란하게 마차 문을 두들겼다.
“잠깐! 멈춰요! 멈춰!”
마차가 급히 멈추었다. 차라가 황급히 문을 열고 마차에서 뛰어내렸다.
“도련님. 무슨 일이십니까?”
“나 저기 가 봐야 해요.”
“저기라면… 도련님!”
차라가 대꾸도 없이 골목으로 뛰어 들어갔다. 황급히 사절단 무리와 눈빛을 주고받은 기사가 말에서 내려 그의 뒤를 쫓았다.
차라가 들어간 골목은 공방들이 대거 모여 있는 거리였다. 이국적인 무기 장식을 넋 놓고 구경하던 기사는 어느 공방 안을 기웃거리는 차라를 발견하곤 서둘러 달려갔다.
“도련님, 그렇게 혼자서만 가시면 안 됩니다. 저를 대동하셔야지요!”
“미에투넨은 안전하다고 아저씨가 그랬잖아요.”
“물론 안전합니다만, 그래도 만약이라는 게 있으니….”
차라는 입술을 비쭉였다. 한 달이 넘도록 안전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지금껏 들렀던 도시들을 제대로 구경도 못 했다. 안전한 미에투넨에 가서 구경하라더니, 이젠 만약을 조심해야 한단다.
기사가 자기는 아직 아저씨가 아니라며 항변하거나 말거나, 차라는 공방 안으로 들어가 본격적으로 상품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대부분 보석을 가공한 장식품이었는데, 질이 아주 좋진 않지만 투박한 나름의 멋이 있었다.
차라는 신이 나서 장식품 다섯 개를 골랐다. 그리고 주인이 부른 값을 치르려는데, 불쑥 마디 굵은 손이 끼어들어 장식품을 채 갔다.
“이봐. 사람 등쳐 먹는 것도 유분수지, 어떻게 가짜를 그 가격에 팔아?”
살랑거리는 봄바람처럼 퉁퉁 튀어 오르는 목소리였다. 차라는 가만히 고개를 들었다. 그보다 손가락 세 마디 정도는 위에 있던 벽안이 흘끗 내려왔다.
‘뭐야, 이건?’
차라는 강해 보이기 위해 부러 인상을 팍 썼다. 그도 그럴 것이 키만 훌쩍 클 뿐, 저와 비슷한 나이대로 보였다. 불행히도 늘 저보다 스무 살은 많은 이들과 어울려야 했던 차라는 또래를 대하는 데 서툴렀다.
“아이고. 또 너냐?”
“그건 내가 할 소리야. 어떻게 또 아저씨야? 등쳐 먹는 걸론 아주 일 등 하시겠어.”
“너 아니었으면 일 등 하고도 남지! 됐으니까 빨리 꺼져!”
주인이 성을 내며 두 사람을 내쫓았다. 얼결에 같이 쫓겨난 차라가 어처구니없단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아니, 나는 왜….”
“뭐 사러 왔냐?”
남자애가 물었다. 후드를 뒤집어쓴 후줄근한 차림새에 비해 낯짝은 제법 하얗고 멀끔했다. 차라는 조금 경계하는 눈으로 저쪽에서 동네 아낙과 시시덕거리는 기사를 흘깃거렸다.
“그렇게 경계 안 해도 돼. 내가 너 털어먹으려고 했으면 진작 이거 갖고 튀었지.”
남자애가 천연덕스럽게 비단 주머니를 흔들었다. 멍하니 주머니를 보던 차라가 창백해진 얼굴로 윗옷 안주머니를 뒤지기 시작했다.
“와. 너 진짜 둔하구나?”
“뭐, 뭐야! 언제 훔친 거야!”
“훔친 건 아니지. 지금 돌려줄 거니까!”
남자애가 선심 쓰듯 자, 하고 주머니를 내밀었다. 얼른 주머니를 받아 숨긴 차라가 더욱 경계하는 눈빛으로 슬슬 물러섰다. 파란 눈을 껌벅거리던 남자애가 개구쟁이처럼 입술을 비딱하게 벌렸다.
“내가 도와줄까?”
“뭐, 뭐를?”
“선물 고르는 거 아니야? 내가 괜찮은 데로 데려다줄게.”
“널 어떻게 믿고!”
“거참. 순진하신 도련님이 의심은 많아 가지고.”
남자애가 슬쩍 로브 자락을 거두어 허리춤을 보였다. 비스듬히 꽂힌 검집에 늑대 문양이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너 기사야?”
“어. 푸른 늑대 기사단.”
“네가?”
차라의 눈빛에 의심이 세 겹 덧씌워졌다. 푸른 늑대 기사단은 탐보프에서 제일가는 황실 기사단이었다. 이런 한량 같은 어린애가 소속되었다고는 선뜻 믿기 어려웠다.
“정 그렇게 의심스러우면 저 기사 아저씨도 같이 데려가던가.”
기사는 이제 아낙들에게 둘러싸여 아주 행복해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순결을 맹세한 성 기사가 참 잘하는 짓이다. 한심스러운 눈으로 그를 응시하던 차라가 이내 고개를 돌렸다.
“별로 안 멀지?”
“엎드리면 코 닿을 곳이야.”
남자애가 앞장섰다. 기사를 향해 혀를 쭉 내민 차라가 얼른 남자애를 뒤따랐다.
남자애가 말한 ‘괜찮은 공방’은 정말로 멀지 않았다. 그는 그 공방의 주인과도 잘 아는 사이인지 알아듣기 어려운 욕설을 던지며 거친 인사를 주고받았다. 쭈뼛거리며 근처에 서 있던 차라는 슬그머니 매대로 가서 물건을 구경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