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조금 피곤하다는 듯 말없이 눈썹만 매만졌다. 파르나는 그에게서 엿보이는 무료함과 권태로움이 역겨웠다. 그런 건 저 구름 위에 있는 자들이나 가질 수 있는 행운이었다.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제 무례함이 거슬리신다면 차라리 제 목을 치십시오. 저는 죽어도 당신의 명을 따르지 않을 것입니다.”
“앉아.”
파르나는 그의 경고를 무시하며 등을 돌렸다. 그녀는 이제 사도를 따르지 않는다. 그녀의 방향은 분노를 따를 것이니.
“…말을 참 듣지 않는구나.”
한숨 섞인 그의 뇌까림이 내려앉은 순간이었다.
파르나의 발걸음이 멎었다. 부릅뜬 눈이 바닥으로 내리꽂혔다.
빛이 어둠을 몰아내고 있었다. 한밤중의 어둠을 거두어 내고, 그 위로 그림자를 그렸다. 그녀의 그림자가 잔물결처럼 일렁였다. 그리고 그마저 집어삼키듯 새로운 그림자가 솟구치고 펼쳐졌다. 파르나는 멍하니 뒤를 돌아보았다.
‘그것’을 보았다.
“나의 어린 양아.”
그의 입술이 반듯한 호선을 그렸다.
“이것은 비밀이다.”
파르나가 철퍼덕 무릎을 꿇었다. 넋 놓은 듯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저도 모르게 눈물이 줄줄 번지고, 오만 격정이 끓어올랐다. 그녀는 눈부신 빛 앞에 경도되어 온 힘을 다해 부르짖었다.
“예, 사도이시여! 예!”
파르나는 연거푸 바닥으로 엎드리며 울음을 터트렸다. 지금 이 순간을 위해 그녀는 살아왔던 것이다.
이튿날부터 도시는 묘한 바람을 타기 시작했다.
바람의 근원지는 빈민굴이었다. 늘 피곤과 굶주림에 찌들었던 파르나는 온데간데없었다. 그녀는 새로 태어난 것처럼 반짝이는 눈과 샘솟는 기운으로 빈민들에게 설파했다.
“분노할 때입니다! 일어설 때입니다! 돌멩이를 주워 던지십시오! 우리들을 핍박하는 자가 누굽니까!”
때맞추어 시내에선 소매치기 아이들이 종이를 흩뿌리기 시작했다.
“호외요, 호외!”
길 가던 아낙들과 인부들이 바닥을 구르는 종이를 주워 들었다. 까막눈도 이해할 수 있도록 종이에는 그림이 함께 그려져 있었다. 번쩍번쩍 금으로 지어진 총독부 건물 아래서 짓밟히고 죽어 가는 동부인들의 송장이 적나라했다.
호화스러운 마차 안에서 마부를 시켜 호외를 받아 보았던 졸프소체 상단주는 대놓고 낯을 구겼다.
“또다시 반동분자들의 싹이 텄군.”
졸프소체 상단주는 마차를 돌려 총독부로 향했다. 가모브 총독이 마침 보고를 받고 있었다.
“조금 뜬금없군. 요사이 별다른 사건도 없지 않았나?”
“각하. 그런 것을 따지실 때가 아닙니다. 당장 이 불경한 선동을 한 녀석들부터 잡아들이셔야지요!”
“죄송합니다만, 워낙 재빠른 녀석들인지라 놓치고 말았습니다.”
기사가 벌게진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호외를 뿌린 소매치기단은 오스터캄프를 비롯한 인근의 도시들에서 악명 높은 집단이었다. 골목골목 이어진 샛길을 어찌나 잘 파악하고 있는지, 본토의 최정예 병사들도 번번이 놓치기 일쑤였다.
가모브 총독이 난처한 기색으로 턱을 쓰다듬었다.
“어쩔 수 없군. 일단은 이 호외부터 거두어들이고, 상황을 지켜보는 수밖에.”
오랫동안 평화로웠던 도시가 다시금 냉랭하게 얼어붙었다. 본토의 치안대는 순찰을 강화했다. 거리의 부랑배들은 그저 태도가 불량하다는 이유만으로 잡혀 들어갔고, 일반 백성들을 상대로 공공연한 취조가 행해졌다. 기실 윽박이나 다름없었다.
“모른다니까요! 누가 그랬는지 내가 어떻게 알아요!”
사람들은 점점 치안대를 미워하기 시작했다. 한편으론 평화롭던 도시에 파란을 일으킨 정체 모를 자들을 원망하기도 했다. 그들의 삶은 이미 충분히 각박했다. 독립이니, 무어니 하는 부질없는 것으로 고통을 더하고 싶진 않았다.
그러나 호외는 시작에 불과했다.
오스터캄프에는 극장이 많았다. 상류층을 위한 고급 극장뿐만 아니라, 일반 백성들을 대상으로 한 극장도 제법 수가 되었다. 가난한 민중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한 가모브 총독의 한 가지 방편이었다.
극장에서 상영되는 연극은 당연히 시류와 무관한 내용이 대다수였다. 정치적인 메시지를 지녔거나 현 체제를 비판하는 내용은 일제히 엄금되었다. 그럼에도 금기를 깨고 싶은 비밀스러운 욕망은 누구나 갖고 있었다.
그런 욕망이 분출되기 시작했다.
늘 부잣집 아가씨와 도련님이 등장하던 무대에 꼭 우리네같이 낡고 병든 이들이 올랐다. 공주님과 기사의 사랑 이야기는 우리네 삶의 애환이 담긴 통속극이 되었다. 십수 년 전 전쟁에서 죽은 가족, 아무리 풍작인 해에도 남는 것이 없는 처지, 이질감 드는 본토인들 밑에서 더러운 걸레나 짜는 저희들의 모습.
사람들은 무대 위 연극에 자신의 삶을 투영해서 보았다. 감정은 배로 부풀고 알게 모르게 분노는 쌓여 갔다. 총독의 눈이 닿지 못하는 빈민굴 구석구석에서 비밀스럽게 행해지는 연극이었으나 관객은 매일같이 늘어났다. 건달들의 눈에 띄지 않을 수 없었다.
“당장 저것들 잡아!”
연극 도중에 난입한 건달들이 무대 위의 배우들을 패기 시작했다. 돌아가신 엄마, 아버지, 할머니를 꼭 빼닮은 배우들이 비명을 지르고 피를 토했다. 그러자 달아나던 관객들의 발이 멈추었다. 어디선가 돌멩이가 날아왔다. 분노가 터져 나왔다.
폭동은 들불처럼 빈민굴 전체로 퍼져 나갔다. 사람들은 분노에 가득 차 총독의 앞잡이 노릇 하던 건달들을 짓밟기 시작했다. 무리를 지으니 무서울 것이 없었다. 그 흉악한 건달들이 허무하게 무너졌다.
멀리서 치솟는 불길을 지켜보던 총독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반성할 줄 모르니 다른 수가 있나.”
본토의 치안대가 투입되었다. 백성들이 던지는 돌멩이는 그들의 갑옷에 생채기 하나 내지 못했으나, 치안대가 한 번 내지르는 창날에는 서너 명이 꿰여 죽었다.
무자비하게 폭동을 진압한 치안대가 폭동의 주모자로 끌고 온 자는 다름 아닌 파르나였다. 가모브 총독도 물론 그녀를 알았다. 눈엣가시 같던 자였다.
“수도사님. 늘 당신을 잡을 건수만 찾고 있었습니다.”
총독은 신이 나 그녀를 옥에 가두었다. 반란죄, 기물 파손죄…. 죄목이란 죄목은 모두 갖다 붙였다. 당연히 그녀에게 내려진 형벌은 사형이었다.
“각하, 파르나 수도사는 그럴 사람이 아닙니다. 교회의 사람이니 교회가 처벌하겠습니다. 제발 그녀를 풀어 주십시오.”
늘 겁쟁이처럼 납작 엎드렸던 주교가 애걸복걸했다.
“주교님.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세속에서 범한 죄가 너무나도 중대하여 세속의 법을 따를 수밖에 없다고요.”
“궤변이십니다! 각하께는 감히 성직자를 벌할 수 있는 권리가 없어요!”
새파랗게 질려서 떠는 주교에게 총독은 그저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권리는 힘에서 나옵니다. 힘은 이 땅의 지배자이신 황제 폐하로부터 비롯되지요. 나는 고귀하신 황제 폐하로부터 이 땅을 대신 다스릴 권리를 수여받은 총독. 내가 이 땅에서 하지 못할 일은 없습니다.”
주교는 참담한 분노로 말을 잇지 못했다. 무력한 그녀는 더 이상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머잖아 은자 파르나를 공개 화형에 처한다는 총독부의 결정이 공표되었다. 민중은 연극을 즐기고 운동을 즐기는 만큼 피에 열광했다. 가끔씩 선보이는 공개 처형은 온 도시의 백성들이 모여 구경하는 재밋거리 중 하나였다.
“또한 좋은 본보기가 될 테지.”
가모브 총독은 잔뜩 들떠선 화형대가 잘 내다보이는 총독부 발코니에 앉았다.
강인한 은자 파르나도 산 채로 불에 타는 고통은 견디지 못할 터. 그녀의 비명 소리는 구경꾼들의 뼛골 깊숙이 스밀 것이었다. 그는 다시는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도시 전체에 공포를 단단히 각인시킬 참이었다.
총독은 마지막 자비로 그녀에게 유언을 남길 기회를 주었다. 광장에 모인 사람들을 눈에 새길 듯 훑어보며 파르나는 담담히 입을 열었다.
“내가 죽는 순간에 하늘에서 서광이 비칠 것입니다.”
“저 말은 제법 웃기는군.”
총독은 방자하게 소파에 기대어 측근들과 시시덕거렸다. 하늘이 아주 흐린 날이었다. 금방이라도 비가 내릴 듯 먹구름이 가득 끼어 있었다.
그럼에도 파르나는 맑은 얼굴로 웃어 보였다.
“믿으십시오. 이 땅의 구원자가 곧 나타날 것입니다.”
장작에 불이 지펴졌다. 검은 연기가 치솟아 파르나의 모습을 가리기 시작했다. 발치에서 서서히 피어오르는 열기를 느끼며 파르나는 가만히 눈을 내리감았다. 희열과 슬픔과 분노가 뒤섞인 눈빛들이 그녀에게로 모였다.
장작을 집어삼킨 불길이 점점 거세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튀어 오른 불티가 너울거리는 그녀의 옷자락에 붙었다. 불길이 그녀의 발밑에서 아가리를 벌렸다. 파르나는 이를 악물었다. 참을 수 없는 격통이 몰려왔다.
“아아아아악!”
처절한 비명 소리가 길게 울렸다. 광장에 모인 사람들 태반이 고통스러운 얼굴로 눈을 감았다. 총독과 그 측근들만이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저 봐라. 그리도 고고한 척을 하더니 결국은 다른 놈들이랑 똑같지 않아.”
비명은 끊길 듯 끊이지 않았다. 그녀의 발을 시커멓게 집어삼킨 불길은 이제 그녀의 다리를 타고 오르고 있었다. 파르나는 눈을 까뒤집으며 입에 거품을 물었다. 곧 절명할 듯 시야가 어둡게 흐려졌다.
그때, 먹구름 사이로 한 줄기 빛이 내려왔다.
흐린 어둠과 불길을 꿰뚫어 죽어 가는 파르나를 비추었다. 총독의 웃음소리가 뚝 그쳤다. 파르나는 숨을 헐떡이며 울듯이 웃었다. 그것이 그녀의 마지막 숨이었다.
파르나의 고개가 힘없이 꺾이자, 광장에 모인 사람들이 후들거리며 하나둘 주저앉기 시작했다. 치솟는 불길 속에서 죽은 순교자를 향해, 그녀를 비추는 한 줌의 서광을 향해 읍하였다. 사방에서 울음소리가 빗발쳤다. 파르나를 구하소서, 누군가 외쳤다.
“…해산시켜.”
총독이 창백해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당장!”
악을 쓰는 일갈에 화들짝 정신을 차린 치안대가 광장으로 진입했다. 사람들은 저항했으나 맨몸으로 대적할 순 없었다. 울며불며 매달리는 사람들이 광장 밖으로 내쫓겼다.
휑하니 비어 가는 광장에서 오직 불길만이 쉼 없이 타올랐다. 화형대에 매달린 파르나의 시신은 화마에 먹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모두가 떠난 곳에서 홀로 고요히 그녀를 내리비추던 서광마저 어느 순간 자취를 감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