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기는 휘청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새 퉁퉁 부은 오른손이 매섭게 건반을 짓누르고 지나갔다. 흔들리는 치맛자락이 문턱 너머로 사라지고, 불규칙한 발소리는 곧 침묵에 먹혔다.
예후르는 그제야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사방은 어둡고 고요했다. 오롯한 촛불만이 피아노 주위를 밝히고 있었다.
그는 내동댕이쳐진 의자를 반듯하게 세우고 피아노 앞에 앉았다. 건반은 가지런하고 막막했다. 그는 살며시 손을 들어 가운데 도를 눌러 보았다.
선명하게 울리던 소리는 이내 적막 속으로 잦아들었다.
그는 다시 물끄러미 건반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계이름을 알고 악보를 볼 줄 알았지만 연주할 줄은 몰랐다. 예술적인 창조는 그에게서 가장 먼 영역이었다. 그는, 그랬었다.
“길리.”
어둠 속에서 흐릿한 인영이 걸어 나왔다. 예후르는 입술을 작게 달싹였다.
“가서 파르나를 잡아 와.”
“존명.”
인영은 곧 기척 없이 사라졌다. 예후르는 그때까지도 가만히 건반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래.”
“…….”
“다 죽여야지.”
복수는 이미 시작되었다. 뽑힌 칼날은 반드시 피를 보고 말 것이니, 실패할 리 없는 계획이 행여 어그러진다 하여도 칼날은 스스로 죄인의 목숨을 찾아 거두리라.
그의 목숨도.
여자의 목숨도.
여자가 품은 원한에는 관심 없었다. 사람은 누구나 크고 작은 원한을 품고 살기 마련이며, 그는 자신을 향하는 원한의 화살이 익숙하다 못해 지겨웠다. 자신을 죽이고 싶다던 여자의 말은 달리 특별하지 못했다.
다만 복수에 눈이 돌아가 내지르던 소리엔 심히 마음이 기울었다.
그토록 감정적이고, 그토록 폭발적이다. 사람의 복수란 본디 그런 것인가. 그렇다면 여자의 복수를 배우고 싶다. 그는 조금 전 발악하던 여자의 모습과 목소리를 곱씹어 자신의 서투른 복수를 보완하고자 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떠오르는 것은 한결같이 망자의 모습이고 망자의 목소리였으니.
여자에게서 종종 망자를 겹쳐 보았던 것이 사실이나, 정작 여자의 얼굴은 하나도 기억이 안 나고 죽은 이만 떠오르니 일순 당혹감이 앞섰다. 여자의 머리가 길었던가, 짧았던가. 색은 밝았던가.
그는 손끝으로 가만히 아랫입술을 쓸었다. 언젠가부터 그는 스스로를 통제할 수 없는 순간을 맞닥뜨렸다. 어찌할 수 없는 일임을 알면서도 얄궂은 난처함만은 좀체 가시질 않는다.
하지만 그마저 한순간에 불과했다. 잠시 허물어졌던 이성의 탑은 다시 견고하게 틈을 메우기 시작했다.
인과를 메우는 것은 손쉽다.
아마도 안드레아가 어디서 망자와 비슷한 처지를 발견했을 것이다. 음악을 사랑하지만 더는 연주할 수 없는, 악만 남은 사람이 어디 세상에 한둘이겠나. 적당히 다듬어 제게 보내거든 번뇌에 잠 못 이루리라 여겼겠지.
우습게도 이 모든 것은 변명이 아니었다. 망자는 살아 돌아올 수 없다는 절대적인 진리에 비추자면, 얼기설기 짜 맞춘 가설조차 제법 번듯해 보이기에.
그러니 저 여자는 살아 돌아온 망자 따위가 아니다.
그래선 아니 된다는 당위의 문제가 아니었다. 애당초 그럴 수 없다는 가능성의 문제였다.
한때 그 역시 어울리지도 않는 희망이란 것을 품었고, 절대적인 진리에 맞서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고자 했다. 그러기 위해 정말로 모든 것을 다 했다. 예전의 그라면 상상도 못했을, 모든 것을.
그러나 진리는 무너지지 않았다.
꺾인 것은 그 혼자만이었다.
이제 그는 스스로를 저주하며, 절대 불변하는 세상의 질서와 진리를 미워한다. 더는 스스로의 눈을 믿지 못하며, 오직 하나뿐인 빛에 염증을 느꼈다. 그는 더 이상 예전의 그가 될 수 없었다.
그렇기에 여자를 단칼에 죽이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손끝에 박힌 가시처럼 거슬리는 희망이 자꾸 너일지도 모른다는 속삭임을 불어넣어 함부로 가면을 벗기지도 못했다. 드러나는 민낯이 정말로 네가 아니었다간, 복수를 끝내기도 전에 내가 먼저 무너질까 겁이 나서.
참으로 미련하고 미련하다.
하지만 모든 것이 끝날 때까지만 이렇게 미련하면 안 될까.
나는 이제 지쳤고 네가 간절하다. 때로 죽이고 싶은 여자는 때로 품에 안아 보듬어 주고 싶다. 네가 겹쳐 보일 때 그렇다. 저 여자가 대단한 연기를 펼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그저 자신이 보고 싶은 대로 보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기실 중요치도 않았다.
그는 그렇게 해서라도 그녀가 보고 싶었으니까. 이런 식이 아니면, 볼 수조차 없으니까.
건반 위로 가벼이 노니는 흰 손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익숙하게 눈을 감자, 그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예술의 향연이 귓가에서 만개했다. 모두 환각이고 환청임을 알면서도 그는 깨어날 생각을 안 했다. 가능하다면 영원히 환상 속에서 살고 싶었으므로.
그러나 환상임을 자각한 순간에 이미 그는 현실이었다. 흰 손은 흔적 없이 사라지고, 쥐 죽은 듯한 적막만이 남았다. 늘 그랬다. 조금만, 아주 조금만 더 허락되었다면 너의 미소를 볼 수 있었을 텐데.
얼굴을 보여 주지 않는 이여.
너도 날 죽이고 싶었을까.
***
파르나가 교회를 떠난 것은 대략 10년 전이었다.
가혹한 수탈에 굶주려 죽어 가던 동부의 이웃들을 보다 못한 그녀가 교황을 만나 담판을 짓겠노라 성도를 다녀온 직후였다. 그녀는 열패감에 짓눌리는 대신 분노하기를 택했고, 자연스레 분노할 수 있는 자리로 거처를 옮겼다.
다행히 빈민굴은 그녀의 분노를 내보일 수 있는 아주 적합한 장소였다. 모든 것이 부족한 빈민굴에서 유일하게 넘쳐 나는 것이 분노였다. 빈민들은 쉽게 화내고 쉽게 타올랐다. 그들의 심지가 오래가지 못하는 까닭은 심지 꽂힌 양초가 너무나도 얕았기 때문이다.
파르나는 그들의 양초를 두껍게 만들어 주고자 했다. 분노하려면 분노할 여력이 있어야 했다. 싸울 힘이 남지 않은 이들에게 분노는 제 속 갉아먹는 기생충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들에게 조금의 힘이, 양식이, 햇볕이 허락된다면 분노는 어마어마한 원동력으로 탈바꿈할 것이었다.
너희에겐 분노할 자격이 있다.
파르나가 설파하고자 하는 교리는 그 한 가지뿐이었다.
자연스레 그녀는 수도사란 이름을 버리게 되었다. 주교가 된 벗은 그녀를 파문하지 않고 여전히 오스터캄프 교구에 그녀의 이름을 남겨 두었으나, 파르나가 제 발로 교회에 돌아갈 날은 없을 것이었다.
대신 그녀는 스스로를 은자라 칭하기 시작했다. 스스로 여기길 자신은 빈민굴의 은둔자요, 타오르는 분노의 선각자였다. 가진 것 없고 배운 것 없는 이 무지렁이 백성들에게 스스로 떨치고 일어설 방도를 알려 주고자 했다.
그리 외길을 걷다 보니 하나둘 따르는 이들이 생겨났다. 파르나는 제 추종자들에게 달리 해 줄 것이 없어 늘 미안했다. 그녀는 빈털터리고 나약한 인간에 불과했다. 가끔 들어오는 콩 한 쪽, 빵 하나 나누는 것이 해 줄 수 있는 전부였다.
반면, 그녀를 적대하는 이들도 생겨났다.
더러는 그녀를 뜬구름 잡는 사기꾼이라며 질색하는 이들이었으나, 대부분은 빈민굴을 꽉 틀어잡은 건달들이었다. 빈민답지 않은 깨끗한 옷과 그럭저럭 호화스러운 식사를 하는 그들이 총독부와 연결되어 있음은 누구나 짐작할 수 있었다.
그들은 빈민굴을 통제하길 원했다. 아마도 총독의 바람이리라. 총독은 버러지가 땅을 기는 것이 당연하듯 빈민들도 그늘에서 엎드려 사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길 바랐다.
그렇기에 분노하라, 공포를 떨치고 일어나라 설교하는 파르나가 기꺼울 리 없었다.
건달들은 툭하면 파르나를 찾아와 시비를 걸었다. 그녀를 툭툭 건들고 그녀의 추종자들을 마구잡이로 괴롭혔다. 그나마 그녀의 신분이 교회의 수도사이기에 아직 목이 붙어 있는 것이었다.
듣기로 벗인 주교는 심심찮게 총독으로부터 저의 파문을 강요받는다고 했다. 파르나는 그 얘기를 들을 때마다 제법 기쁘게 웃었다. 그 겁쟁이 친구가 그리 뻗댈 때도 있구나. 저의 목이 날아가는 날이 바로 친구가 권력에 다시 한번 무릎 꿇는 날이 되리라 여겼다.
그날이 바로 오늘이었다.
달이 뜨지 않은 한밤, 얼굴을 알 수 없는 괴한에게 납치당하며 파르나는 담담히 그런 생각을 했다. 언젠간 올 날이었다. 그녀의 벗은 겁쟁이이며 동시에 한 교구를 책임지는 주교였다. 언제까지 사사로운 우정에 얽매일 수만은 없었다.
그러나 잡혀 온 곳은 총독부가 아니었다. 혹은, 건달들의 근거지도 아니었다.
파르나는 오스터캄프의 토박이었다. 그녀는 이 도시의 모든 곳을 꿰뚫고 있었다. 창밖 하늘만 보아도 여기가 어디인지 알 수 있건만, 참으로 이상하게도 그녀가 잡혀 온 곳은 한 번도 짐작해 본 적 없는 곳이었다.
어찌해 페임하른 공작이 나를 찾았나.
파르나는 의심스러운 눈길로 어둠에 잠긴 인영을 쏘아보았다. 패배한 맹수, 상처 입은 곰. 한때 동부를 수호하는 자였으나, 이제는 동부를 갉아먹는 괴물로 전락한 자.
파르나는 공작의 성에서 때때로 죽은 채 반출되는 하녀와 하인들이 누군지 알았다. 그중에는 그녀가 사랑으로 보듬어 주었던 빈민 아이들도 있었다. 용서할 수 없는 참극이었다.
그렇기에 페임하른 공작은 분노할 자격을 잃은 한낱 짐승에 불과했다. 총독에 맞서겠다 하여 짐승의 손을 잡을 수야 있겠나.
그때, 어둠 속에서 성냥불이 피어올랐다. 파르나가 반사적으로 퍼뜩 눈살을 찌푸렸다. 눈부신 성냥불은 곧 양초로 옮아갔다. 후, 가벼운 입김에 성냥불이 꺼지자 은은한 촛불만이 사위를 아늑하게 밝혔다.
파르나의 표정이 미묘하게 구겨졌다.
그녀의 앞에 앉아 있던 사람은 페임하른 공작이 아니었다. 난생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북방에선 보기 드문 이국적인 생김새에 한낱 졸부 따위와 비교할 수 없는 기품이 흘렀다.
짐작이 맞다면, 저자는 여기 있어선 아니 되는 사람이다.
“파르나 레르비소.”
나지막한 저음에 파르나는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찔했다. 대단한 위압감이었다. 그저 평범히 의자에 앉아 있을 뿐이건만, 마치 드높은 제단에서 그녀를 굽어보는 듯했다.
그러나 파르나는 굴하지 않고 고개를 빳빳하게 세웠다. 그녀는 분노할 줄 아는 자였다. 10년을 설파한 가르침의 모범이 되어야만 했다.
“엘피도 공작 전하.”
빛 속에서 처음으로 탄생한 광휘의 천사 미할리나의 현신.
그 위명을 그녀도 익히 들어 알았다. 가장 축복받은 사도. 천사들의 사랑을 받는 자. 부활한 뱀을 죽인 영웅.
만인이 우러르는 그의 이름을 그녀만은 따르지 않았다.
뱀으로부터 세상을 구한 영웅도 죽어 가는 이 땅은 모른척했기에. 동부에서 그는 그저 선심 쓰듯 구휼 활동만 펼쳤을 뿐, 그의 마음은 돈벌이에만 있는 듯 보였다. 파르나의 눈에 눈앞의 사도는 페임하른 공작이나 총독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귀하신 분께서 저는 어찌 찾으셨습니까.”
파르나는 짐짓 허리를 가파르게 세웠다. 그녀는 이미 사도의 이중성을 알았다. 저를 동정하던 눈빛과 그럼에도 저를 차갑게 외면하던 교황의 뒷모습을 똑똑히 기억했다.
“네가 해 줘야 할 일이 있다.”
하지만 그 말에는 날카로운 웃음이 먼저 튀어나왔다.
“오밤중에 사람을 납치하여 하신다는 말씀이 고작 그것이라니요. 절 아시는 분이 평소 제가 공공연히 사도를 비방해 왔음은 모르십니까? 제 마음은 이미 교회를 떠났으며, 저는 더 이상 사도를 섬기지 않습니다. 제게 공경을 바라지 마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