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적 위로 얹히는 짤막한 날숨.
연주가 시작되었다.
동굴 속에서 울리듯 낮고 음험한 소리였다. 왼손은 홀로 건반 위를 유영하며 진득하고 무거운 음을 거두었다. 크레셴도, 포르테, 포르테. 메조 피아노, 피아노, 피아니시모. 울렁거리는 음의 진폭을 따라 그녀의 입술이 여닫히고, 오르락내리락하는 음의 높낮이를 따라 미풍처럼 고개가 흔들렸다.
이는 오래된 거장의 찬송곡.
한 번에 많은 음을 짚어야 하는 복잡한 기교와 그에 걸맞은 장엄한 분위기가 일품으로, 흔히들 유명한 피아니스트들이 자신의 실력을 뽐내기 위해 연주하는 곡이었다. 페기 역시 이 곡을 알았다. 펜과 종이를 주면 당장이라도 악보를 완성할 수 있었다.
이다음이 어떻게 전개될지도.
쿵!
순간 높이 쳐들었던 오른손이 건반을 강하게 짓누르며 등장했다. 낮고 무겁게 전개되던 선율 속으로 높고 날카로운 음이 섞여 들었다. 마치 왼손과 오른손이 경주하듯. 서로를 때리고 밀고 당기며 고조되기 시작했다.
미, 레 플랫, 시, 라, 솔 플랫, 도 숍, 레, 라 플랫. 달싹이는 입 안에서 음이 돌고, 연주되는 음을 따라 손끝이 움찔거렸다. 그녀는 건반 위에서 복잡하게 노니는 손을 홀린 듯 바라보았다. 공작새처럼 뽐내는 저 연주자의 손이 마치 제 것이라도 된 것처럼.
마지막 음이 눌렸다.
잦아드는 잔음을 성급하게 끊어 내며 연주자가 힘차게 일어섰다. 열렬한 박수갈채와 환호성이 쏟아졌다. 귀부인들이 눈물을 흘리며 손수건을 던졌다. 보석 같은 그의 손에 닿고자 많은 이들이 팔을 뻗고 또 뻗었다.
그 소란의 도가니 가운데, 페기는 홀로 벼락 맞은 것처럼 굳어 버렸다.
그녀의 시선은 무대 위에서 온 불빛을 맞고 있는 연주자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의 환한 미소, 가지런한 손가락, 세상 모든 것을 다 가진 듯 행복해 보이는 얼굴. 죄 손톱으로 긁어 내리고 싶을 만큼 찬란한 모습.
성한 왼손이 파들거리며 주먹을 꽉 쥐었다. 솟구치는 분기에 턱이 다 떨렸다. 그녀는 치받는 울음기가 번진 눈으로 그를 죽도록 쏘아보았다.
나도.
어쩌면 나는 더.
“…아델라이데.”
어느 순간 예후르가 다가왔다. 나지막한 목소리가 귓가를 감돌고, 정중한 손길이 허리를 휘감았다. 동강 난 생각의 틈으로 그의 존재감이 빠듯하게 차올랐다.
페기는 본능적으로 표정을 빠르게 수습했다. 벅찬 숨을 가라앉히고, 미친 듯이 타오르던 감정에 찬물을 부었다.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그의 호박색 눈이 깊이 모를 호수처럼 고요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들켰을까. 그녀는 조금 불안해졌다. 약점을 잡혔다가 무슨 일을 겪을지 예상할 수 없었다.
그러나 가만히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던 예후르는 입술만 작게 달싹일 뿐이었다.
“이만 돌아가지.”
페기는 요동치는 감정을 짓누르며 발길을 돌렸다. 등 뒤에선 여전히 환호성이 빗발치고 있었다. 피오트르, 위대한 연주자! 별 볼 일 없는 자를 찬양하는 사람들과 도취된 연주자. 그리고 또다시 시작되는 허황된 연주.
페기는 피가 배어 나오도록 입술을 짓씹었다.
눈앞으로 연회장의 문이 열렸다.
쿵.
문이 닫혔다.
***
“…가씨. 전하!”
페기가 움찔하며 고개를 들었다. 마샤가 뾰로통한 표정으로 양손을 허리에 올리고 있었다.
“…그렇게 부르지 말랬잖니.”
“하도 대답이 없으셔서 그런 거지요. 무슨 걱정이라도 있으세요? 무도회 다녀오신 이후로 기운이 하나도 없어 보이세요. 종일 탁자만 두드리시고.”
마샤는 지금도 탁상을 두드리고 있는 그녀의 왼손을 눈짓했다. 두어 번 눈을 깜빡인 페기가 얼른 손을 거두어들였다.
“괜한 말을 하는 걸 보니 할 일이 없나 보구나. 천계율 필사는 다 끝냈니?”
“아….”
마샤가 아차 싶었는지 눈만 대록대록 굴렸다. 페기는 한숨을 내쉬며 손을 내밀었다.
“가져와 보렴. 어디까지 했는지 보자.”
“저… 그런데 아가씨, 지금은 나가 보셔야 해요. 엘피도 공작 전하께서 찾으셔요.”
“…그 사람이? 왜?”
“저도 그냥 아가씨 모시고 오란 소리밖에 못 들었어요.”
페기는 영 내키지 않는 기색으로 일어섰다. 파르나 수도사에 대한 보고를 비롯해 당장 마무리가 급한 일들은 모두 처리했다. 굳이 이 늦은 시간에 자신을 찾을 이유가 없었다.
“너는 여기서 마저 필사하고 있으렴.”
“혼자 가시게요?”
페기는 말없이 망토를 걸쳤다. 안절부절못하며 서 있던 마샤가 얼른 그녀의 손에 촛대를 쥐여 주었다.
“상단에서 일하는 메로포 아저씨한테 부탁해서 양초를 여러 개 구해 왔어요. 계단에선 특히 조심하셔요. 저번처럼 또 넘어져서 다치시면 안 돼요.”
페기가 설핏 웃으며 마샤의 앞머리를 살짝 퉁겼다.
“글씨 단정하게 쓰고 있으렴. 엉망이면 다시 쓰라고 할 거야.”
“네에….”
페기는 홀로 방을 나섰다. 늦저녁 짙은 어스름이 몰려든 복도는 어둡고 싸늘했다.
모퉁이를 돌아 계단으로 진입하려던 그녀는 불현듯 누군가와 맞닥뜨렸다.
“어!”
페기가 흠칫 놀라며 한 발짝 물러선 것에 비해, 상대방은 양팔을 허우적거리며 대차게 나자빠질 뻔했다. 페기는 망토를 여미며 조심스레 촛불로 그를 비추어 보았다. 하인과 별다르지 않게 단출한 차림. 밀짚처럼 부스스한 머리와 주근깨 박힌 얼굴이 묘하게 낯익었다.
“어우, 놀래라. 그렇게 소리 없이 다니면 어떡해요? 거 하녀 아가씨, 조심 좀…. 하녀가 아닌가?”
사내가 눈을 끔벅이며 고개를 쑥 들이밀었다. 페기는 불편한 기색으로 물러섰다.
“누구신가요?”
“그러는 아가씨야말로 누구십니까? 이 성에 있을 만한 여자는 하녀랑 우리 용 기병대 단원들뿐인데.”
페기는 슬쩍 눈썹을 찌푸렸다. 이제야 눈앞의 이 남자가 누군지 짐작이 갔다.
“아, 혹시 아가씨가 바로 그 상단에 새로 들어왔다는…?”
“네. 아마도 그게 나인 모양이네요.”
“와, 말만 듣다가 직접 뵙는 건 이번이 처음이지 말입니다! 저는 니체타라고 합니다. 엘피도 공작 전하 밑에서 용을 끌고 다니죠.”
니체타는 소개를 마치고도 멀뚱멀뚱 그녀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페기는 점차 그의 시선이 부담스러워졌다.
“전하께서 찾으셔서 이만 가 봐야겠습니다.”
“아, 네. 물론 그러셔야죠. 저, 그런데 말입니다. 혹시 차라 도련님이랑 아는 사이십니까?”
“네?”
“제가 며칠 전 성궁에 다녀왔지 말입니다. 우연히 차라 도련님을 뵈었는데 저희 상단 쪽으로 최근에 긴 적갈색 머리에 우울해 보이는 여자가 한 명 오지 않았느냐 여쭈시길래요. 아무리 봐도 아가씨를 말씀하신 것 같아서 말입니다.”
페기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맞는 것 같네요. ”
“역시! 도련님께서 아가씨를 많이 걱정하고 계십니다. 가능하시다면 편지라도 한 장 보내시는 편이… 아, 당분간 편지는 안 되겠구나.”
“그게 무슨 소리예요?”
“어, 모르십니까?”
니체타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차라 도련님, 미에투넨으로 떠나셨잖습니까. 황태자의 생일을 축하하는 사절단으로.”
멀거니 니체타를 응시하던 페기가 황급히 그를 지나쳐 계단을 뛰어 올랐다. 시커먼 복도를 내달리며 심장이 불안하게 뛰었다.
그녀는 노크할 정신도 없이 방문을 열어젖혔다. 어두운 방 안에서 가만히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던 예후르가 고개만 비스듬히 꺾어 그녀를 보았다.
“늦었….”
“왜 차라 도련님이 미에투넨으로 가시는 건가요?”
페기가 성큼성큼 책상 앞으로 다가갔다.
“설마 황태자에게 페임하른 공작의 친서를 전달할 사람이 그분인 건 아니겠죠?”
“맞아.”
“맙소사, 그 위험한 일을 어째서…! 왜 저한텐 지금까지 말씀하지 않으셨던 거죠?!”
“내가?”
예후르가 의아하게 눈을 깜빡였다.
“너한테?”
“…….”
“왜?”
페기는 신물처럼 올라오는 숨을 간신히 삼켰다. 정말로 모르겠다는 듯 빤한 그의 시선이 이 갈리도록 원망스러웠다.
“…중요한 일이잖습니까. 저를 보좌로 쓰시려거든 그런 정보는 미리 알려 주셨어야….”
“네가 알아야 하는 정보는 모두 알려 주고 있다. 너에게 알려 주지 않는 정보는 네가 몰라도 된단 뜻이지.”
“하지만….”
페기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카니나의 페기가 아닌 아델라이데 세르페제에겐 과한 반응임을 알았다. 그러나 차라는 하나뿐인 그녀의 아우였다. 그녀를 끝까지 믿어 준 유일한 사람.
“…반란을 일으키기 전에 황태자를 미리 빼돌리려는 계획으로 압니다.”
동부에서 반란이 일어나면, 그 주모자의 친아들인 황태자는 목숨이 위태로워진다. 그 전에 황태자에게 접근하여 그의 마음을 돌려야 했다. 그것이 이번에 차라가 맡은 임무였다.
“들키면 위험해지실 겁니다.”
“…….”
“하나 남은 동생을 아껴 주지 않으실 건가요?”
그녀가 죽을 때 예후르는 없었다.
페기는 그 사실을 원망하지 않았다. 그때 그는 뱀을 잡으러 갔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는 곧 반란이 일어날 나라의 수도로 손수 차라를 집어넣고 있었다. 만약 이번 일로 차라가 잘못된다면, 그녀는 평생 예후르를 저주할지도 몰랐다.
비딱하게 고개를 꺾고 있던 예후르가 그제야 의자에 똑바로 앉았다. 반듯하게 세워진 금안이 무미건조한 빛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우선 차라는 네 생각처럼 위험하지 않다. 설사 황태자에게 페임하른 공작의 친서를 전달했다는 정황이 밝혀져도 빌헬미나 3세는 섣불리 차라를 위협하진 못할 테지. 어찌 되었든 그 애는 사도니까.”
“…….”
“그럼에도 만일을 대비해 내 수하들에게 차라를 지키란 명을 내려 두었다. 네 말대로 그 애는 하나 남은 내 동생이고, 그 아이마저 헛되이 잃을 순 없으니.”
예후르는 손바닥 위로 턱을 괴며 무심하게 읊조렸다. 페기는 온몸으로 퍼지는 안도감을 내색하지 않으려 부러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그나저나 차라와 잘 아는 사이인 듯한데.”
예후르가 가늘게 웃었다.
“차라와 안드레아와 피아제 백작이라…. 도저히 접점을 찾을 수가 없군.”
“…….”
“아니면 그들의 접점이 바로 너인가?”
페기는 가까스로 마른침을 삼켰다. 빙글빙글 웃고 있는 그의 얼굴이 그 어떤 추궁보다 섬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