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2화 (102/328)

예후르가 두툼한 서류를 넘겼다. 페기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은자(隱者) 파르나?”

“빈민굴에서 교리를 설법하는 수도사다. 혹자는 미치광이라 하고, 혹자는 진정한 현자요 순결한 성직자라 하더군.”

페기는 종이를 한 장 넘겼다. 무질서한 빈민굴에서 하늘의 섭리를 외치고 다닌 일화, 빈민들과 기꺼이 초목을 베어 먹은 일화, 빈민굴을 지배하는 건달들과 싸움이 붙었던 일화 등이 나열되어 있었다.

게다가.

“…사도에 대한 모욕적인 언사?”

예후르가 피식 웃었다.

“흥미로운 대목이지.”

“사도를 섬기지 않는 것은 성직자에겐 중대한 죄입니다.”

“그자가 아직도 성직자라면 말이지. 연회장에 가면 오스터캄프의 주교가 있을 거다. 내가 총독과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넌 주교에게 이자에 대해 물어라. 어째서 교회의 규율대로 움직이지 않는 것인지, 파문이 된 것인지, 이자의 성향은 어떤지.”

페기는 조금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무명의 수도사에게 관심을 가지는 이유도 궁금했지만, 빈민굴의 소식을 그가 꿰뚫고 있는 것이 가장 이상했다.

“이런 정보는 어디서 얻으시는 건가요?”

막시모가 남겨 둔 서류에도 빈민굴에 대한 기록은 없었다. 예후르는 무심하게 대꾸했다.

“내가 정녕 돈 때문에 상단을 현지화했다고 생각하나?”

페기는 입을 다물었다.

오르골리오 상단은 탐보프에 진출한 순간부터 현지화에 착수했다. 통상보다 높은 임금으로 인력을 채용했으며 빈민 구제 활동에도 열심이었다. 당장 그녀가 아는 빈민굴 출신의 급사들만 해도 열댓 명에 달했다.

“돈이 중요한 이유는 돈으로 사람을 부릴 수 있기 때문이야. 돈으로 믿음을 살 순 없지만 정보를 얻는 것쯤은 가능하지. 기억해 두도록 해.”

“명심하겠습니다.”

페기는 살짝 고개를 숙였다. 창밖으론 어느새 총독부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벽면에 수십 개의 횃불을 지핀 총독부는 늦저녁에도 마치 한낮처럼 밝았다. 예후르의 손을 잡고 조심스레 마차에서 내려오던 페기는 싸늘한 밤바람에 어깨를 떨었다. 얇은 비단을 여러 겹 덧댄 남부식 드레스는 기실 한겨울 북부에서 입을 만한 옷이 못 되었다.

그러자 잠시 멈칫했던 예후르가 그녀의 어깨를 끌어안고 걷기 시작했다. 페기는 얼결에 그의 품에 안긴 모양새가 되었다. 그녀는 참을 수 없이 이상한 기분에 휩싸여선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다행히 총독부 안은 그다지 춥지 않았다. 페기는 얼른 그의 품에서 빠져나와 하녀에게 망토를 맡겼다. 후끈한 공기 때문인지 당혹감이 열기처럼 피어오르는 것 같았다. 그녀는 목구멍을 조이며 울렁거리는 속을 애써 다독였다.

연회장 앞에 두 사람이 서자, 시종이 크게 외쳤다.

“엘피도 공작 전하이십니다!”

벌어지는 문틈으로 눈부신 샹들리에 불빛과 감미로운 음악 소리가 엄습했다. 페기는 그와 팔짱 끼지 않은 손으로 치맛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이런 건 처음이었다. 그녀의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연회는 시작하기도 전에 엉망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긴장되면 그냥 웃어.”

작게 속삭이는 목소리에 페기가 고개를 들었다. 그는 흘끗 눈만 내려 그녀에게 시선을 주었다.

“넌 그래도 돼.”

페기는 다시 정면을 보았다. 그리고 익숙한 미소를 지어 올리며 그를 따라 연회장 안으로 들었다.

귀부인들의 웃음소리, 신사들의 비밀스러운 속삭임이 잦아든 사위는 고요했다. 사람들은 제 눈을 의심하듯 황망히 뒤로 물러났다. 연주자들마저 손을 멈춘 채 멍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연회장 안쪽으로 들어가자, 기다렸다는 듯 작달막한 키의 사내가 등장했다.

“엘피도 공작 전하.”

예후르는 무료하게 손을 내밀었다. 사내는 두 손으로 그의 손을 붙잡으며 기꺼이 반지에 입술을 맞추었다.

“동부의 총독 가모브가 감히 경애하는 사도께 인사 올립니다.”

예후르는 느른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거두었다.

“총독은 오랜만에 뵙는군요.”

“제가 직접 찾아뵈었어야 마땅하나, 그동안 상황이 여의치 못했습니다.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바쁘신 분을 오라 가라 할 수는 없지요.”

예후르는 총독의 뒤에서 안절부절못하는 성직자를 보았다.

“그대가 오스터캄프의 주교인가?”

“저, 전하….”

금방이라도 기절할 것처럼 창백하게 질린 주교가 휘청휘청 다가와 그의 앞에 무릎 꿇었다.

“부, 불의 종, 불의 사자, 시작을 여시는 광휘의 천사 미할리나의 현신께 감히 인사드립니다. 저, 전 제가 살아서 이렇게 전하를 뵐 수 있을 줄은 꿈에도 상상을 못 했….”

주교가 울 것처럼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그의 신발에 이마를 맞대었다. 예후르는 찡그리듯 웃으며 그녀의 어깨를 잡아 일으켰다.

“인사가 과하군.”

“소, 송구합니다. 너무 가, 갑작스러워서….”

“총독의 초대에 응하는 답장을 보냈는데, 듣지 못했나?”

“연회에 참가하시는 분들을 깜짝 놀라게 해 주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주교님의 모습을 보니 제 장난이 너무 과했던 것 같군요.”

총독이 불룩 튀어나온 배를 어루만지며 호탕하게 웃었다. 주교는 얼굴을 붉히며 황급히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 냈다.

얼어붙었던 분위기가 조금 풀어지자, 얼빠진 표정으로 멍하니 그를 바라보던 사람들이 조금씩 다가오기 시작했다. 대부분 동부로 이주한 본토인들로, 동부의 상류층을 형성하고 있는 이들이었다. 개중에는 동부 상인 조합에서 보았던 상단주들도 있었다.

“오, 전하.”

감격한 얼굴로 인사를 올리는 이들을 예후르는 끝없이 받아 주었다. 겉보기에 그는 자비로운 하늘의 사자나 다름없었다. 눈부신 샹들리에 불빛 아래 조각 같은 그의 얼굴은 더욱 윤이 났다.

“그나저나 이쪽 아가씨는 누구신가요?”

누군가 용기 내어 물었다. 연회장에 들어올 때부터 따가운 시선을 느꼈던지라 페기는 크게 당황하지 않았다.

그녀는 무릎을 살짝 굽히며 인사했다.

“아델라이데 세르페제입니다. 엘피도 공작 전하의 가신으로 있습니다.”

“교국에서 오신 모양이군요. 드레스가 참 아름다워요.”

귀부인들이 그녀의 세련된 남부식 드레스를 부러운 눈길로 훑어보았다. 그녀들 역시 요사이 유행하는 남부식 드레스를 입고 있었으나, 밑단의 모양새와 치맛자락의 자수에 북방 특유의 투박함이 묻어났다.

총독이 웃으며 말을 보탰다.

“조금 아쉽게 되었습니다. 만약 세도파 양이 동부에 있었다면, 전하와 함께 더욱 아름다운 한 쌍이 되었을 텐데요.”

페기는 저도 모르게 예후르의 눈치를 살폈다. 그는 변함없이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사람들이 기다렸다는 듯 목소리를 죽여 떠들기 시작했다.

“듣자 하니 세도파 양은 부친인 바도비체 후작을 따라 미에투넨으로 올라갔다고 하더군요. 곧 황태자 전하의 생일 연회가 있으니 말입니다.”

“오, 역시 연회에 참가하시는군요. 그런데 세도파 양이라면 바도비체 후작의 장녀 아니던가요? 그럼 그 아가씨가 후작가를 잇는 걸까요?”

“둘째가 가문을 잇는다고 들었습니다. 세도파 양은 전하와 혼인하면 엘피도 공작 부인이 될 테니까요.”

“그런데 왜 아직도 결혼을….”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총독이 조금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용서하십시오. 중앙 정계에서 떨어진 외진 곳인지라 늘 가십에 목말라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 대상이 전하나 세도파 양처럼 고귀한 신분일수록 더하지요.”

“…세도파 양을 잘 아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저 미에투넨에 있을 때 교분을 나누었을 뿐입니다. 요즘도 간간이 편지로 안부를 주고받고 있지요.”

총독이 흐뭇하게 말했다.

“제가 지금 이렇게 전하를 뵙고 있는 것을 알면 아마 발을 동동 구를 겁니다. …세도파 양은 늘 전하를 그리워하니까요.”

마지막 말을 흘리며 총독은 넌지시 예후르의 표정을 살폈다. 그러나 예후르는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연회장을 둘러볼 뿐이었다. 어느새 재개된 음악 소리가 부드럽게 흐르고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춤곡이군요.”

그는 페기의 손을 잡으며 걸음을 옮겼다. 페기는 슬그머니 뒤를 돌아보았다. 총독이 쓴웃음을 삼키고 있었다.

그들은 연회장 중앙으로 들어갔다. 춤추던 사람들이 거리를 벌리며 그들 주변으로 널찍한 공간이 남았다. 자연스럽게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리던 페기는 문득 제 허리를 잡는 그의 손길을 느끼곤 빠르게 눈을 깜박였다. 춤이 너무 오랜만이었다.

스텝이 시작되었다.

다행히 그녀의 발은 엉키지 않고 물 흐르듯 움직였다. 기억에 각인된 것처럼 생각하지 않아도 다음 동작으로 이어졌다. 수십 수백 번 춰 본 춤이었다. 그녀는 그에게서 춤을 배웠다.

페기는 강박적으로 그의 가슴팍을 응시하며 새록새록 떠오르는 기억들을 잇새로 씹어 삼켰다. 평소에는 내 것이 아닌 것처럼 멀게만 느껴지다가, 갑자기 이렇게 불쑥 치고 올라오는 옛 기억들이 못내 불편했다. 살아난 것은 그녀의 몸뚱이지, 옛 기억과 옛 삶이 아니었다.

“춤을 잘 추는군.”

문득, 머리 위에서 그의 속삭임이 떨어졌다.

“누구에게 배웠지?”

“…기억나지 않습니다.”

“어째서?”

페기는 지그시 물고 있던 입술을 놓았다.

“기억하고 싶지 않으니까요.”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어쩐지 비웃음처럼 들렸다. 페기는 입 안의 여린 살을 깨물며 도전적으로 눈을 치떴다.

“왜 결혼을 미루시나요?”

그는 침묵했다. 페기는 우뚝 멈추어 있는 그의 목울대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세도파 양은 전하께 헌신적이라고 들었습니다. 바도비체 후작가는 탐보프에서 제일가는 명문가니 전하께 큰 힘이 되어 줄 수도 있겠죠. 더 미루다간 파혼을 당하실지도 모릅니다.”

예후르의 나이 스물일곱이었다. 큰 흠이 없다면 이미 아이 한둘은 낳았을 때였다. 물론 그는 비할 데 없이 고귀한 사도이기에 누구도 그를 흉볼 수 없겠으나, 세도파는 사정이 달랐다.

명문가의 장녀.

가문을 잇지 않는다면 정략결혼으로 가문의 명망을 유지하는 데에 쓰이는 것이 당연한 위치였다. 예후르는 최고의 신랑감이지만 몇 년째 지지부진한 약혼만 유지된다면 상황은 조금 달라질 것이었다.

아마도 가문으로부터 큰 압박을 받고 있으리라. 여태 약혼이 유지되고 있는 건 십중팔구 세도파의 고집 때문이 분명했다.

“내가 결혼하길 바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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