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1화 (101/328)

“총독만이 이유는 아니야. 빌헬미나 3세는 동부의 기세를 꺾기 위해 아주 많은 일들을 벌였지. 설명할 수 있겠나?”

“대표적으로 이주 정책이 있습니다. 동부의 백성들을 무작위로 뽑아 본토로 강제 이주시키고, 본토의 백성들로 하여금 동부 이주를 장려했지요. 황제로부터 경제적 지원을 받은 본토의 백성들은 동부 적응에 성공했고, 이들은 현재 총독의 굳건한 지지층이 되어 주고 있습니다.”

이주 정책은 동부의 독립 의지를 말살시킨 가장 대표적인 정책이었다. 강제 이주당한 소수의 동부인들은 본토에서 힘을 쓸 수 없었으며, 본토인들이 침투한 동부 사회 곳곳에선 균열이 일어났다. 하나로 모여 굳건했던 동부인들의 의지가 뿌리부터 흔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동부 상인 조합에 소속된 상단주들도 대부분 그때 이주한 사람들이지. 동부에 눌러앉아 농민들을 감독하면서, 그들이 추수하는 곡식을 모아 본토로 이송하는 것을 영광으로 아는 자들이다.”

페기는 오늘 조합 회의에서 들었던 빌헬미나의 치하를 떠올렸다. 본토 출신의 상인들은 자신들이 눌러앉은 이 땅의 농민들의 애환에 대해선 조금도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턱을 괸 채 그녀를 지켜보던 예후르가 물었다.

“그럼 나는 왜 조합에 가입하려 했을까?”

페기는 주눅 들지 않고 그의 질문을 받아쳤다. 이건 시험이었다.

“조합에 축적된 자금이 상당하다고 들었습니다.”

조합은 동부에서 은행 역할을 겸하고 있었다. 소속된 상단들은 물론이요, 부유한 본토 출신들이 애용하니 조합관 지하에 저장된 금궤만도 어마어마할 것이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자금이 흐르는 경로였다.

여러 갈래의 돈줄이 모이는 곳.

“총독이죠.”

예후르는 눈을 가늘게 떴다. 페기는 거침없이 말을 이었다.

“동부 상인 조합은 총독의 자금줄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총독이 요청하면 아주 값싼 금리로 돈을 융통해 주지요. 물론 돌려받을 생각 없이 상납하는 금액도 상당합니다. 그 대신 총독은 조합에 부여된 면세 혜택을 유지해 주고 있고요.”

기실 상단에게 부여되는 동부의 세금은 이치에 맞지 않을 정도였다. 빌헬미나의 총독들은 동부 토착의 상업을 말살시키기 위해 본토 출신이 구심점이 된 조합을 노골적으로 지원해 주었다.

그 결과, 현재 동부에서 살아남은 비(比) 조합 상단은 폭리를 추구하는 리누스 도시 연맹의 상단들뿐이었다.

“전하께선 총독을 무너트리려 하십니까?”

조합의 자금을 삼키려면 총독과의 대치는 불가피하다. 역으로, 총독을 무너트리면 조합의 자금을 손쉽게 가로챌 수 있었다.

“넌 어떻게 생각하지?”

예후르가 묘한 미소를 띠며 물었다. 페기는 무릎 위에 놓인 손을 꾹 부여잡았다.

“반란을… 꾀하신다고 생각합니다. 조합의 자금은 아마도 부족한 군비를 확충하는 데 쓰일 테고요.”

“…….”

“하지만 그 이상은 모르겠습니다. 반란으로 전하께서 무엇을 얻고자 하시는지는.”

반란이 목적이 될 수 있는 사람은 페임하른 공작을 비롯한 동부인들이었다. 그들은 반란을 통해 작금의 핍박받는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으므로.

그러나 예후르는 아니었다. 그는 탐보프는 물론이요, 동부와도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핍박받는 사람들을 구제하기 위함이라기엔, 그것이 굳이 탐보프의 동부여야 하는 이유도 없었다.

“짧은 시간 안에 꽤 많은 것을 파악했군.”

예후르가 싱긋 웃었다. 페기는 그저 말없이 고개만 조아렸다. 상단과 현재 동부의 정세를 파악한답시고 막시모가 두고 간 방대한 양의 자료를 며칠 동안 읽고 또 읽었다. 그녀는 정말로 이 일을 잘해 내고 싶었다.

예후르가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추측이 옳다. 내게 동부의 반란은 그저 수단에 불과해. 목적은 따로 있지.”

그는 좁은 창 앞에 섰다. 창밖으로 멀리 우뚝 솟은 총독부의 건물이 보였다.

“총독에 대해선 얼마나 알고 있나.”

페기는 머릿속으로 빠르게 총독에 대한 정보들을 정리했다. 가모브 총독. 한미한 가문의 사생아. 말단 행정관 출신.

“맞아. 본래 미에투넨의 궁정에서 일하던 말단 행정관이었으나, 빌헬미나 3세의 눈에 들어 측근으로 자리 잡았지.”

“전임 총독들과는 성향이 많이 다르다고 들었습니다.”

강력한 치안대를 앞세워 강압적인 정책을 펼쳤던 전임 총독들과 달리, 가모브 총독은 옥죄었던 규제를 풀고 유화적인 정책을 펼치고 있었다. 덕분에 총독임에도 불구하고 여론이 나쁘지 않았다.

“빌헬미나 3세가 사람을 잘 쓴 거다. 강하게 누르기만 하면 언젠간 터지기 마련이니까. 적당한 시점에 적당한 인재를 인선한 것이지.”

“바스토뉴의 용병들이 도착하면 반란을 일으키실 건가요?”

가모브 총독이 들어선 이후로 오스터캄프 치안대의 규모는 축소되었다. 언제까지고 동부에 본토의 병력을 쏟아부을 수만도 없는 노릇이며, 더 이상 치안대의 힘을 이용해 동부인들을 찍어 누르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다.

“아니. 단순히 군사적인 힘만으로 오스터캄프를 탈환하는 건 아무런 의미도 없다. 동부인들은 이미 페임하른 공작을 비롯한 구세력과 가모브 총독을 같은 선상에서 비교하고 있어. 오히려 무능력한 구세력에 의지하느니, 차별받는 줄 알면서도 유능한 총독에게 빌붙는 것이 더 낫다고 여기고 있지.”

총독에겐 돈이 있다. 권력이 있고, 빵이 있었다. 더욱이 가모브 총독은 겉으로나마 동부인들을 사람처럼 대우해 주니, 지금 이 상태가 나쁘지 않다는 것이 동부인들의 중론이었다.

“그러니 우리가 할 일은 총독을 안에서부터 무너트리는 것이다.”

실상은 전임 총독들과 별다를 바 없는 추악한 민낯을 드러내야 한다.

그렇게 총독에 대한 민심이 흔들리고, 의지할 곳 잃은 백성들이 영웅을 찾아 헤맬 때.

“바로 그때, 페임하른 공작이 등장하는 것이지.”

기세는 들불과 같았다. 메마르고 척박한 땅일수록 들불이 빠르게 번지는 것처럼, 핍박받아 목마른 사람들일수록 기세는 빠르게 번질 것이다.

“총독을 끌어내리고 오스터캄프를 탈환한다면 동부를 휘어잡는 것은 금방이다. 우리는 그저 페임하른 공작이 화려하게 귀환할 수 있도록 판을 깔아 주기만 하면 돼.”

“총독이 그리 쉽게 무너질까요?”

“교활한 자다. 강력한 치안대로 밀고 나갔던 전임 총독들보다 오히려 약점을 찾기 힘들지.”

“…….”

“그러니 우리가 노리는 것은 민심이다.”

차별받고 있다는 자각은 개인의 열등감을 자극한다. 그러나 소속된 집단 전체가 차별받고 있다는 자각은 걷잡을 수 없는 분노를 일으킨다.

“혼자서는 약하지만 혼자가 모인 다수는 약하지 않아. 나는 그저 그들이 들고일어날 계기를 만들어 주기만 하면 돼.”

예후르가 빙긋 웃었다.

“애당초 시작부터 기울어진 판이다. 상대가 정당하지 못한 수를 쓰는데, 나 혼자만 정의로울 필요는 없지.”

페기는 슬쩍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 말하는 예후르가 어쩐지 낯설게 느껴졌다.

“가모브 총독을 직접 본 적 있나?”

“아니요.”

“앞으로 무너트려야 하는 상대를 모른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지.”

책상으로 걸어온 예후르가 서랍에서 서신을 꺼냈다. 조심스레 서신을 건네받은 페기가 유려한 필기체를 읽어 내렸다.

“…총독이 전하를 초대했군요.”

“춤은 좀 추나?”

페기는 불안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예후르가 슬며시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다행이군. 준비하도록 해.”

***

페기는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어떠세요?”

조심스러운 물음에도 그녀는 대답이 없었다. 마샤는 조금 불안한 표정으로 그녀의 옷매무새를 매만졌다.

“머리를 조금 더 다듬어 드릴까요? 여러 갈래로 땋아서 틀어 올리면 더 잘 어울리실 거예요.”

“…아니야. 지금도 괜찮아.”

페기는 좀처럼 거울 속 제 모습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정확히는 자신이 입고 있는 드레스에게서.

물에 탄 수채 물감처럼 연한 분홍빛이 아름다운 남부식 드레스였다. 얇은 비단 천을 여러 겹 덧대어 색이 진하게도 연하게도 보이는 풍성한 치맛자락이 일품이었다. 게다가 치맛자락에 작은 보석들이 알알이 박혀, 불빛을 받을 때마다 우아한 빛을 내뿜었다.

마샤는 뺨을 조금 붉히며 치맛자락을 만지작거렸다.

“참 아름다운 드레스예요. 엘피도 공작 전하께서 손수 고르셨다는데, 안목이 좋으신가 봐요.”

“…악취미지.”

“예?”

페기는 입술을 다물었다.

이것은 그녀가 죽기 전, 스무 번째 생일 연회에서 입었던 드레스와 아주 유사했다.

페기는 도대체 예후르가 무슨 생각으로 이런 드레스를 만들어 보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연회장에서 마귀가 튀어나온 날이었다. 그로서도 좋은 기억이 아닐 텐데, 구태여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하지만 내키지 않아도 그의 명을 따라야 했다. 페기는 여전히 낯설게 느껴지는 남의 얼굴을 응시했다. 초상화로 보았던 이 얼굴의 주인은 참으로 쾌활해 보였는데, 자신이 그 거죽을 뒤집어쓰자 이보다 더 우울해 보일 수가 없었다.

“이만 가셔요, 아가씨. 전하께서 기다리시겠어요.”

마샤가 그녀의 어깨 위로 흰 모피 망토를 걸치며 재촉했다. 페기는 더디게 거울에서 시선을 뗐다. 벌써 창밖으론 붉은 노을이 몰려들고 있었다.

예후르는 마차 앞에서 하녀에게 장갑을 받아 끼고 있었다. 인기척에 고개를 돌린 그가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응시했다. 어쩐지 어색한 기분이 들어 페기는 슬며시 양손을 맞잡았다.

문득 예후르가 미소를 지었다.

“잘 어울리는군.”

웃기지도 않아.

페기는 차오르는 말을 꾹 삼키며 얌전히 눈을 내리깔았다. 예후르가 부드럽게 손을 내밀었다. 페기는 바늘이 콕콕 찌르는 것처럼 따끔거리는 목구멍을 애써 옥죄며 그의 손을 잡았다. 마음 같아선 마샤의 손을 잡고 마차에 오르고 싶었다.

곧 마차가 출발했다. 페기는 말을 타고 따라붙는 호위들이 페임하른 공작의 기사들임을 어렵지 않게 알아챘다.

“숨기지도 않으시는 건가요?”

“숨길 생각이었으면 공작저에 머무르지도 않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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