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화 (100/328)

“요앙 오귀스트는 30년째 라발과 세잔의 왕위를 겸직하고 있으며, 티에리 황태자가 높은 확률로 두 나라의 왕위를 물려받을 것입니다. 탐보프와 라발의 관계가 완화되어 세잔이 다시 중개 무역에 참여할 수 있길 바라는 것은 지금으로선 지나치게 낙관적인 기대지요. 리누스 도시 연맹의 상단들 역시 이를 알기에 대놓고 횡포를 부리는 것입니다.”

실제로 리누스 도시 연맹의 상단들은 동부 상인 조합에 가입하는 것을 거부하고 있었다. 조합에 가입할 시 얻을 면세 혜택보다, 조합의 간섭으로 낮게 책정될 가격에서 올 손실이 더욱 크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희 상단은 그들과 같지 않습니다. 조합에 가입하여 정당한 회비를 내고, 조합원으로서의 혜택을 누리며, 모두가 감당할 수 있는 가격을 책정할 것입니다. 리누스 도시 연맹의 상단들과 달리 저희 상단이 폭리를 취하지 않았음은 여기 계신 조합원 여러분들께서 더 잘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몇몇이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가 손을 들며 물었다.

“오르골리오 상단이 리누스 도시 연맹처럼 폭리를 취하지 않는 이유는 대체 뭡니까? 솔직히 말해 리누스 도시 연맹이 그렇게 교만하게 나올 수 있었던 건 그래도 되었기 때문입니다. 대체자가 없으니까요. 당신들도 우리 조합에 가입하여 정의로운 척을 하는 것보단, 리누스 도시 연맹과 담합하는 편이 더 이득 아닙니까?”

“생각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나 지나치게 근시안적인 방향이라 결론 내렸습니다.”

“오르골리오 상단은 더 큰 그림을 보고 있단 소립니까?”

“네. 저희 상단은 동부 상인 조합 가입을 계기로 탐보프 전역에 진출할 계획입니다.”

단순히 몇몇 지방에서만 활동할 것이라면 지나친 폭리를 취해도 오래갈 수 있다. 각 지방 지배자의 환심만 사면 활동에는 지장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국가의 전역으로 진출할 생각이라면 가능한 한 현지화되어야 했다. 활동 범위가 넓어질수록 현지 인력을 채용하는 것이 이득일뿐더러, 서로 다른 분야의 상단들과 현지 지배층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지 않는 이상 눈 밖에 날 가능성이 커지기 때문이다.

“아시다시피 리누스 도시 연맹의 상단들은 그럴 능력도, 그럴 의지도 없습니다. 연맹의 도시 국가들은 자체적으로 라발과 탐보프를 구역화하여 각각의 도시에게 상권을 배분하였으니까요. 따라서 그들은 배당된 상권 이상으로 진출할 생각이 없습니다. 그 즉시 연맹에서 축출될 테니까요.”

“…….”

“하지만 저희들은 다릅니다.”

페기는 상인들과 눈을 맞추었다.

“탐보프에 왔으니 탐보프의 상단이 되려 합니다. 먼저는 동부에 왔으니 동부의 상단이 되려 합니다. 동부에서 활동하고자 동부 상인 조합에 가입해 동부의 관습을 따르려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겠지요.”

좌중의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애당초 오르골리오 상단은 탐보프에서 잘 생산되지 않는 라발의 특산품을 다루었으므로, 조합 내에는 경쟁 상단이 없었다. 가입 허가를 낙관적으로 볼 수 있는 가장 큰 이유였다.

그러나 페기는 마음을 놓지 않았다. 가장 중요한 관문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 뭐, 대충 잘 들었는데요. 그래서 그쪽 상단의 가입이 우리 조합원들에겐 어떤 이득이 된단 겁니까? 막말로 댁들이 저렴하게 상품을 공급한다 한들, 우리 상단에게 무슨 이득이 있다고.”

툴툴거리는 소리에 많은 상인들이 동의를 표했다. 당연하게도 오르골리오 상단이 공급하는 라발의 특산물은 모두 소비재였다. 오르골리오 상단의 조합 가입으로 가장 이득을 볼 집단은 상단이 아닌 귀족과 중산층이었다.

“옳은 말씀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한 가지 제안을 드리려고 합니다만….”

페기가 반듯하게 웃었다.

“그에 앞서 조합원 여러분들께 여쭙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이 회의장의 건축 양식은 무엇입니까?”

“무엇이냐니… 라발의 양식을 본뜬 것이 아닙니까? 저기 저 샹들리에도 그렇고.”

꽃잎 모양으로 퍼지는 크리스털 샹들리에는 라발의 궁정에서 유래된 장식이었다. 빌헬미나 3세가 황궁 연회장에 모조품을 단 뒤로 탐보프 전역에서 유행을 타고 있었다.

“그럼 많은 조합원 여러분들께서 입고 계신 옷의 문양은 어떻습니까?”

“이건 리누스 도시 연맹의 일원인 위스누아의 전통 문양이지요. 요새 귀부인들의 옷에서도 금사와 은사를 번갈아 수놓는 이 독특한 문양이 아주 인기입니다.”

“맞습니다. 라발과 리누스 도시 연맹을 비롯한 남방의 문화들이 탐보프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지요. 덕분에 오만방자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남방의 물건을 퍼 나르는 리누스 도시 연맹의 상단들이 수십 년째 승승장구하고 있는 것일 테고요.”

상인들의 표정이 설핏 굳었다. 리누스 도시 연맹이 지난 30년간 눈에 띄게 부유해진 데는 탐보프의 남방 문화 유행이 큰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꼭 북방만 남방의 문화를 향유해야 할까요?”

“…….”

“남쪽 사람들 눈에 북방의 탐보프 문화는 어떻겠습니까?”

상인들의 눈빛이 매서워졌다. 벌써 머릿속으로 이득을 계산하는 자들이 수두룩했다.

“그게 우리가 하고 싶다고 해서 되는 일입니까? 남쪽 사람들 취향을 우리가 어떻게 바꿉니까?”

“물론 당장 시도할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품질 개량과 남방의 실상에 맞는 상품 변형이 필요하겠지요. 그러나 한번 시도해 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여겨지지 않으십니까?”

페기가 제단 아래로 손을 뻗자, 마샤가 얼른 모피를 건네주었다.

“탐보프의 모피는 최상급으로 여겨지지요. 겨울에도 따스한 라발 남부에서 유행을 타긴 어렵겠으나, 리누스 도시 연맹과 세잔, 라발 북부에서는 충분히 가능성이 있습니다. 다만 지금의 투박한 모양을 벗어나 연령과 성별, 계층에 맞게 세분화를 해야겠지요.”

“…….”

“이외에도 탐보프에는 남부에서 찾아볼 수 없는 희귀한 물건들이 많습니다. 예컨대 탐보프의 전통 인형은 남쪽 사람들의 눈에 기괴하지만 한편으론 매혹적으로 느껴질 것입니다. 낯섦과 매력은 종이 한 장 차이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어떻게 포장하느냐지요.”

인기 있는 통속 소설에서 한 줄 언급된 것만으로 떼돈을 번 식당이 있다. 유력한 가문의 귀부인에게 진상한 장신구가 다른 이들의 눈길을 사로잡아 단번에 일류로 올라선 보석상도 있었다. 때로 유행은 아주 작은 계기에서 시작되었다.

“가까운 시일 내로 성공하진 못할 것입니다. 무수히 많은 실패가 기다릴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저희 오르골리오 상단은 조합원 여러분들과 함께 더욱 훌륭한 상품을 개발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며, 양자에게 모두 이득이 되는 길을 찾을 것입니다.”

“…….”

“그 길을 같이 걸어 주셨으면 합니다.”

좌중에 웅성거리는 소리가 커져 갔다. 그 속에 깃드는 불안감, 기대, 희망 따위를 페기는 찬찬히 지켜보았다.

오르골리오 상단이 철저히 탐보프에 융화되리란 것을 각인시켰다. 타국의 상단이란 점에서 모두에게 기본적으로 깔려 있던 적대심은 이것으로 풀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자 뒤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조합장이 나섰다.

“이만 투표를 하도록 하지요.”

하인이 편지 꾸러미를 가져왔다.

“오늘 참석하지 못한 상단에서 서면으로 투표를 해 주셨습니다. 모두 합산하여 결과를 산정하도록 하겠습니다.”

조합장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그럼 오르골리오 상단의 조합 가입에 찬성하시는 분들은 모두 손을 들어 주시길 바랍니다.”

“61 대 37이라.”

의자에 깊숙이 파묻힌 예후르가 작은 공을 던지고 받으며 중얼거렸다. 페기는 고개를 조아렸다.

“송구합니다. 제가 부족하여 더 많은 표를 얻지 못했습니다.”

“아니. 내 예상을 웃도는 수치야. 수고했다.”

동부 상인 조합의 가입 증명서를 들어 내용을 읽는 듯하던 예후르가 이내 종이를 휙 내던졌다. 증명서는 팔락거리며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조합관은 처음이라고 했지. 다녀온 감상은 어떠한가?”

“…이질적으로 느껴졌습니다. 시민의 3할가량이 빈민으로 전락한 도시치고 건물의 외관부터 너무 화려하더군요.”

“또?”

“이름만 동부 상인 조합이지, 실상은 본토 출신 상인들의 집합체라 느껴졌습니다. 회의장에 모인 상인들 대부분이 본토의 언어를 사용했는데, 거리낌이 없다는 점에서 도리어 본토 출신이란 점이 특권으로 여겨지는 것 같았습니다.”

“네 말이 맞다. 명색이 동부 상인 조합이면서 그 실상은 본토 상인들의 이득과 특권을 더욱 공고히 하는 집단이지. 그런 집단이 어떻게 동부란 이름을 내걸어 동부 전역의 상권을 휘어잡을 수 있었을까?”

“빌헬미나 3세의 지원입니다.”

허공으로 던졌던 공을 날쌔게 잡아챈 예후르가 웃는 낯으로 고개를 꺾어 그녀를 보았다.

“정답.”

그가 손짓했다. 페기는 책상 앞으로 다가가 의자에 앉았다.

“빌헬미나 3세의 탐보프 동부 통치에 대해 아는 대로 말해 봐.”

“페임하른 공작의 반역이 실패로 끝난 뒤, 빌헬미나 3세는 페임하른 공작을 비롯한 동부의 귀족들에게서 영지를 몰수했습니다. 그리고 황위 계승 전쟁에서 공을 세운 귀족들에게 동부를 갈라 나눠 주는 대신, 본인의 직할령으로 삼았습니다.”

“왜지? 공신들의 반발이 컸을 텐데.”

“가장 큰 군공을 세운 도미에 변경백이 모든 상을 마다하고 은퇴했기 때문입니다. 황권에 위협이 될 만했던 유력한 귀족 가문들은 빌헬미나의 황위 경쟁자였던 남매들이 출전한 이전의 전투에서 패배했기 때문에 자신의 몫을 주장할 수 없었습니다. 오래전부터 빌헬미나를 지지했던 바도비체 후작가는 몰락한 경쟁 가문들의 영지를 흡수하여 불만이 없었고요.”

“그다음엔?”

“황제 본인이 직접 총독을 선출하여 자신의 대리로 동부를 다스리게 했습니다. 총독들은 대부분 한미한 가문의 자제로 큰 권력을 누릴 수 없는 처지였으나, 황제의 눈에 들어 출세하게 되었습니다. 자연히 총독들은 빌헬미나에게 절대적으로 충성했으며, 이는 십수 년째 동부가 온전한 황제 직할령으로 남아 있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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