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9화 (99/328)

차라가 시시덕거리며 서재를 뛰쳐나갔다. 망연자실 서 있던 모드벤나가 니체타를 급히 붙잡고 물었다.

“엘피도 공작 전하께선 동부의 반란을 조장하실 생각이신가요?”

“어, 음….”

“안 되겠습니다. 도련님께 말씀드리고 와야겠어요.”

“그만두세요. 어차피 의미 없는 일이란 걸 아시잖아요.”

“적어도 도련님 본인이 어떤 일에 가담하는 건지는 아셔야지요!”

“그게 어떤 일인데요?”

니체타는 깍지 낀 손을 뒤통수에 받치며 느긋하게 말했다.

“뭐어, 저도 전하께서 페임하른 공작을 부추겨서 반란을 일으키시려는 것 같긴 한데 그 이상은 잘 모르지 말입니다. 그분이 언제 자기 속마음을 내보이신 적이나 있습니까? 그냥 믿고 따르는 거지.”

“…….”

“모드벤나 수도사님도 마찬가지잖아요.”

모드벤나는 입술을 꾹 사리물었다.

예후르가 용 기병대를 이끌고 성궁을 떠날 때, 그녀는 갈림길을 앞에 둔 것처럼 주저했다. 그를 따라가야 하는지, 아니면 성궁에 남아야 하는지.

그마저도 결정을 내려 준 건 예후르였다.

“내가 없는 성궁을 모드벤나 수도사가 잘 지켜 주세요.”

그는 왜 성궁을 떠났나.

그는 왜 오스터캄프로 갔나.

그의 진의는 대체 무엇인가.

“전 그분이 너무 어렵습니다.”

“하하. 저도 늘 그렇게 생각하지 말입니다.”

모드벤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같은 주인을 섬기는 사람들끼리만 나눌 수 있는 푸념이었다.

***

“아가씨. 도착했습니다.”

마차의 문이 열렸다.

마샤의 부축을 받아 마차에서 내린 페기는 고개를 들어 높이 솟은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위용스러운 석제 건물 위로 탐보프를 상징하는 늑대 깃발이 휘날리고 있었다.

페기는 망토를 여미며 흘끗 마샤에게 눈길을 주었다.

“들어가자.”

1층 로비는 널찍했다. 조합 회의가 열리는 날답게 각 상단의 하인과 급사들이 바삐 돌아다니고 있었다.

페기는 그중 회의장 입구 앞에 앉아 명부를 들여다보는 사내에게로 다가갔다.

“누구십니까?”

사내가 의심스러운 눈길로 그녀를 훑었다. 마샤가 눈치 빠르게 품에서 서류를 꺼내 넘겼다.

“오르골리오 상단에서 나왔습니다. 아가씨는 오르골리오 상단주이신 엘피도 공작 전하의 대리로 참석하실 예정이고, 여기 엘피도 공작 전하의 보증서가 있습니다.”

“엘피도 공작 전하의…?”

사내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보증서를 받아 들었다. 그는 돋보기로 한참이나 예후르의 서명을 들여다보더니, 여전히 당혹한 기색으로 회의장의 문을 열어 주었다.

반원 모양으로 좌석이 마련된 계단식 회의장에는 아직 사람들이 듬성듬성 앉아 있었다. 강이 얼어붙는 날씨에도 장작을 어찌나 때었는지 훈풍이 감돌 지경이었다.

페기는 두꺼운 망토를 벗으며 지정된 자리에 앉았다. 아직 조합에 들지 못한 그녀의 자리는 회의장 전면 구석에 마련된 간이 의자였다.

고개를 들어 회의장을 둘러본 마샤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감탄했다.

“와. 굉장히 화려하네요. 공작저보다 훨씬 더 호화스러운 것 같아요.”

페기는 감흥 없는 눈으로 회의장 곳곳을 훑었다. 양초 백 개는 올라갔을 법한 크리스털 샹들리에, 탐보프의 내로라하는 화가들의 명화, 금을 입힌 기둥. 확실히 눈 돌아가게 호화스럽긴 했다.

회의장으로 들어오는 상인들의 면면도 마찬가지였다. 페기는 그들의 복식과 몸짓, 사용하는 언어와 억양 등을 눈여겨보았다. 대부분이 노르투그어가 아닌 탐보프 본토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었으며, 복식의 문양 또한 요새 본토에서 유행하고 있다는 남부식에 가까웠다.

한 무리의 상인들이 그녀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그나저나 오늘따라 참석률이 저조하군요. 내가 고향에 다녀온 사이 무슨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메르세차 상단 기억하시죠? 요새 휘청휘청하는 듯하더니, 외지인에게 상단 경영권을 팔아넘겼다더군요.”

“호르카 상단도 그렇다던데요?”

“허어, 별일이 다 있습니다. 그럼 새로운 외지인 상단주들이 오늘 참석하지 않은 것이로군요?”

페기는 속으로 비웃음을 날렸다. 그 정체 모를 외지인 상단주 몇몇이 실상 예후르 한 사람이란 것이 밝혀지면 이 회의장 전체가 뒤집어지고도 남을 일이었다.

회의장의 빈 좌석들이 속속들이 들어차기 시작했다. 값비싼 최고급 모피에 보석 장신구까지 주렁주렁 매단 대형 상단주들은 느지막이 도착하여 다른 상인들과 악수를 주고받았다. 늦장을 부리며 거들먹거리는 꼴이 꼭 한 왕국의 왕이나 다름없었다.

오래지 않아 멀리서 둔중한 종소리가 들려왔다. 삼삼오오 모여 떠들던 상인들이 제각기 자리를 찾아갔다. 그리고 하얗게 센 머리를 바짝 틀어 올린 조합장이 회의장 전면의 단상으로 올라왔다.

“모두 착석하십시오.”

상인들이 우르르 자리에 앉았다. 느릿하게 좌중을 훑어본 조합장이 곧 카랑카랑한 목소리를 냈다.

“과반 이상이 참석하셨으므로 개의하도록 하겠습니다. 본격적으로 회의를 시작하기에 앞서 기쁜 소식을 하나 알려 드립니다. 황제 폐하께서 올해 식량 수급량을 확인하시곤 매우 흡족해하시며 우리 동부 상인 조합을 치하하셨다고 합니다. 올 한 해 가장 많은 곡식을 공급했던 졸프소체 상단주께 특별히 박수를 드립시다.”

호화스럽게 치장한 졸프소체 상단주는 박수 소리를 들으며 거만하게 웃었다. 그의 상단은 동부의 곡식을 관장하는 상단들 중 규모가 가장 컸다.

“폐하께서 내리신 상은 조합에 도착하는 즉시 조합원들에게 배송될 것입니다. 모두 폐하의 은덕에 감사하도록 합시다.”

“…….”

“그럼 본격적으로 회의를 시작하도록 하지요. 오늘의 안건은 조합원 여러분 모두가 잘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교국의 오르골리오 상단이 우리 동부 상인 조합에 가입을 신청했습니다.”

조합장이 흘끗 페기를 쳐다보았다.

“이쯤에서 오르골리오 상단주의 대리로 참석하신… 아델라이데 세르페제 양을 모시도록 하죠.”

페기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단상 위로 올라갔다. 반원 모양으로 퍼진 조합원들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내리꽂혔다. 계단식 구조 때문에 아래로 모이는 시선들이 더욱 위압적으로 느껴졌다.

“상단주의 대리라니… 이런 중요한 회의에 상단주가 직접 오지 않은 겁니까?”

누군가 불편한 기색으로 말문을 열었다. 그러자 못마땅한 눈으로 그녀를 흘겨보던 다른 상인들도 너 나 할 것 없이 불만을 보탰다.

“아무리 그래도 본인의 상단이 안건에 올랐는데….”

“상단주 대리가 맞긴 합니까? 너무 어려 보이잖아요.”

“처음 듣는 이름입니다. 신분은 확실합니까?”

좌중을 수습해야 하는 조합장은 팔짱을 끼고 방관할 뿐이었다. 천천히 그들을 훑어본 페기가 마침내 입술을 열었다.

“저는 오랫동안 엘피도 공작 전하의 가신으로 있었던 세르페제 가문의 차녀로, 지금은 상단주의 보좌로 일하고 있습니다. 저희 상단주께서 절 대리로 임명하신 보증서가 여기 있습니다. 이미 조합 차원에서 확인이 끝난 일이나, 그럼에도 의심을 거둘 수 없는 분께선 회의가 끝난 뒤 저를 찾아오십시오. 직접 확인시켜 드리겠습니다.”

“…….”

“그리고 저희 상단은 저를 비롯한 여러 실무진들이 경영을 나누어 맡고 있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저희 상단주께선 한낱 상단에 온 주의를 기울일 만큼 한가한 분이 아니시며, 무엇보다도….”

입술을 다문 페기가 고개를 살짝 숙이며 웃었다.

“고귀한 분께서 어찌 이런 곳까지 발걸음 하시겠습니까.”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누군가 울컥하여 나서려 하자, 옆자리 상인이 그를 만류하며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엘피도 공작은 그들에게도 하늘 위 구름 같은 존재나 다름없었다.

어느 상인이 빈정거리듯 물었다.

“그런 고귀한 분께서 어찌 이런 조합에 가입하고자 하십니까?”

“이득이 되니까요. 저희 실무진들은 그렇게 판단했습니다.”

“당연히 그쪽 상단은 우리 조합에 들어오는 것이 이득이겠지. 조합원만 되면 세금이 절반으로 줄어드는데!”

상인들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동의했다. 조합원들에게는 통행세가 면제되고 연 수익에 따라붙는 세금이 대폭 절하되었다. 동부에서 상단을 꾸려 가고 싶다면 조합 가입은 필수적이었다.

페기가 옅게 웃었다.

“물론 저희 상단에 이득이 된다는 소리만을 가져온 것은 아니겠죠.”

“…….”

“이 자리에서 저희 상단의 가입 여부가 결정된다는 사실은 잘 인지하고 있습니다. 지금부터 저희 상단이 조합과 조합원 여러분들께 가져다줄 이득을 말씀드리겠습니다.”

페기가 마샤에게 눈짓했다. 마샤는 와인병을 들고 제단 위로 올라왔다.

“라발의 특산품인 레페산(産) 와인입니다. 탐보프에서도 인기가 높지요. 원래는 수량이 한정된 고급 와인이었으나, 수년 전 생산법을 대거 뜯어고친 뒤로 생산량이 급격히 증가하여 가격이 많이 떨어진 상태입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탐보프에선 매해 가격이 높아지고 있죠.”

누군가 끄응, 앓는 소리를 냈다.

“예, 다들 아시겠지만 중개 무역을 하는 리누스 도시 연맹의 짓입니다. 정치적인 문제로 세잔이 떨어져 나가자, 라발과 탐보프 사이에서 중개 무역을 독점하게 된 리누스 도시 연맹의 상단들이 횡포를 부리기 시작한 것이죠.”

남북으로 갈라진 두 제국, 라발과 탐보프 사이에는 교국과 리누스 도시 연맹 그리고 세잔 왕국이 있었다. 종교적인 이유로 상업이 크게 발달하지 못했던 교국을 제외한 리누스 도시 연맹과 세잔은 두 제국 사이에서 중개 무역을 하며 오랫동안 경쟁을 펼쳐 왔다.

그 경쟁 관계가 무너진 것은 지극히 정치적인 이유에서였다.

30여 년 전, 라발의 엠마누엘레 7세가 후사 없이 사망하며 300년 역사의 살레르티나 왕조가 종식되었다. 엠마누엘레 7세의 딸이자 세잔의 왕비였던 디안드라 황녀에게 황위 계승권이 남아 있었으나, 모종의 이유로 황위는 그녀의 아들에게 넘어갔다.

그것이 바로 요앙 오귀스트. 당시 세잔의 왕이었던 소년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