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7화 (97/328)

예후르는 평화로운 눈으로 창밖의 용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막시모는 마른침을 삼키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

“트리니테 공동묘지가… 불에 타 전소되었다고 합니다.”

막시모는 그의 표정을 확인할 자신이 없어 그의 상체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그럼에도 피부에 와 닿는 공기가 한층 싸늘해진 것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그는 식은땀이 차오르는 양손을 공손히 잡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두어 달 전에 벌어진 일이라고 합니다. 알비야 공작이 보고를 받았으나 조용히 묻은 탓에 소식이 늦었습니다. 죄송합니다.”

막시모가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방을 가득 메운 정적이 그의 목덜미 위로 바늘처럼 떨어졌다. 그는 목울대를 흔드는 긴장감을 억제하기 위해 손톱으로 손바닥을 꾹 짓눌렀다.

예후르의 목소리는 한참 뒤에야 들려왔다.

“누가 그랬지?”

“그것이… 한두 사람으로 특정하기가 어렵습니다. 폭우로 흙이 죄 쓸려 내려가 썩은 시신들이 드러나자, 인근 마을의 사람들이 전염병을 막기 위해 묘지를 불태웠다고 합니다. 알비야 공작이 묻기로 결정한 탓에 당연히 처벌은 내려지지 않았고요.”

“…….”

“혹시 모르니 사람을 보내 묘지를 살펴보라고 할까요?”

물으면서도 의미 없는 짓이란 걸 알았다.

이미 두어 달 전 전소된 묘지에 흔적이 남았을 리 만무하며, 설사 남았대도 죽은 카타리나 공작의 흔적이라 특정할 수 없었다. 트리니테 공동묘지에 묻힌 거지만도 예순 명에 달했다. 제아무리 사도라 하더라도 불타면 뼛가루로 남는데, 심지어 카타리나 공작은 사도인지도 불명확하지 않나.

이런 자명한 사실을 엘피도 공작이 모를 리 없었다. 그럼에도 막시모가 무의미한 짓을 여쭌 이유는 그가 비이성적으로 변하는 때를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었다.

“그래.”

역시나.

천천히 고개를 들자, 창문을 향해 서 있는 예후르의 뒷모습이 보였다. 막시모는 그의 표정이 궁금하지 않았다. 그가 사람 같은 표정을 짓는 건 딱 한 번 본 것으로 족했다.

막시모는 조용히 방을 빠져나왔다.

세간의 사람들은 그를 두고 미쳤다고 한다.

그러나 오랫동안 그를 보필했던 막시모는 그 말이 틀렸다고 생각했다. 미쳤다는 것은 즉 보통 사람과 달라졌다는 뜻이니, 지금의 엘피도 공작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그러므로 엘피도 공작은 ‘한때’ 미쳤었던 사람이다.

지금의 그는 완벽하게 정상이었다.

***

이른 아침, 용 두 마리가 하늘로 날아올랐다.

새벽 기도를 마친 페기는 성 위에서 빙글빙글 돌다가 각기 반대 방향으로 흩어지는 두 마리 용을 구경했다. 용을 생전 처음 본다는 마샤는 어제 아침 갑자기 성 앞뜰에 내려앉는 용 떼를 보고 거의 기절할 뻔했는데, 지금은 다가가 비늘을 만지지 못해 안달이 나 있었다.

“그냥 다가가면 물리겠죠? 아니다, 저같이 조그만 여자애는 꿀꺽 한입에 삼킬지도 몰라요.”

용을 잘 모르는 페기로선 달리 해 줄 말이 없었다. 그녀는 본디 짐승을 꺼려 했다. 짐승의 울음소리만 들으면 이명이 울리는 것은 되살아난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용은 타고난 사냥꾼이라 들었어. 너무 가까이하진 말렴. 네가 다치는 건 보고 싶지 않구나.”

“네에….”

마샤는 차오르는 웃음을 꾹 참으며 쑥스러운 티를 냈다.

페기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내려다보았다. 열 마리 넘는 용들이 한데 뒤엉켜 장난을 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순백의 용은 보이지 않았다.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마샤가 얼른 문가로 다가갔다. 문밖 하녀와 소곤소곤 말을 주고받는 듯하더니, 마샤가 쭈뼛거리며 다가왔다.

“저, 아가씨. 엘피도 공작 전하께서 찾으신대요.”

페기는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았다. 마샤가 당혹한 기색으로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이유는 저도 잘 모르겠어요. 후원으로 오라고 하셨대요.”

“…….”

“혹시 내키지 않으시면 제가 가서 아가씨 몸이 편찮으시다고 말씀드리고 올게요.”

마샤가 제법 결연하게 말했다. 페기는 고개를 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녀오마.”

“저, 저도 같이….”

“저쪽 유리창이 지저분하더구나. 닦아 놓고 있으렴.”

엉거주춤 멈춰 선 마샤가 네에, 하고 대답했다. 페기는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하녀를 따라 후원으로 향했다.

마지막으로 그를 본 지도 며칠이 지났다.

페기는 그동안 쥐 죽은 듯 방에서 움직이지 않았고, 예후르는 마치 그녀를 잊은 듯 찾지 않았다. 마샤가 여기저기서 주워 온 소식을 종합하면 그가 무언가를 꾸미고 있는 것은 분명했다.

정말로 페임하른 공작을 꾀어내 반란이라도 일으킬 심산인가.

페기는 입술을 꾹 사리물었다. 그녀는 그의 궁극적인 목적에 대해 여러 가지 짐작만 할 뿐이었다. 가진 정보가 지나치게 적고 활동할 수 있는 영역이 좁아 더 이상의 추측은 무의미했다.

그렇기에 한 가지에만 골몰했다.

그는 왜 나를 찾지 않았나.

페기는 온순하던 말이 갑자기 미쳐 날뛴 것이 예후르의 짓이라고 확신했다. 그녀가 카니나의 페기라곤 조금도 믿지 않으면서, 심술궂은 장난을 벌인 것이다.

낙마하리라 생각했을 것이다. 단단한 말굽에 밟히고 치이며 추잡스러운 가면이 벗겨지리라 여겼으리라.

하지만 그녀는 ‘속삭임’으로 말을 진정시켰고, 멀쩡하게 살아남았다. 간신히 숨을 몰아쉬는 저를 응시하던 예후르의 눈빛은 빈말로도 예사롭지 못했다.

그는 경악했다. 놀라워했고, 혼란스러워했다. 그럴 수 없어야 하는 자가 그리했단 사실에 불쾌감마저 드러냈다.

페기는 성으로 돌아오자마자 그가 자신을 불러내리라 생각했다. 제 거짓된 얼굴을 보자마자 술을 들이부었던 첫날처럼 무섭게 윽박지르리라 여겼다. 또다시 가면을 벗기려 들면 어쩌나. 행여 야음을 틈타 찾아올까 싶어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기도 했다.

그는 그러지 않았다.

그녀를 부르지도, 스스로 발걸음 하지도 않았다.

이렇게 어중간한 시일이 지난 뒤에야 부르는 연유를 그녀는 조금도 짐작하지 못했다.

“길을 따라 쭉 들어가시면 됩니다.”

하녀는 외길을 앞에 두고 총총 사라졌다. 페기는 내키지 않는 걸음을 내디뎠다. 십수 년째 제대로 관리되지 않은 후원은 꼭 야생의 숲처럼 울창했다. 군데군데 쌓인 눈 위론 야생 동물의 발자국마저 찍혀 있었다.

그러다 문득, 저 앞으로 거대한 순백의 형상이 보였다.

처음에 페기는 눈을 모아 쌓아 둔 것인 줄 알았다. 하지만 숨 쉬는 것처럼 오르내리는 꼴이 마치 짐승 같았다. 조심스레 길을 밟아 다가가던 페기는 그것이 순백의 용임을 뒤늦게야 깨달았다.

바스락, 말라비틀어진 낙엽이 그녀의 발아래에서 부서졌다. 지레 놀라 발치를 내려다보았던 페기는 고개를 들자마자 절 빤히 응시하는 용의 붉은 눈을 발견했다.

세로로 길게 찢어진 동공이 조여들었다 풀어지길 반복했다. 용의 콧잔등에는 주름도 졌다. 마치 더러운 것을 보았다는 양 찡그리는 모습이 꼭 제 주인과 닮아 있었다.

“저같이 조그만 여자애는 꿀꺽 한입에 삼킬지도 몰라요.”

페기는 제자리에서 미동하지 않았다. 용은 타고난 사냥꾼. 수틀리면 언제 날카로운 이빨을 들이밀지 몰랐다.

그때, 용의 등 뒤에서 누군가 저벅저벅 걸어 나왔다. 날카롭게 번지는 햇살에 페기는 눈살을 찌푸렸다. 오래지 않아 볕이 잦아들자, 용의 콧등을 쓰다듬고 있는 예후르의 모습이 분명하게 보였다.

“먼 사막에선 용을 두고 신을 죽이는 자라고 부른다지.”

예후르가 평온하게 말했다.

“신을 죽일 수 있다는 것은 즉 신과 대적할 수 있다는 뜻. 사막의 사람들은 용이 만물을 꿰뚫어 보는 신의 눈과 하늘을 가르는 신의 날개를 지녔다고 굳게 믿고 있지.”

“…….”

“다가오지 않은 건 현명한 행동이었다. 용의 눈에는 지금 네가 뒤집어쓰고 있는 거죽이 참으로 거슬릴 테니까.”

그녀를 보고 빳빳하게 펼쳐졌던 하얀 날개가 그의 부드러운 손길 아래 다시 힘없이 접혔다. 그는 엷게 웃으며 용의 귀에 대고 무어라 속삭였다. 평화로운 광경이었다. 페기는 스스로 끼어들면 안 되는 곳에 억지로 비집고 든 불청객 같다는 생각을 했다.

“동물을 좋아하나?”

문득 저를 향하는 질문에 페기는 빠르게 눈을 깜박였다. 그는 어느새 자신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아니요.”

“이상하군. 동물들은 너를 잘 따르는 것 같던데.”

페기는 남모르게 치맛자락을 움켜쥐었다.

사도는 짐승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다. 짐승들도 사도의 말은 어느 정도 이해했다. 그 능력을 누구보다 잘 살려서 수없이 많은 맹수들을 조련해 온 것이 바로 눈앞의 예후르였다.

“말이 순해서 다행이었지요.”

“…….”

“앞으로 하실 말씀이 있다면 불편하시더라도 사람의 언어로 전해 주십시오. 저는 모자란 사람이라 짐승의 아우성을 알아듣지 못합니다.”

페기는 최대한 신중하게 골라 말했다. 피식 웃은 예후르가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좋아. 그럼 알아들을 수 있게 묻지.”

“…….”

“너는 내게서 무엇을 확인하러 온 거지?”

페기는 가만히 입술을 다물었다. 예후르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대답할 수 없나?”

“…전하를 방해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니….”

“아니, 넌 나를 방해할 수조차 없어. 내가 무엇을 노리는지 알기는 하나?”

예후르는 용의 발등 위에 편하게 걸터앉았다.

“내 목적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날 방해하지 않겠다는 건, 네가 여기 온 이유가 내 목적과는 하등 관계없는 일이란 뜻이겠지. 수모를 겪는 것도 마다하지 않고 여기까지 찾아온 것을 보면 꽤나 간절한 듯하고.”

“…….”

“반지가 어디로 갔는지 알고 싶나?”

페기의 몸이 움찔 떨렸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예후르가 잔잔히 웃었다.

“네가 반지의 행방을 궁금해하는 것처럼, 나는 네가 그 반지를 어떻게 알고 있는지 궁금하다. 하지만 너는 대답하지 않을 테니, 나 역시 너에게 순순히 알려 줄 의무는 없지.”

“제가 어떻게 하면….”

페기가 홀린 것처럼 한 발짝 내딛자, 평온하게 잠든 듯하던 용이 별안간 눈을 홉뜨며 이를 드러냈다. 페기의 몸이 얼음처럼 굳었다. 진정하라는 듯 용의 비늘을 쓰다듬어 주며 예후르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막시모가 오늘 아침 떠났다.”

“…….”

“당분간은 돌아오지 못할 테지. 덕분에 날 보좌할 사람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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