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리니는 착잡한 기색으로 중얼거렸다.
“내 생전 차질 없는 계획을 본 적이 없습니다. 보통은 계획대로 흘러간다고 생각할 때 이미 함정에 빠져 있더군요.”
“그러니 계획을 단단히 받쳐 줄 기반을 다져 놓아야지요. 민심 말입니다.”
이리니는 슬쩍 미간을 찌푸렸다. 잃기는 쉬우나, 한번 잃으면 되찾기 어려운 것이 바로 민심이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무대는 내가 마련해 놓겠습니다. 교회의 이름으로 가모브 총독을 공격할 것이나, 마지막에 부패한 총독의 목을 자르며 화려하게 귀환할 자는 그대가 될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 말처럼 쉽겠습니까?”
“쉽고 어렵고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해내야 하는 일을 해낼 뿐이죠.”
예후르는 건조하게 대꾸하며 막시모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기다렸다는 듯 막시모가 서류를 넘겨주었다.
“내가 가모브 총독을 무너트릴 동안, 그대는 살아남은 동부의 귀족들과 은밀히 접촉하십시오. 명단은 여기 있습니다.”
이리니는 가라앉은 표정으로 명단을 보았다.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이름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십수 년 전 빌헬미나에게 항복하여 목숨만은 부지한 자들입니다. 대개 작위는 빼앗기지 않았으나, 감금되어 어려운 삶을 이어 가는 것은 그대와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먼저 서신을 보내 안부를 물은 뒤 곡식과 금전을 보내십시오. 많지 않아도 좋습니다. 적은 양이어도 그들에겐 충분히 값질 것이니.”
이리니는 말없이 서류의 끄트머리를 만지작거렸다. 예후르는 그 손길을 무심히 지켜보았다.
“그들은 백성들과 다릅니다. 오히려 그대의 심정에 공감할 수 있겠지요. 몰락한 동부, 외면했던 백성들, 그 모두가 무거운 짐처럼 느껴질 겁니다. 그리고 한때 이곳을 호령하던 귀족으로서 동부의 영광을 되찾고 싶은 갈망도 있겠지요.”
“…….”
“항복했던 그들을 책망하지 마십시오. 한때 그들을 이끌었던 왕으로서, 넓은 배포로 그들의 아픔을 돌보고 무너진 기세를 되살리십시오. 이건 그대만이 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겠습니다.”
명단을 쥔 이리니의 손에 힘이 꾹 들어갔다. 예후르는 느긋하게 찻잔을 들어 감미로운 차향을 즐겼다.
바스토뉴의 용병들을 끌어들여 동부를 빠르게 되찾으면, 되돌아온 민심이 이리니의 뒤를 단단히 받쳐 줄 것이다. 동부의 전통적인 유력 귀족들은 민심을 하나로 모으는 데 도움을 줄 뿐만 아니라, 수족이 죄 잘려 나간 이리니의 새로운 손발이 될 것이었다. 핍박받고 모멸당한 세월이 그들을 하나로 묶어 주리라.
그리고 마지막 남은 열쇠.
“아들을 데려와야죠.”
명단을 넘기던 이리니의 손끝이 움찔 떨렸다.
“동부에서 반란이 일어나면 목숨을 부지하긴 어려울 겁니다. 행여 살아남더라도 황위를 무사히 계승하긴 힘들겠죠. 빌헬미나 3세는 의심이 많은 자니, 그대와 그대의 아들이 내통했을 가능성을 접어 두지 않을 겁니다.”
“…그 애는 미에투넨의 황성에서 엄중한 감시를 받고 있습니다. 어떻게 데려온다는….”
“그건 내가 알아서 할 일입니다. 그대는 아들을 설득할 방도만 주면 됩니다.”
“…….”
“그대를 배반하고 빌헬미나를 택한 것이지 않습니까, 그대의 아들은.”
이리니는 입술을 콱 깨물었다. 아직도 그 일만 생각하면 배 속에서 울분이 화르르 치솟았다.
“무슨 일이 있었는진 대충 들어서 압니다.”
예후르가 조금 피곤한 기색으로 눈을 문질렀다.
“억지로 끌고 오는 수도 있습니다만, 가능한 한 우리에게 협력해서 돌아오는 편이 피차 편하겠지요. 훗날 그대와 재회할 것을 생각하면 더더욱.”
“…….”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것이라 믿습니다.”
무섭게 발치를 쏘아보던 이리니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후르는 그제야 흡족한 기색으로 웃었다.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
예후르는 측근들을 데리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흉가처럼 고요하던 성은 사냥을 마치고 돌아온 용들 덕분에 꽤나 떠들썩했다. 꼭대기에 위치한 그의 방에서도 용들의 울음소리가 어렵지 않게 들렸다.
그는 뜨거운 찻잔을 든 채 두꺼운 창살이 박힌 좁은 창밖을 물끄러미 내다보았다. 흙먼지 날리는 앞뜰에서 용들이 엎치락덮치락 노닥거리고 있었다.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건 알지만 다시 먼 길 떠나 줘야겠다.”
그에 막시모와 니체타, 클로디아는 긴장된 얼굴로 자세를 바로 했다.
“먼저 막시모와 클로디아. 너희는 다그마르 산맥으로 가서 바스토뉴의 족장과 접촉해라. 페임하른 공작의 친서를 전달하되, 족장이 의심을 거두지 않는다면 내 이름을 거론해도 좋아.”
“…그래도 괜찮으시겠습니까? 훗날 페임하른 공작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그들은 전하를 원망할 텐데요.”
막시모의 조심스러운 질문에도 예후르는 조용히 웃기만 했다.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니 오래 걸리진 않을 거다. 용병 계약도 마찬가지야. 어음을 넉넉하게 써 줄 테지만, 현물이 아니면 믿지 않을 테니 선금으로 줄 금궤를 싣고 가는 것이 좋겠다. 클로디아, 베판타니아에게 금궤를 실을 수 있을 것 같나?”
“저랑 막시모 씨에 금궤 하나인 거죠? 예, 막시모 씨가 오늘 저녁 굶는다면 가능합니다.”
“야….”
막시모의 눈총에도 클로디아는 안색 하나 변하지 않았다. 예후르는 흡족하게 말을 이었다.
“좋아. 족장과 밀약을 체결하고 나면 클로디아는 돌아와서 내게 보고해라.”
“네.”
“막시모는 용병들을 데리고 곧장 리누스 도시 연맹으로 가. 최대한 교국과 위스누아에서 멀리 떨어진… 프라가 정도가 적당하겠지. 용병들을 상단의 하인으로 꾸며서 최대한 많은 수를 데리고 탐보프의 국경을 넘어야 한다.”
“다그마르 산맥을 횡단해야겠군요. 바스토뉴에서 탐보프로 넘어갈 수 있는 방법이 없으니 리누스 도시 연맹을 우회하는 수밖에 없겠습니다만… 그 많은 수를 하인으로 위장시키려면 한꺼번에 움직이긴 글렀군요. 시간이 좀 걸릴 겁니다.”
“영지로 연락을 넣어 오스터캄프로 보내야 하는 물자를 프라가로 옮겨 두도록 하지. 그때쯤이면 동부 상인 조합에 우리 상단의 가입이 허가되었을 테니, 수송 물자가 많다고 공연히 의심하는 자들은 없을 것이다.”
“용병과 물자를 서너 무리로 나누어 국경을 넘게 하겠습니다. 전 마지막 무리와 오가도록 하죠.”
“두 달이면 되겠나?”
예후르의 여상한 물음에 막시모가 인상을 팍 썼다.
“지금 당장 출발하라는 말씀이죠?”
“석 달까진 기다릴 수 있어. 그 이상은 무리다.”
“하….”
막시모가 심란한 표정으로 머리를 흩트렸다. 예후르는 시선을 틀어 클로디아를 보았다.
“클로디아. 막시모를 네게 맡기는 이유를 알 것이다.”
“방벽에 들키지 말란 말씀이시겠죠.”
클로디아의 용 베판타니아는 용 기병대에 소속된 용들 중 가장 크기가 작았다. 경량급이라 대포에 맞서긴 무리지만, 신속한 움직임을 이용한 기습과 밀정 역할에는 가장 적합했다.
“도미에 변경백은 성실하고 충성스러운 자다. 용이 다그마르 산맥으로 넘어가는 것을 발견하면 곧장 윗선으로 보고를 올릴 거야.”
“명심하겠습니다.”
“에이, 걱정하지 마십시오, 전하. 앞으로 사나흘은 먹구름 꽉 차서 흐릴 예정이지 말입니다. 베판타니아처럼 쪼그만 애는 보이지도 않을 거예요!”
웬일로 얌전하던 니체타가 장난스럽게 끼어들었다. 세 쌍의 눈이 동시에 그를 향했다. 니체타는 그제야 슬슬 눈치를 봤다.
“오늘 아침부터 새끼발가락이 당겨서… 아, 이게 진짜지 말입니다. 비 오기 직전에만 딱 신호를 주는데!”
“…조용히 해라.”
클로디아가 이를 악물고 속삭였다. 니체타는 금세 쭈그러들었다. 예후르는 금방 들었던 니체타의 말은 까맣게 잊은 것처럼 곧장 화제를 돌렸다.
“니체타. 너는 성도로 가라.”
“예? 성도로요?”
자꾸만 당기는 새끼발가락을 꼼지락거리던 니체타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예후르가 성궁을 뛰쳐나온 이래, 그를 비롯한 용 기병대는 성도 근처로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약 두어 달 뒤에 황태자, 즉 페임하른 공작 아들의 생일이다. 빌헬미나 3세는 이번 생일 연회를 대대적으로 치를 작정이라더군.”
탐보프의 황태자는 그동안 베일에 싸여 있었다. 이번 생일 연회가 통상보다 크게 열린다는 소식이 돌자, 황태자가 본격적으로 정계에 진출하리라 예상하는 자들이 많았다.
“교국에서도 축하 사절단을 보낼 거다. 너는 성궁으로 들어가 가능한 한 비밀스럽게 모드벤나와 접촉해라. 사절단의 명단은 모드벤나가 갖고 있을 테니, 그중에서 적당한 사람을 골라 페임하른 공작의 밀서를 맡기면 돼.”
“어… 그러니까 페임하른 공작의 밀서를 황태자에게 전달해야 하는 거죠? 저는 그 전달자만 고르면 되고?”
“그래.”
니체타가 긴가민가한 얼굴로 목덜미를 긁었다.
“그런데 그렇게 중요한 사람을 제가 골라도 되는 겁니까? 혹시 제가 고른 사람이 알비야 공작의 심복이면 어떡하죠?”
“정히 어렵다면 모드벤나에게 도움을 구해.”
예후르의 조언에도 니체타는 여전히 불안한 기색이었다. 물끄러미 그를 응시하던 예후르가 싱긋 웃었다.
“니체타. 성궁이 알비야 공작의 세상인 것처럼 보이는 까닭은 내가 부재하기 때문이다.”
그는 가장 강력한 권능을 선보인 사도요, 부활한 뱀을 죽인 영웅.
권력에 기생하는 자들은 일찌감치 알비야 공작에게로 갈아탔겠으나, 그가 수차례 선보인 이적에 감화된 이들은 성궁에도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들도 결국은 사도를 모시고 성화를 모시는 성직자였기에.
그리고 그것을 가장 잘 체감한 사람이 바로 수년간 그의 곁을 지켰던 니체타였다. 니체타는 순식간에 맑게 갠 얼굴로 외쳤다.
“열흘 안에 돌아오겠습니다!”
“…너 용 타고 성궁으로 들어가면 안 되는 거 알지? 최대한 눈에 안 띄어야 하는 것도?”
“야, 내가 그것도 모를까 봐?”
니체타와 클로디아가 또다시 티격태격했다. 예후르가 적당히 끼어들었다.
“출발은 내일 하지. 오늘은 편히 쉬도록 해.”
“네! 알겠습니다!”
반듯하게 경례한 두 사람이 졸졸 방을 빠져나갔다. 그런데 문을 닫기 직전에 고개만 쏙 방 안으로 들이민 니체타가 속삭이듯 말했다.
“전하. 사냥 다녀올 때 자기만 혼자였다고 코리가 많이 심술이 난 것 같지 말입니다. 우리 귀염둥이 눈치 보게 하지 마시고 코리 화 좀 빨리 풀어 주십시오.”
니체타의 용은 거대한 몸집에도 불구하고 예후르의 용인 코른헤르트에게 넙죽 엎드려 살았다.
예후르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 가볍게 손짓했다. 니체타는 이제 정말 나가 보겠습니다아, 하면서 문을 닫았다.
시끄러운 두 사람이 나가자 방은 잠시 적막에 잠겼다. 문 앞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온 막시모가 그답지 않게 망설이며 운을 뗐다.
“전하. 보고 드릴 것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