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 예! 맞습니다! 분명 페임하른 공작 전하께 충성을, 윽!”
클로디아가 급히 니체타의 옆구리를 푹 찔렀다. 니체타는 눈을 휘둥그레 뜨며 그녀를 돌아보았다.
‘왜?’
클로디아가 눈을 부라리며 입술만 움직였다.
‘가만있어!’
잠자코 그 광경을 지켜보던 예후르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수고했다. 이만 나가 봐도 좋아.”
니체타와 클로디아는 엉거주춤 인사하고 나갔다. 문을 닫기 무섭게 니체타가 억울한 듯이 물었다.
“뭐가 문젠데?”
“경칭이 틀렸잖아!”
“왜? 우리 공작님도 전하라고 하잖아.”
“멍청아. 엘피도 공작 전하는 교황 성하께 직접 공작 작위를 받으신 거잖아.”
“그런데?”
“그런데라니…. 너 세피로스 협약 몰라?”
“어디서 들어 본 것 같긴 한데….”
니체타는 지그시 미간을 찌푸렸다. 멀거니 그를 쳐다보던 클로디아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됐다, 됐어. 내가 너한테 뭘 기대하겠니. 그냥 하나만 똑똑히 기억해 둬. 페임하른 공작 각하. 엘피도 공작 전하는 세속의 귀족들보다 한 단계 높은 대우를 받으시는 거야. 알겠어?”
“거 되게 복잡하네.”
니체타가 구시렁거리며 복도를 걸어 나갔다. 클로디아는 세피로스 협약에 대해 더 설명해 줄까 하다가 단념했다. 저 단순한 머리로는 이틀 만에 까먹을 것이 분명했다.
두 사람이 나가자, 막시모가 대신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나중에 단단히 주의를 주겠습니다.”
“네 부하도 아닌데 대신 사과할 이유도 없지.”
예후르는 익숙하게 니체타의 무례를 넘겼다.
“알프도르트 방벽은 예상했던 그대로입니다. 도미에 변경백이 제아무리 출중한 능력을 갖추었다 하더라도 고작 4년 만에 동부인들의 뿌리 깊은 적개심을 거둬 내긴 무리였겠지요.”
이리니는 생각에 잠긴 듯 말없이 비뚤어진 황금 코를 매만졌다. 그러다 문득 피식거리며 웃었다.
“도미에 변경백이 아들은 잘 키운 모양이군요.”
예후르가 잠시 입술을 다물었다.
몇 해 전 병사한 선대 도미에 변경백은 본토가 내세운 이리니의 맞수였다. 비록 빌헬미나의 계략이 먹혀들기 시작하며 그와 본격적으로 검을 맞댄 적은 없으나, 그 이름만으로도 10년 전의 패배가 떠오를 것이었다.
“페임하른 공작. 그대의 아들도 훌륭합니다.”
“…훌륭하게 길러 놨더니 빌헬미나가 앗아 갔죠. 하나는 빼앗아 가고, 하나는 멀리 내쫓아 견제하고. 그런 비겁함이 황제의 자질인 줄 내 미처 몰랐습니다.”
이리니의 검은 눈에 살기가 어렸다. 예후르는 무료하게 찻잔을 내려다보았다.
빌헬미나 3세에게 밉보인 도미에 변경백이 말 그대로 변경만 돌고 있음은 익히 유명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단순히 그렇게만 볼 것도 아니었다.
“빌헬미나 3세는 현명한 선택을 한 겁니다. 도미에 변경백을 알프도르트 방벽에 둠으로써 한 번에 세 가지를 견제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첫째로 동부의 풍요로운 곡식 창고를 호시탐탐 노리는 바스토뉴의 야만족들.
“본토 식량 공급의 상당 부분을 동부에 의존하는 이상, 빌헬미나로서도 바스토뉴를 가만히 두고 볼 수만은 없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바스토뉴를 상대하는 방법은 이미 정해져 있지요. 지난 수백 년간, 노르투그 왕국이 수없이 그들을 정복하려다 실패하고 세운 것이 바로 알프도르트 방벽이니까요.”
바스토뉴의 야만족들이 숨어 사는 다그마르 산맥은 험준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는 곳이었다. 일단 그들이 산속으로 도망쳐 숨는 데 성공한다면, 아주 적은 수로도 대군을 상대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동부는 지금껏 방벽에 기대어 바스토뉴의 야만족들을 성공적으로 방어해 왔다. 하지만 방벽을 지키는 것도 결국은 일정 이상의 병력이 있어야 가능한 일.
문제는 거기서 발생했다.
“10년 전 그대의 패배로 동부 군의 사기는 크게 저하되었습니다. 빌헬미나 3세는 골치가 아팠을 겁니다. 동부 군에게 함부로 지원을 남발했다간 적이 되어 돌아올 수 있으며, 본토의 병력을 더 끌어다 쓰기엔 위험 요소가 너무 컸으니까요.”
그런 상황에 촉망받는 젊은 변경백이 소규모 반란을 진압하고 돌아왔다.
“도박이었지만 성공했죠.”
젊은 변경백은 시행착오 끝에 방벽 수비군의 위용을 되찾았다. 실제 그가 부임해 온 이후로 바스토뉴 야만족들에 의한 약탈은 눈에 띄게 줄어들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동부를 좌우에서 동시에 견제할 수 있게 되었죠.”
동부와 맞닿은 본토의 국경에는 탐보프의 방패라 불리는 바도비체 후작가가 있었다. 바도비체 후작 개인의 무력은 평범한 수준이나, 그가 거느리고 있는 병력은 무시할 만한 수준이 못 되었다.
“노르투그 왕국이 멸망한 이후로 전통적인 동부 군의 병력은 모두 알프도르트 방벽 수비대에 집중되었습니다. 이제 방벽 수비대는 도미에 변경백을 따릅니다. 그를 신뢰하지 않는 병사들이 있다는 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겉으로 보기엔 문제가 없어 보이는 동부 군이 실제로는 분열되어 있다는 것이 중요하죠.”
“…….”
“그리고 마지막이 바로 그대가 말했듯 도미에 변경백을 견제할 수 있게 되었단 겁니다. 알프도르트 방벽은 본토에서 아주 머니까요.”
예후르가 빙긋 웃었다.
“비겁한 술책이라 깎아내릴 것만은 아니죠.”
이리니는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태생적으로 전사인 그녀는 정치적인 간계에서 염증을 느꼈다.
“하여 사도께선 내 궐기가 어렵다는 말씀을 하고자 하십니까?”
“현재 동부의 상황을 이해하시란 겁니다. 군사적으로는 동부에 주둔하고 있는 본토의 병력을 압도하기 어려울뿐더러, 힘이 되어 줄 민심조차 그대를 따르지 않는 현 상황 말입니다.”
외부적으로는 방벽 수비대를 능히 지휘하고 있는 도미에 변경백과 동부에 주둔하고 있는 본토의 병력을 막후에서 지원하는 바도비체 후작이 있었다. 또한 내부적으로 유화 정책을 펼치며 민심을 얻고 있는 가모브 총독 또한 여간내기가 아니었다.
“가모브 총독은 내가 무너트립니다. 일찍이 민심을 잃은 페임하른 공작의 이름보다야 교회의 이름이 총독과 경쟁하긴 수월하니까요.”
“…….”
“하지만 군사적으론 내가 직접적으로 도울 수 없습니다. 용 기병대는 동부와 함께할 것이지만, 그 이상 교국의 원조는 불가합니다.”
“그럼 궐기할 병력을 어디서 구한단 말입니까.”
“그래서 제안을 드리려는 겁니다.”
예후르가 비밀스럽게 속삭였다.
“바스토뉴와 밀약을 맺으십시오.”
이리니의 표정이 멈칫 굳었다. 예후르는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도미에 변경백이 방벽 수비대의 신뢰를 얻었다곤 하나, 여전히 그대를 따르는 이들이 있을 겁니다. 그들을 이용하십시오. 역사상 난공불락이라 불렸던 수많은 성들도 내부 분열에는 속수무책으로 무너졌습니다. 일단 방벽이 함락되면 변경백은 후퇴할 것이고 방벽 수비대는 그대의 손에 들어올 것입니다.”
이리니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달아올랐다. 목에는 굵은 핏대가 섰다.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립니까! 내 선조들이 저 야만족들과 싸우느라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는데, 이제 와 그들을 내 앞마당으로 맞으라니!”
“또한 그들을 용병으로 고용하십시오.”
더 듣기 싫다는 듯 이리니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예후르는 느긋이 의자에 등을 기대었다.
“이미 리누스 도시 연맹은 수십 년째 그리하고 있습니다.”
“그 장사치들은 병력이 부족하여 그런 것을 내 모를 것 같습니까!”
“그뿐만이 아닙니다. 라발에서도 종종 바스토뉴의 용병대를 고용하고 있죠. 그들의 용맹함은 그대도 잘 알지 않습니까?”
이리니가 시뻘게진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젊은 시절, 그녀는 알프도르트 방벽에서 바스토뉴의 야만족들을 몰살시키며 동부의 맹장으로 발돋움했다.
“그 야만족들의 잔인함은 누구보다도 내가 잘 압니다. 아비와 아들이 적으로 만난다 한들 그 짐승들의 칼끝은 흔들림조차 없을 겁니다. 사도께선 그 투쟁심이 어디서 나왔다고 보십니까? 다그마르 산맥의 정기? 혹독한 수련의 결과? 아니요! 그건 굶주림에서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입니다!”
다그마르 산맥은 험준하기로는 으뜸가는 곳.
농사가 사치인 곳에서 자란 아이들은 자연스레 남의 것을 탐내는 야만인으로 성장했다. 남의 것을 빼앗지 않으면 굶어 죽는 것만이 유일한 미래였기 때문이다.
“모르긴 몰라도 리누스 도시 연맹의 장사치들은 그 야만족들을 고용하기 위해 매년 엄청난 양의 곡식을 내주고 있을 겁니다. 그치들은 사방에서 돈을 긁어모으니 가능하겠지요. 나는 못 합니다. 아니, 불가합니다!”
“어째서요?”
진정 모르겠다는 듯 예후르는 턱을 괴고 물끄러미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곡식… 아니, 땅을 내어 주겠다고 하십시오. 동부는 넓습니다. 꾸준히 경작할 수 있는 토지라면 바스토뉴도 달갑게 받아들이겠지요.”
“진심으로 하시는 말씀입니까?”
“네. 또한 제안 드리길, 약속은 약속으로만 그치십시오.”
“…….”
“그대가 훗날 약속을 어긴다 하여 비난할 자가 있겠습니까? 상대가 바스토뉴의 야만족들인데?”
이리니는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예후르는 느긋한 손길로 차를 따라 그녀 쪽으로 찻잔을 내밀었다. 이리니는 그제야 제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게… 사도께서 하실 말씀입니까?”
“나는 그대를 위한 간언을 드리고 있는 겁니다.”
입가를 감싼 채 한참이나 침묵하고 있던 이리니가 흘끗 눈을 들어 올렸다. 그러잖아도 날카로운 눈매에 더욱 예리한 날이 섰다.
“방벽의 문을 여는 것으로도 모자라 용병들까지 고용하라는 건 방벽과 오스터캄프를 동시에 집어삼키자는 뜻이겠군요.”
“역시 장군이십니다.”
이리니는 시큰둥하게 콧방귀를 뀌었다.
현재 동부에는 본토의 군대가 치안 유지를 위해 주둔하고 있었다. 그리 많은 숫자는 아니나, 효율적으로 동부를 통제하고 있었다.
“그들은 바도비체 후작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바도비체 후작은 빌헬미나 3세의 측근이죠. 후작의 귀에 들어가는 소식은 곧장 빌헬미나에게로 연결될 것입니다.”
결국은 속도전이었다.
바스토뉴의 용병들을 고용하여 오스터캄프를 탈환하는 동시에 방벽을 무너트린다. 그리고 무너진 방벽 수비대에 바스토뉴의 용병들을 합세시켜 본토의 군대를 몰아내고 동부를 온전히 집어삼킨다.
“계획대로 흘러간다면 빌헬미나 3세는 그대의 거병과 동부를 잃었다는 소식을 함께 듣게 될 것입니다.”
예후르가 깍지 낀 손을 무릎 위로 올리며 흐뭇하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