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후르가 그녀의 뺨을 톡톡 두드렸다.
“잘하셨습니다.”
금방이라도 폭발할 화산처럼 넘실거리던 이리니의 기세가 순식간에 사그라졌다. 그는 얼어붙은 이리니를 그대로 스쳐 지나갔다. 과녁 잃은 검에서 그녀의 손이 맥없이 떨어졌다.
이리니는 그대로 마차에 실려 갔다. 보기보다 상처가 심각한지, 멀찍이 떨어져서 스쳐본 그녀의 낯빛은 꼭 시체처럼 창백했다. 남겨진 곰의 사체를 어떻게 운반하면 좋을지 기사들끼리 의견을 주고받는 동안, 페기는 동떨어진 곳에서 깊은 생각에 잠겼다.
도대체 예후르는 여기서 무엇을 하려는가.
그녀의 관심사는 어디까지나 그의 배신 여부와 반지의 행방이었지만, 그의 목적을 완전히 간과할 수는 없었다. 기약할 수 없는 시간 동안 그의 곁에 머물러야 한다면, 적어도 그의 속셈을 대강이나마 파악해 놓아야 했다.
단순히 무료해서?
페기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는 무료한 와중에도 목적을 찾아 움직일 사람이었다. 몸소 거처를 떠나올 정도면 대단히 중요한 이유가 있을 터.
그렇다면 왜 이곳인가.
한때 번성한 왕국이었으나 황제의 직할령으로 전락한 동부는 흔히 탐보프의 화약고라 불렸다. 황제의 교활한 술수로 조각조각 찢어져 연합하지 못하고 있으나, 만일 이들이 하나로 모여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다면 그게 무엇이 됐건 평화롭게는 끝나지 않을 것이었다.
그런 곳에 예후르는 와 있었다. 건들면 터질 것 같은 페임하른 공작을 계속해 자극하며.
짐작건대 페임하른 공작을 내세워 반란이라도 일으킬 심산이리라. 오랫동안 핍박받은 공작과 동부에겐 들고일어날 명분이 충분했다. 만일 뱀을 무찌른 사도까지 편을 들어 준다면 그들의 군세는 날개 돋친 듯 힘을 더해 갈 것이었다.
하지만 예후르에겐 그리할 이유가 없었다. 그와 탐보프의 연고는 희미했고, 동부와의 연고는 거의 없다시피 했다. 세상에 핍박받는 곳이 이곳만도 아닌데 굳이 여기를 택한 이유가 무엇일까.
혹 목적은 동부가 아니라 탐보프인가.
번뜩 떠오른 생각에 페기는 빠르게 눈을 깜박였다. 확실히 3년 전 예후르와 탐보프는 불편한 관계였다. 그의 결혼 소식은 듣지 못했으니, 세도파 바도비체와의 약혼도 흐지부지되었으리라.
그렇다면 단순한 권력 다툼인가. 하지만 마냥 그렇다기엔 지금의 예후르는 권좌에 관심이 없다고 했다. 만일 그가 더 이상 교황의 자리에 흥미가 없다면, 구태여 전쟁을 일으키면서까지 탐보프와 반목할 이유는 없지 않나.
어쩌면 그녀가 알던 예후르를 상정하는 것부터가 문제일지도 모른다. 지난 3년 사이, 그 견고하던 이성적인 판단 기제가 죄 무너져 버렸는지도. 그래서 아무런 이유도 목적도 없이 그저 피바람을 불러일으키고자 하는지도 몰랐다.
“사람이 아닌 것을 뒤집어쓴 꼴이 참으로 추잡하구나.”
그녀는 저도 모르게 손을 떨었다. 그가 속 깊숙한 곳까지 상냥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진작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그 목소리는, 손길은.
갑자기 온몸의 솜털이 쭈뼛 섰다.
페기는 그의 존재를 느꼈다. 얼어붙은 몸은 움직이지 않았으나, 아주 가까이에 그가 있었다.
그리고 바람결에 실려 오는 그의 속삭임도.
“…….”
아지랑이처럼 사라지는 그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려는 순간, 말이 날뛰기 시작했다.
히이잉!
말이 앞발을 높이 쳐들며 길게 울었다. 갑자기 귀를 찢는 이명에 휘청한 페기가 다급히 말의 목에 매달렸다. 그녀를 떨쳐 내려는 양 말은 난폭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난데없는 소란에 기사들이 황급히 달려왔다. 눈 돌아간 말에게 다가가 진정시키려는데, 팔을 뻗어 앞을 가로막는 자가 있었다. 예후르였다. 기이하게 빛나는 금안이 날뛰는 말과 대롱대롱 매달린 여자에게 못 박혀 있었다.
히잉! 히이잉!
페기는 가까스로 말 목을 끌어안은 채 이리저리 휘둘렸다. 떨어지면 즉사였다. 날뛰는 말에게 밟혀 죽을 것이었다. 그 생각 하나로 이 악물고 버티며 힘겹게 몸을 끌어 올렸다. 미친 듯이 몸을 뒤트는 말의 목을 잡고 갈기를 붙잡으며 헐떡헐떡 속삭였다.
“제발 그만, 그만해.”
엇나갔던 말의 초점이 조금씩 돌아오기 시작했다. 하늘께로 쳐들던 앞발이 잦아들고, 굵게 불거졌던 목의 핏대가 사그라들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양 온순해진 말이 가볍게 투레질을 했다.
그러자 간신히 말 목에 매달려 있던 페기가 미끄러지듯 안장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기사들이 놀라 달려왔다.
“아가씨!”
기사들이 모여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페기는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을 가까스로 삼켰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 와중에도 말은 순한 눈을 끔벅이며 그녀의 뺨을 길게 핥았다.
“이 녀석, 제일 순한 말인데 갑자기 무슨 일이지?”
기사들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페기는 아직도 덜덜 떨리는 손을 들어 자꾸만 제 뺨을 핥는 말을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곤 머뭇머뭇 핏기 없는 얼굴을 들어 올렸다.
멀지 않은 곳에서 예후르가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늘 조각처럼 매끄럽던 낯을 사납게 구긴 채로.
***
이른 아침부터 날아든 까마귀 떼가 성의 지붕 위에서 신명 나게 울었다. 참다못한 하인들이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빗자루를 휘둘러 보았으나 소용없었다. 도리어 날카로운 부리를 딱딱 여닫으며 달려드는 통에 몇몇은 지붕에서 떨어질 뻔했다.
“아휴, 짜증 나! 안 그래도 음산해 죽겠는데 저것들이 아주 망조처럼 들어앉았잖아!”
하녀들의 역정이 하늘에 닿은 덕일까. 머지않아 낡은 성 위로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처음엔 지나가는 구름인 줄 알았던 이들이 비명을 지르며 성안으로 피신했다. 제집처럼 지붕을 차지하고 있던 까마귀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까악! 까악!
돌풍이 솟아오르며 까마귀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쿵!
성을 집어삼킬 듯한 그림자와 함께 시커먼 용이 내려왔다. 뒤를 이어 열댓 마리의 용들이 속속들이 착륙하자, 마지막으로 순백의 용이 날개를 우아하게 접으며 소리 없이 내려앉았다.
높게 피어오른 흙먼지 사이로 니체타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다들 제대로 온 거 맞지?”
“난 여기 있어!”
“나도!”
“어? 에일라가 안 보여!”
“아, 젠장. 또 걔야? 알아서 오라 그래!”
니체타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벅벅 긁으며 깡충 땅으로 뛰어내렸다. 그리고 고양이처럼 온몸을 쭉 펼치는데, 그의 용이 콧등으로 엉덩이를 툭툭 밀었다. 니체타는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지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이게 어디서!”
땅에 엎드린 용의 머리로 달려들려는 순간, 누군가 그의 뒷덜미를 잡아챘다. 고개를 뒤로 홱 꺾어 보니 심드렁한 얼굴의 막시모였다.
“어라, 막시모 씨? 왜 이렇게 일찍 왔어?”
“네가 늦은 거다, 멍청아.”
“내가 늦었다고? 설마!”
갑자기 흙먼지 사이로 툭 튀어나온 손이 니체타의 멱살을 잡아챘다.
“내 말이 맞았잖아!”
“악! 클로디아, 숨 막혀!”
클로디아가 귀신 같은 얼굴로 니체타를 마구 흔들었다. 막시모는 그쯤에서 니체타의 뒷덜미에서 손을 떼고 뒤로 물러났다.
“내가! 늦을 것! 같다고! 말했어! 안 했어!”
“해, 했….”
“내가 진짜 너 때문에 못살아!”
클로디아가 역정을 내며 그를 홱 내팽개쳤다. 졸지에 데굴데굴 땅바닥을 구른 니체타가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와, 진짜 오랜만에 가위바위보로 이긴 건데….”
“청승은 그만 떨고 일어나. 전하께서 기다리고 계신다.”
막시모가 그의 팔을 툭툭 찼다. 아무도 편들어 주지 않는 울적한 상황이었지만, 생각 없이 사는 사람의 표본답게 니체타는 벌떡 힘차게 일어났다.
둘을 데리고 성안으로 들어가려던 막시모가 멈칫하며 그들의 꾀죄죄한 행색을 훑었다.
“그런데 너희… 씻은 지는 얼마나 됐냐?”
“모르겠는데?”
태평한 니체타와 달리, 클로디아는 공연히 헛기침하며 이곳저곳 묻은 흙먼지를 털어 내기 시작했다. 막시모가 쯧쯧 혀를 찼다.
“도대체 어딜 헤매다 온 건지…. 한 소리 들을 각오들이나 해.”
니체타는 어깨를 으쓱이며 그의 뒤를 졸졸 따라갔다. 그들이 엘피도 공작과 함께 비행한 지 벌써 10년이 다 되어 가고 있었다. 조금 지저분한 것으로 질책을 들을까 싶었지만.
“…막시모 씨, 왜 말 안 했어. 저분도 계시다고.”
“말했으면 뭐가 달라졌겠냐. 그냥 받아들여.”
니체타는 죄인처럼 고개를 푹 수그렸다. 이제 보니 신발에 구멍도 뚫려 있었다. 슬그머니 반대쪽 신발로 구멍을 가려 보았으나, 점점 더 싸늘해지는 분위기를 보아하니 들통난 게 틀림없었다.
“…저자들입니까?”
이리니의 목소리엔 마뜩잖은 기색이 가득했다. 평소보다 더 지저분한 꼴에 예후르는 한 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전투라도 있었나?”
“아, 아니요. 그런 건 아닙니다….”
니체타가 우물쭈물했다. 그들은 재정적으로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용들의 식욕을 못 이기고 멀리 사냥을 다녀온 참이었다.
물끄러미 그들을 쳐다보던 예후르가 고개를 돌렸다.
“넘어가죠. 중요한 건 알프도르트 방벽이니.”
니체타와 클로디아가 고개를 푹 숙인 채 시선을 주고받았다. 치열한 눈싸움 끝에 패배한 것은 슬프게도 니체타였다.
“…명령하신 대로 용들의 사냥을 겸해 방벽 근처로 올라가 보았습니다. 워낙 숲이 깊고 산세가 험한 곳이라 사람 그림자 보기가 참 힘들었는데, 방벽 인근의 마을에서 우연히 비번인 병사들을 만나 방벽 수비대의 분위기를 대충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탐보프의 동쪽 국경선에는 난공불락의 알프도르트 방벽이 있었다. 다그마르 산맥에 숨어 사는 바스토뉴의 야만족들을 물리치기 위함으로, 현재 방벽 수비대의 대장은 본토의 명문 귀족인 도미에 변경백이었다.
“도미에 변경백이 처음 임관했던 4년 전만 해도 분위기가 굉장히 좋지 않았다고 합니다. 당시 변경백은 갓 성년을 넘긴 나이였고, 무엇보다 황제가 임명한 자였으니까요.”
수비대의 9할을 차지하는 일반 병사들은 동부인들이다. 자신들을 짓밟은 본토의 귀족이 달가울 리 없었다.
“하지만 요 근래에는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다고 합니다. 제가 만났던 병사는 도미에 변경백에 대해 공정한 사령관이요, 용맹한 장수라 말하더군요. 확실히 자신의 목숨을 믿고 맡길 만하다는 평가였습니다.”
이리니의 안색이 조금 어두워졌다. 힐끗 그 모습을 훔쳐본 클로디아가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그래 봤자 본토의 귀족입니다. 그의 능력은 인정하나, 그의 출신으로 말미암아 신뢰를 가지지 못하는 병사들도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