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3화 (93/328)

짤막한 대치를 끝으로 이리니가 먼저 달려들었다. 눈밭 위로 말이 용맹하게 달렸다. 그녀는 창을 높이 쳐들며 곰의 급소를 노렸다.

그러나 놀라울 정도로 유연하게 창날을 피한 곰이 도리어 사납게 그녀의 어깨를 할퀴었다. 이리니는 억 소리 나는 고통을 참으며 반대편 손으로 창을 바꿔 쥐었다. 눈밭 위로 후드득 핏물이 쏟아졌다.

곰이 틈을 놓치지 않고 덤벼들었다. 이리니는 창을 입에 물고 멀쩡한 왼팔로 고삐를 몰았다. 축 늘어진 오른 어깨에서 그동안 잊고 있었던 고통이 피어올랐다. 환각처럼 떠오르는 기억들 속에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합니다. 아무리 총사령관이 군 경험 일천한 황녀 황자들이었다곤 하나, 적진에는 도미에 변경백이 있습니다. 그는 탐보프에서 가장 이름 높은 명장. 이토록 연달아 맥없이 물러날 리 없습니다.”

“아무래도 그 명성이 헛되었나 보군. 그대는 승리의 날을 망치지 마라.”

위험을 경고하는 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황녀와 황자들의 목을 베었다는 만족감에 도취되어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각하께서 반편이 황녀와 황자들을 죄 죽여 놓았으니, 이제 정당한 황위 계승자는 각하와 빌헬미나 황녀뿐이로군요.”

“빌헬미나 황녀는 오히려 각하께 감사를 표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낄낄거리며 그런 말들을 농담처럼 주고받던 때가 있었다. 승리는 무엇과도 비할 데 없는 마약이고, 가장 달콤한 술이니. 그녀는 승리에 취하여 그토록 분명한 사실을 외면하고 있었다.

자신이 덫에 빠졌다는 것을.

사냥꾼인 줄 알았던 자신이 실은 사냥감이었으며, 사냥감인 줄 알았던 빌헬미나가 실은 사냥꾼이었음을.

탐보프의 황녀와 황자라는 먹음직스러운 사냥감이 실은 미끼였다는 것을.

이리니는 순간 고삐를 홱 돌리며 곰에게로 돌진했다. 곰이 사납게 울며 발톱을 치켜들었다. 발톱이 내려오는 찰나에 그녀는 말에서 뛰어내려 땅을 굴렀고, 말은 그대로 곰의 발톱에 꿰였다.

히이잉! 말의 처량한 울음소리 사이로 그녀는 힘껏 창을 내질렀다. 얕았다. 곰은 절명한 말의 사체를 내던지며 그녀에게로 팔을 뻗었다. 이리니는 땅을 구르며 간신히 발톱을 피했다. 눈밭 위로 번지는 핏물에 곰은 더욱 사납게 날뛰었다.

“각하! 빌헬미나 황녀가 황궁을 벗어나 잉겔 협곡으로 들었습니다!”

“빌헬미나가 어지간히도 급했던 모양이구나. 등 뒤가 막힌 곳으로 숨다니.”

수많은 황녀와 황자들의 목을 베었다. 수많은 승리를 쟁취했고, 마지막 승리만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전력을 다해 마지막 목을 베어 내고자 했다.

“적의 급습입니다! 달아났던 도미에 변경백이 후미를 공략하고 있습니다!”

“각하! 협곡이 뚫리지 않습니다!”

“각하, 몸을 피하셔야….”

단 한 번의 패배였다.

빌헬미나에겐 단 한 번의 승리였고, 그 한 번을 위해 스스로를 미끼로 내걸었다. 도박이나 마찬가지였으나 끝내 승리를 쟁취한 것은 빌헬미나였다.

이리니는 땅을 기어 고목 아래에 달했다. 어느새 두 발로 선 곰이 느릿느릿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이리니는 더 이상 갈 곳이 없었다. 등 뒤는 막혔고, 눈앞에는 거대한 곰이 산처럼 버티고 있었다.

이리니는 창을 움켜쥐며 사납게 웃었다. 분노하듯 뒤통수로 고목을 때렸다. 등까지 들썩거리며 나무의 몸통을 마구 때렸다. 그녀의 속엔 해갈되지 못한 분노가 하늘께까지 타오르고 있었다. 빌헬미나의 그 저주스러운 낯짝이 아직도 눈앞에 선했다.

“사촌. 동부의 맹장이란 칭호가 과연 허황된 것이 아니더군요. 그동안 수고 많았습니다. 그대가 나를 위해 많은 것을 해 주었으니, 내 특별히 그대의 목숨만은 거두지 않도록 하지요.”

아직도 그 목소리를 떠올리면 이가 갈렸다.

거대한 곰의 몸집이 그녀의 몸뚱이 위로 드리워졌다. 이리니는 짐승의 까만 눈동자를 응시하며 계속해서 나무를 때렸다. 뒤통수와 등에서 불이 날 것만 같았다. 짐승이 콱 움켜쥐는 어깨가 숨넘어갈 듯 고통스러웠으나, 그녀는 수십 년 삼키고 삼킨 분노를 되새기며 정신을 다잡았다.

단 한 번의 승리.

단 한 번의 기회.

쿵!

마지막 젖 먹던 힘까지 다해 나무를 때리자, 비로소 드높은 침엽수에서 우수수 눈덩이가 쏟아졌다. 부지불식간에 눈덩이를 맞은 곰이 크게 휘청거렸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창을 찔러 넣었다. 단단한 뼈 사이로 창살을 쑤셔 넣어 펄떡이는 짐승의 심장을 꿰뚫었다.

크릉, 크르릉.

크게 벌어지는 곰의 입에서 피가 한 움큼 쏟아졌다. 창을 찔러 넣은 가슴 부근에서도 폭포처럼 핏물이 쇄도했다.

곰의 몸이 천천히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이리니는 숨 막힐 듯 제 몸을 눌러 오는 곰의 사체 아래서 가까스로 엉금엉금 기어 나왔다. 그러곤 거친 숨을 몰아쉬며 눈밭 위로 드러누웠다.

머리 위에는 충성스러운 애마의 사체가. 발아래엔 숲을 공포에 떨게 하던 짐승이.

그리고 저는 짐승의 피로 칠갑한 넝마가 되었다.

이보다 더 비참할 수 있을까.

이리니는 흐느끼듯 웃었다.

그럼에도 승리였다.

멀리 눈 덮인 동산 위에서 활을 겨누고 있던 예후르가 화살을 거두었다. 안절부절못하며 그를 지켜보던 기사가 황급히 물었다.

“어찌 활을 놓으십니까! 각하는, 각하는 어찌 되셨습니까?”

그러나 예후르는 말없이 숲속을 응시할 뿐이었다. 기사는 갑갑한 마음에 가슴만 두드렸다.

그때, 예후르가 갑자기 피식 웃었다. 그는 활을 기사에게 건네며 말을 돌렸다.

“공작이 돌아올 것이다.”

제대로 보이지 않는 숲속과 그의 뒷모습을 번갈아 보던 기사들이 얼떨떨한 얼굴로 그를 뒤따랐다. 예후르는 배부른 사자처럼 만족스러운 얼굴로 맑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불씨는 지펴졌다.

이제 타오를 차례였다.

***

이리니가 숲을 빠져나온 것은 온 세상이 붉게 물든 황혼 녘이었다.

깊은 숲속에서부터 질질 끌고 온 곰의 사체 뒤로 붉은 핏자국이 길게 남았다. 그녀 자신조차 머리부터 발끝까지 피 칠갑을 한 행색이니, 조마조마하게 주군을 기다리던 기사들마저 선뜻 말을 걸지 못했다.

이리니가 곰의 다리에 묶어 끌고 왔던 밧줄을 툭 놓았다. 눈밭 위로 피투성이 밧줄이 굴렀다. 나이 지긋한 기사가 그제야 머뭇거리며 다가갔다.

“각하….”

온통 핏물에 절어 가려졌을 뿐 그녀의 차림새는 빈말로도 온전치 못했다. 망토는 죄 찢겼고, 투구는 온데간데없었다. 그러나 가장 심각한 것은 반파된 갑옷 사이로 보이는 어깨의 상처였다.

“마차를 준비해 두었습니다. 일단 성으로 돌아가셔서….”

불현듯 이리니가 커다란 보폭으로 그를 스쳐 지나갔다. 그녀의 시선은 단 한 군데에 고정되어 있었다.

자신의 기사들을 거느린 채 느긋이 뒤로 빠져 있는, 엘피도 공작.

이리니는 빠득 이를 갈았다. 도중에 어느 기사와 일부로 부딪히면서, 그의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 온 힘을 다해 예후르에게로 검을 휘둘렀다.

푹.

검날이 그의 얼굴 옆, 나무줄기에 박혔다.

“원하는 게 뭐야.”

처음부터 수상했다.

영지도, 기사도, 백성도 모두 잃어 회생할 힘조차 남지 않은 저를 찾아올 이유가 없었다.

“원하는 게 뭐냐고 묻잖아!”

살벌한 일갈에 먼 숲에서 까악 까악 새가 날아올랐다. 그럼에도 예후르는 느긋하게 팔짱을 끼고 있을 뿐이었다.

“틀렸습니다.”

“…뭐?”

“검을 쥐고 싶었다면, 경의를 담아 내게 바쳤어야죠.”

피 칠갑한 이리니의 얼굴이 황망하게 일그러졌다. 예후르는 변함없이 평온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어야 합니다.”

“…….”

“감사합니다.”

날 찾아 주셔서.

날 일깨워 주셔서.

날 잊지 않아 주셔서.

이제 알겠냐는 듯 예후르가 자비로운 미소를 머금었다. 우두커니 그를 응시하던 이리니가 별안간 날카로운 웃음을 터트렸다. 허리를 접으며 온몸을 뒤틀었다. 그 바람에 그녀가 쥐고 있던 검이 나무줄기를 베어 내려가 그의 어깨에 닿았다.

“세상이 미쳐 돌아가는군! 성스러운 불의 사도마저 이 지경이라니!”

요란한 웃음소리 끝에 격렬한 기침이 뒤따랐다. 한참이나 쿨럭거리던 이리니가 눈밭 위로 핏물을 퉤 뱉으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실핏줄 죄 터진 눈이 시뻘겋도록 형형했다.

“사도는 죽음이 두렵지 않으시오?”

그의 어깨에 닿은 검날이 파들거리며 떨렸다.

“내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하나, 다행히 검을 휘두를 힘만은 남아 있소. 날 능멸하는 것이 누구든 간에 베어 넘길 수 있단 말이오!”

뒤에서 무어라 수군거리건 상관하지 않는다. 그녀는 뒤를 돌아보지 않으니, 숨어서 놀리는 비겁한 손가락질 따위에는 추호도 개의치 않았다.

그러나 눈앞에서 저를 업신여기는 것만은 용서할 수 없었다.

그녀는 곰을 잡는 노르투그의 전사. 설사 자신의 목숨이 경각에 달렸다 한들, 모욕은 갚아 주는 것이 마땅했다.

“죽긴 누가 죽습니까. 내가 죽으면, 누가 당신을 이끌어 준다고.”

이리니의 눈썹이 움찔했다. 그녀의 입술이 사납게 열렸으나, 예후르가 나긋하게 말을 가로챘다.

“이끌어 줄 사람이 필요 없다고 하진 마십시오. 아무리 강하게 말한들, 현실과 유리된 말은 공허하게만 들립니다.”

“내가 왜 당신에게…!”

“설마 저 곰 하나 잡아 온 것으로 모든 것이 해결될 줄 알았습니까?”

비웃듯 예후르가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혼자서 저런 맹수를 잡아 본 건 처음이겠지요. 예, 장한 일입니다. 훌륭한 사냥꾼임을 입증했으니 깊은 숲속에서도 능히 홀로 살아갈 수 있겠지요.”

“…….”

“하지만 떠나간 백성들이 돌아오진 않습니다. 죽은 수족들이 살아나지도, 빼앗긴 권력을 되찾아 올 수도 없습니다. …혹은.”

예후르가 고개를 틀어 그녀의 귓가에 입술을 붙였다.

“배반한 아들이 용서를 구하며 돌아올 리도 없고요.”

이리니의 눈이 크게 뜨였다. 턱에 힘이 들어가고, 검을 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 모든 반응을 지켜보며 예후르는 은밀하게 속삭였다.

“하지만 나는 할 수 있습니다.”

“…….”

“당신 혼자선 아무것도 아니지만, 내가 이끌어 준다면 가능해요. 오직 나만이 할 수 있습니다. 저 곰은 그저….”

그가 작게 웃었다.

“당신에게 그럴 만한 자격이 있는지 시험한 것에 불과합니다. 다행히 잘 해내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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