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2화 (92/328)

한가롭게 농담을 주고받으며 시시덕거리던 기사들이 하나둘 그녀의 주위로 몰려들었다. 이리니는 투구를 옆구리에 낀 채 그들과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얼핏 보기론 냉정한 사령관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페기는 그녀의 눈빛이 종종 오갈 데 없이 떨린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눈치 챘다.

묵묵히 기사의 말을 듣던 이리니가 난데없이 뒤를 홱 돌아보았다. 기사들 역시 반색하며 황급히 뒤로 물러나 길을 만들었다. 마치 황제라도 등장하듯 요란한 환영이었다.

그러나 기사들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예후르였다. 그는 가죽 경갑에 두툼한 털가죽을 망토처럼 두르고 있었다. 기사들은 그를 보자마자 각 잡힌 자세로 경례하며 예를 표했다.

그쯤에서 페기는 이 성이 어찌 돌아가는지 대강 파악할 수 있었다.

‘예후르가 완전히 장악했군.’

가볍게 인사를 주고받은 이리니와 예후르가 각자의 말에 오르기 위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페기는 최대한 그의 눈에 띄지 않으려 어설프게 고삐를 죄었다. 그러나 말은 그녀의 생각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다. 그녀의 당혹을 눈치챈 인근의 기사가 얼른 고삐를 잡자, 말이 히이잉 길게 울었다.

그 소란에 이리니의 시선이 그녀를 향했다.

“처음 보는 얼굴이군.”

말에 오르려던 이리니가 경계하는 기색으로 그녀를 훑어보았다. 페기가 머뭇거리며 인사를 하려는 찰나, 예후르가 여상하게 말을 가로챘다.

“내 상단에 소속된 자입니다.”

“상단에? …그나저나 저 여자도 함께 가는 겁니까? 말에 오른 꼴이 영.”

그녀의 뻣뻣한 자세를 지적하듯 이리니가 쯧, 짧게 혀를 찼다. 페기는 그저 고삐만 꽉 움켜쥐었다. 지나가듯 그녀를 스쳐본 예후르가 말에 오르며 무심하게 대꾸했다.

“한번 지켜보죠.”

두 사람이 말에 올라타자 기사단이 열을 맞추어 말을 몰기 시작했다. 페기는 경직된 자세로 고삐를 흔들었다. 그들의 앞으로 오래된 성문이 열리며 끝을 알 수 없는 길이 펼쳐졌다.

성문을 넘을 때부터 눈에 띄게 초조해하던 이리니는 인적 드문 숲길에 들어서고 나서야 겨우 안정되었다. 허름한 민가 사이를 통과할 땐 석상처럼 굳은 얼굴을 하던 기사들도 오랜만의 단체 행동에 신이 나 밝아졌다.

어린애처럼 웃어 재끼는 기사들을 흐뭇하게 지켜보던 이리니는 문득 예후르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오래전부터 그녀를 지켜본 것처럼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속을 죄 꿰뚫어 보는 듯한 눈빛에 도리어 고개를 떨군 것은 이리니였다.

일행은 곧 숲속으로 접어들었다. 밤새 눈이 내린 숲은 마치 전설 속 요정이라도 나올 것처럼 아름다웠다. 맹수가 나온다는 소문이 퍼졌는지 사람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았다.

숲의 초입에선 한껏 긴장하여 맹수를 경계하던 기사들은 곧 눈을 처음 본 개떼처럼 휘젓고 다니기 시작했다. 창으로 높은 침엽수를 건드려 앞에 가던 동료의 머리 위로 눈을 떨구고, 슬쩍 눈을 뭉쳐 동료 기사에게 던지기도 했다.

예후르는 그들을 말리지 않았다. 이리니는 묵묵히 땅만 보며 말을 몰기 바빴고, 그들은 점점 숲 깊은 곳으로 발을 들였다.

그런데 문득, 예후르가 말을 멈추며 손을 들어 올렸다. 시시덕거리던 기사들이 황급히 입을 봉하며 고삐를 죄었다. 그의 손짓을 보지 못해 홀로 앞서 나가던 이리니만이 뒤늦게 이상함을 깨닫곤 뒤를 돌아보았다.

“전하?”

그러나 그의 시선은 눈 덮인 땅에 꽂혀 있었다. 선명하게 남은 짐승의 발자국. 기사들의 표정이 덩달아 심각해졌다.

“발자국을 보면 곰인 것 같은데….”

예후르는 말없이 근처 기사에게 손을 뻗었다. 잠시 의아해하던 기사는 곧 생각났다는 듯이 등에 메고 있던 장창을 두 손으로 공손히 건넸다. 창을 들고 다른 손으로 날 부분을 매만지던 예후르는 예리한 날 끝에 손이 베이자 흡족한 얼굴을 했다.

“듣자 하니 옛 노르투그 전사들은 자식이 성인이 되면 말 한 필과 창 한 자루를 주고 곰을 잡아 오라 했다더군요.”

그는 창을 던졌다. 얼결에 창을 받은 이리니가 멀거니 그를 바라보았다.

“다녀오십시오.”

경악은 시간차로 퍼졌다. 가장 먼저 그의 저의를 알아들은 기사가 질겁한 얼굴로 그를 돌아보았다.

“전하!”

“페임하른 공작. 그대가 성인이 되었을 때는 기사단이 호위로 따라붙었다고 들었습니다. 기사들이 반나절 몰아붙인 곰에게 마지막으로 창을 찔러 넣은 이가 바로 그대라지요. 그런 것을 어찌 용맹한 노르투그 전사의 성인식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예후르는 지극히 태연한 얼굴로 말했다. 그가 지금 농담을 하는 것이라 믿었던 이리니는 그제야 그의 진심을 알아챘다.

그녀가 벌게진 얼굴로 말을 몰아 다가왔다.

“엘피도 공작. 이런 건 하나도 재미없습니다.”

“재미? 내가 재미로 이러는 것 같습니까?”

스르릉, 그의 허리춤에서 검이 뽑혔다. 이리니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단 눈으로 자신을 겨누는 검과 예후르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예후르의 등 뒤를 지키고 서 있던 기사들마저 이제는 가만있을 수 없었다.

그러나 기사들이 움직이려 하기 무섭게 예후르가 냉정한 목소리로 잘라 말했다.

“불복하는 자는 내 직접 목을 베어 주겠다.”

기사들이 움찔했다. 의 검이 천 년 전 뱀을 봉인했던 전설 속 성검임을 모르는 자가 없었다. 기사들이 갈등하는 얼굴로 하나둘 검집에서 손을 떼자, 이리니는 배신감 어린 눈으로 그들 모두를 쏘아보았다.

“공작! 진정 내가 죽길 바라시오?”

“나는 그대가 성장하길 바랍니다. 10년 넘게 자기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남 탓만 하는 자를 어찌 올바른 성인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이리니의 얼굴이 수치심으로 벌겋게 달아올랐다. 예후르는 냉랭하게 그녀의 등 뒤를 눈짓했다.

“가십시오. 더 이상 나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다면.”

죽일 듯이 그를 쏘아보던 이리니가 거칠게 말을 몰아 깊은 숲속으로 들어갔다. 눈 덮인 수풀 사이로 그녀의 모습이 사라지자, 어느 기사가 초조한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전하. 발자국의 크기로 보건대 단신으로 잡을 수 있는 크기의 곰이 아닙니다. 제가 은밀히 따라붙겠습니다. 각하께서 위험하실 때만 나서겠노라 약속드립니다.”

“…….”

“전하!”

대꾸 없이 말을 돌리던 예후르가 흘끗 그를 보았다.

“경은 정녕 공작이 살아 있는 것으로 보이나.”

기사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예후르는 책을 읊듯 건조하게 말을 이었다.

“마지막 전투에서 사로잡혔을 때, 페임하른 공작은 자신을 죽이라고 외쳤다지.”

치열한 전투였다. 눈앞에서 수족 같은 기사들을 수없이 잃은 이리니 페임하른은 마치 악귀처럼 날뛰다가 겨우 붙잡혔다. 그러곤 처음으로 얼굴을 맞대는 빌헬미나 3세 앞에 강제로 무릎 꿇려져 차라리 저를 죽이라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잔혹한 빌헬미나는 끝까지 그녀의 원을 이루어 주지 않았다. 빌헬미나는 그녀의 목을 베는 대신 코를 베어 다시는 황위를 탐낼 수 없는 몸으로 전락시켰다. 그리고 그녀가 아끼고 사랑하던 사람들이 죽는 모습을, 그녀가 그토록 자랑스러워 하던 땅이 유린당하는 꼴을 지켜보게 만들었다.

바스토뉴의 야만족들을 몰아낸 동부의 맹장 이리니 페임하른은 그날에 죽었다.

작금에 남은 것은 그저 악만 가득한 껍데기뿐이었다.

“하지만… 돌아오지 못하시면 어떡합니까.”

기사가 울먹이며 물었다. 예후르는 무심히 대꾸했.

“그럼 그녀의 그릇이 거기까지인 거겠지.”

이리니는 씩씩거리며 말을 몰았다. 싸늘한 겨울바람도 머리 꼭대기까지 차오른 분노를 식히진 못했다.

육시를 내어도 모자랄 새끼.

그녀는 떠오르는 욕이란 욕을 모두 그 번번한 낯짝에 퍼붓고 싶었다. 애당초 속이 시커멓던 자였다. 그녀는 저를 농락하고 얼마 남지도 않은 저의 모든 것을 앗아 가려는 그를 도무지 용서할 수가 없었다.

그녀가 누구인가.

옛 노르투그 전사의 후손이요, 동부를 호령하던 맹장 이리니 페임하른이 아닌가.

“너는 할 수 있다. 굴복당한 너의 조부의 한과 이 아비의 원을 네가 갚아 다오.”

이리니는 평생을 울분에 괴로워하다 돌아가신 아버지를 떠올리며 창을 꽉 움켜쥐었다. 망국의 왕자로 태어나 원수의 누이와 강제로 결혼하여 종국엔 딸 하나에 의지해 사시던 분이었다. 그분의 분노를, 동부의 원한을 갚을 의무가 그녀에겐 있었다.

그래서 주변의 만류를 뿌리치고 군대를 서쪽으로 몰았다.

“이미 동부는 우리의 손에 들어왔습니다. 어찌 우리의 것이 아닌 땅을 욕심내십니까!”

“저들도 자신들의 것이 아닌 우리의 땅을 탐내지 않았더냐!”

일찍이 어머니를 잃은 그녀는 홀아버지의 손에 온전한 노르투그 왕족의 후손으로 자라났다. 핍박받던 동부의 분노가 그녀의 속에서도 끓어 넘쳤다. 수십 년 묵은 원한을 해갈하는 방법은 복수뿐이라 여겼다.

“내 피의 절반은 탐보프의 황녀에게서 받은 것이오. 내게도 빈 제좌를 요구할 권리가 있소.”

북방을 통일한 아리페르트 6세가 급사하면서 탐보프는 혼란기에 접어든 상태였다. 그 틈을 타 동부를 집어삼킨 그녀는 기세를 몰아 서쪽으로 진군했다.

가장 유력한 황위 계승자였던 빌헬미나 황녀는 똑같은 피를 이은 아우들을 총사로 임명하여 이리니에 맞서게 했다. 그러나 감히 동부의 맹장을 당해 낼 자가 없었다. 수많은 황녀와 황자들이 그녀의 칼 아래 스러졌다. 남은 것은 빌헬미나 하나뿐이었다.

그녀는 약속된 승리자. 동부의 모두가 그녀의 이름을 칭송하며, 그녀가 가져올 달콤한 복수를 꿈꾸었다.

그러나 단 한 번.

단 한 번의 패배가 그녀를 나락으로 떨어트렸다.

문득, 창을 쥔 손이 움찔 떨렸다.

이리니는 본능적으로 경계심을 일깨우며 주위를 훑어보았다.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사냥꾼의 감각이 깨어나고 있었다. 예리하게 날 선 정적 속에 숨죽인 짐승의 이빨이 숨어 있었다.

그녀는 즉각 고삐를 틀어 말을 달리게 했다. 조금 전까지 그녀가 있던 자리로 짐승의 발톱이 박혀 들었다. 그르릉, 섬뜩한 짐승의 울음소리가 울리며 수풀 사이로 거대한 곰의 몸집이 드러났다.

집채만 한 곰이 앞발을 땅에 디디며 그녀의 주위를 천천히 돌기 시작했다. 시커먼 눈동자엔 오직 본능만이 가득했다.

이리니는 식은땀이 배어나는 손바닥으로 창을 길게 훑으며 자세를 취했다. 그녀는 곰을 사냥하던 노르투그 전사의 후손이었다. 약속된 승리자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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