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서 네 주인에게 전해. 한 번만 더 내 눈앞으로 이런 더러운 것을 들이밀거든, 그땐 목을 잘라 돌려보낼 것이라고.”
예후르는 미련 없이 그녀의 머리채를 내팽개쳤다. 힘없이 휘청거리다 책상 다리에 이마를 박은 페기가 실 끊긴 인형처럼 풀썩 엎어졌다. 경련하듯 그녀의 등이 간헐적으로 떨렸다. 비딱하게 그 모습을 굽어보던 예후르가 짧은 조소만을 남기곤 발길을 돌렸다.
페기는 팔에 애써 힘주어 몸을 일으켰다. 후끈거리는 이마에서 술 섞인 핏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말 못 하게 상처가 쓰렸다. 하지만 그보다도 바닥을 짚은 다섯 손가락에 눈이 갔다.
뒤틀린 구석 없이 곧게 뻗은 마디.
이 반듯한 모양마저 추하다고 하는 저 사람은 가면을 벗겨 나올 내 비틀린 손을 보곤 무어라 할까. 모든 것이 완벽한 사람에게 내 비참한 꼴이 눈에 들어오기나 할까.
속이 뒤틀렸다. 다섯 손가락이 까득, 소리를 내며 바닥을 긁었다.
“반지는 어디 갔어요?”
느긋하던 그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무슨 반지.”
“아시잖아요.”
싸늘한 침묵이 흘렀다. 페기는 강박적으로 바닥을 짚은 제 손만을 응시했다. 하얀 손가락 위로 떨어지는 핏방울을 눈에 새길 듯이 보았다.
오래지 않아 그의 발걸음이 다시 돌아왔다. 날렵한 모양의 군화 앞코가 불쑥 그녀의 좁은 시야로 침입했다. 그는 천천히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그녀의 턱을 잡고 들어 올렸다.
“무슨 반지.”
역광이 드리워진 그의 얼굴에서 스산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페기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잃어버리셨어요? 누군가에게 넘기기라도 하셨나요?”
“네가 그 반지를 어떻게 알아.”
“그냥 알아요.”
“그냥?”
그가 차게 웃었다.
“그 추잡한 가면부터 벗겨 주마.”
그의 커다란 손이 얼굴을 덮쳐 왔다. 엄습하는 어둠을 응시하며 페기는 흐느끼듯 웃었다.
“그러다 제가 그 사람이 아니면 어쩌시려고.”
손바닥이 코앞에서 우뚝 멈추었다. 그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찌푸려진 미간에 불쾌감이 선명하게 박혔다.
“당연히 너는 그 애가 아니지.”
“어떻게 확신하세요?”
“…….”
“죽었으니까?”
그녀의 턱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페기는 허망한 미소를 흘렸다.
“아님 행여라도 되살아나면 안 돼서?”
그녀의 얼굴을 뒤덮을 듯하던 손바닥이 서서히 거두어졌다. 페기는 그의 손에 얼굴을 맡긴 채 힘없이 몸을 늘어트렸다. 아직도 코끝을 맴도는 술기운에 취하기라도 한 것처럼.
페기는 천천히 손을 뻗었다. 손끝에 그의 뺨이 살짝 닿았다.
“왜 내가 아닐 거라고 생각해, 예후르?”
금속처럼 단단하던 금안이 설핏 흔들렸다. 페기는 그 속에서 피어나는 의심과 희망, 이루 말할 수 없는 수많은 감정들의 편린을 보았다. 한번 움튼 혼란은 걷잡을 수 없이 번져 갔다.
그의 이가 맞물렸다. 힘이 들어간 하관에 딱딱하게 각이 졌다. 용솟음치는 감정을 따라 그녀의 턱을 움켜쥔 악력도 점점 거세졌다. 페기는 이제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제발, 입술을 달싹이며 간절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무질서하던 혼란은 곧 걷히고, 오직 외길뿐인 질서가 다시 들어섰다.
그는 냉담한 얼굴로 고했다.
“죽은 자는 돌아오지 않아.”
페기는 가만히 눈을 깜박였다. 한없이 어지럽게 부유하던 머릿속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목 앞에 칼이라도 들어온 것처럼 본능이 경종을 울렸다.
죽음이, 가까웠다.
“…전 무언가를 확인하러 왔어요.”
달달 떨리는 입술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전하를 방해하지 않을게요. 전하의 말씀이라면 무엇이든 따를 테니, 제 가면을 벗기는 건 조금만 유보해 주세요.”
“내가 왜?”
“삶이 무료하시잖아요.”
페기가 간신히 읊조렸다. 이 세상에서 그의 지루함을 가장 잘 읽어 내는 사람이 바로 그녀였다.
“잠깐의 여흥이라고 생각하세요. 제가 바라던 진실을 찾으면 제 손으로 가면을 벗어 전하께 보일게요.”
그의 심중을 떠보고 조롱하던 투는 온데간데없었다. 도리어 구차하게 비는 듯했다. 페기는 할 수만 있다면 그의 앞에 납작 엎드리고 싶었다.
진의를 가늠하듯 뚫어져라 그녀를 응시하던 예후르가 문득 그녀의 턱을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맥없이 엎어진 페기가 바들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어느새 다리를 펴고 일어선 예후르가 냉엄하게 말했다.
“그날에 너의 무례함도 함께 벌하도록 하지.”
페기는 말없이 고개를 조아렸다. 그러곤 어지러운 머리를 힘겹게 가누며 휘청휘청 방을 빠져나왔다.
그녀는 달아나듯 암흑 같은 복도를 다급히 걸었다. 마치 짐승에게 쫓기는 듯했다. 곧 계단이 나왔으나, 정신없는 와중에 발을 잘못 디뎌 층계참까지 굴러떨어졌다.
페기는 욱신거리는 몸을 간신히 세워 애벌레처럼 둥글게 무릎을 감싸안았다. 추운 것처럼 이가 딱딱 부닥쳤다. 이마의 상처는 계속 화끈거리고, 얼굴을 뒤덮은 독주는 좀체 그 독기가 가시질 않았다. 무엇보다도 비참했다.
죽은 자는 돌아오지 않는다.
돌아와서는, 안 된다.
예후르는 그것이 마치 진리라는 양 말했다.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그의 두 눈엔 이 세상이 마땅히 그러해야 하는 질서가 보이는 것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나는 되살아났다.
그렇다면 나는 질서에 어긋나는 존재인가?
“질서를 거스르는 사도는 더 이상 사도가 아니다. 그것은 버러지다.”
페기는 언젠가 안드레아가 그에게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곧잘 어울리던 두 사람의 관계는 그날에 완전히 파탄 났다. 그날 이후로 예후르는 늘 안드레아를 경멸하듯 보았다.
하지만 되살아난 나는 과연 경멸로 그칠까.
행여 그 성검으로 나를 다시 죽음으로 내몰진 않을까.
페기는 무릎에 얼굴을 파묻으며 숨죽이듯 어깨를 들썩였다. 자꾸만 속에서 움트는 것이 웃음인지 울음인지도 헷갈렸다. 모든 것이 불확실하나 한 가지만은 분명했다.
아마도 그의 말이 맞을 것이다.
그는 틀린 적이 없으니, 죽음을 거슬러 올라온 그녀는 질서를 해하는 존재일 것이다. 뒷골목을 헤매고 다니는 짐승보다도, 쓰레기 더미를 뒤지는 시궁쥐보다도 못한 한낱 버러지.
하지만 버러지라고 반드시 죽어야만 하나.
시궁쥐로도 살아남은 것처럼, 그녀는 버러지로 전락해서도 아득바득 살아남을 것이다. 경멸받아도 상관없었다. 존재만으로 질서를 해치는 존재라 할지라도 가능한 한 죽음에게서 멀리 도망치고 싶었다. 그녀는 이미 한 번 죽음을 겪었고, 그건 다시는 겪고 싶지 정도로 끔찍했으니까.
그러니 이 먼 길 자청하여 떠나온 목적을 잊지 않을 것이다. 예후르가 절 팔아넘겼는지, 아니면 누군가 그의 반지를 훔쳐 내어 절 죽였는지 분명하게 밝혀낼 것이다. 복수할 것이다. 그리고 예외를 가르지 않는 그의 엄중한 칼날을 피해 멀리 달아나리라.
눈물인지 술인지 핏물인지 모를 것들을 닦아 내며 페기는 간신히 일어섰다.
되살아나 이토록 외로웠던 적이 없었다.
***
“예후르.”
또다시 환청처럼 들려오는 목소리에 예후르는 관자놀이를 짓눌렀다. 보고를 올리던 막시모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어디 안 좋으십니까?”
예후르는 지그시 눈만 감았다. 막시모가 혀를 차며 뜨거운 차를 따라왔다.
“간밤에 페임하른 공작과 술판을 벌이셨다면서요. 몸이 안 좋으시면 더 쉬시지, 왜 또 새벽부터 일어나 계십니까.”
“그런 게 아니야.”
“그런 게 아니면 뭡니까.”
예후르는 말없이 고개를 꺾어 의자에 기대었다. 두통이 가시지 않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성가신 건 도통 지워지지 않는 지난 밤의 악몽이었다.
“예후르.”
젠장.
그는 욕지거리를 씹어 삼키며 눈 위로 손등을 올렸다. 눈을 감고 귀를 막아도 악몽은 선명하게 떠올랐다. 죽은 자는 그의 꿈과 기억 속에서 끊임없이 살아 숨 쉬고 있었다.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얕은 한숨을 내쉬며 자세를 바로 하던 예후르는 문을 열고 들어오는 페기의 모습에 멈칫했다.
한눈에도 병색이 완연한 모습이었다. 긴 드레스와 머리 채로 가리고 있긴 하지만, 구석구석 두른 붕대가 눈에 띄었다. 하루 사이 초췌해진 행색에 심지어는 막시모마저 할 말을 잃었다.
페기는 책상 앞으로 다가와 말없이 비단으로 싸맨 밀서를 내밀었다. 어쩐지 속이 뒤틀린 예후르는 다소 거칠게 실링을 잡아 뜯어 내용을 확인했다.
“요앙 오귀스트의 인장이 맞군.”
“…….”
“피아제 백작이 안드레아와 연이 깊다는 얘기는 못 들었는데.”
페기는 그저 순종적으로 고개만 조아렸다. 붕대를 두른 그녀의 이마와 멍든 손등 따위를 훑어본 예후르가 이내 고개를 돌렸다.
“라발의 귀족이라 하면 괜한 이목이 쏠릴 테니, 여기선 상단에 소속된 교국의 몰락 귀족 행세를 해라. 신분은 적당한 것으로 만들어 주지.”
“네.”
“나가 봐.”
페기는 공손히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 나갔다. 의심스럽게 그녀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막시모가 물었다.
“전하. 저 아가씨, 돌려보내지 않으십니까?”
“저거 가짜다.”
“예? 가짜라니….”
멍하니 중얼거리던 막시모의 표정이 순간 일변했다.
“설마 마가 공작 전하께서…?”
침묵이 곧 긍정이었다. 막시모는 아연한 기색을 감추듯 입가를 문질렀다. 한때 은밀하게 안드레아의 뒤를 쫓아다니던 시절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저 아가씨를 한 달 넘게 보았는데 눈치도 못 챘군요.”
“넌 안드레아도 번번이 놓치지 않았나.”
“아픈 곳을 찌르십니다.”
막시모가 슬쩍 그의 눈치를 보았다.
“제가 한번 눈여겨볼까요?”
“아니, 네가 신경 쓸 일은 아니야. 그보다 동부 상인 조합 쪽 이야기를 해 보게.”
“명하신 대로 금가루를 채운 와인병을 궤짝째로 상단주들에게 돌렸습니다. 주요 상단에 심어 둔 밀정들도 순조롭고요. 아마 곧 열릴 조합 회의에서 우리 상단의 가입 여부가 의제로 오를 것 같습니다.”
“통과될 것 같나?”
“지금으로선 반반입니다. 본토의 상단들뿐만 아니라 지역 토착 상단들도 국외의 상단이 들어온다는 데 거부감을 느끼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언제까지 리누스 도시 연맹 상단들의 횡포에 휘둘릴 순 없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