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8화 (88/328)

긴 머리를 빗질하던 페기가 조용히 시선을 던졌다. 마샤는 작은 함에서 은침을 꺼내며 새처럼 지저귀었다.

“음식만 조금 더 맛있으면 좋을 텐데요. 그렇죠, 전하?”

“…아가씨라고 불러야지.”

페기는 마샤가 은침을 찔러 확인한 빵을 집어 들었다. 돌처럼 딱딱해서 우유에 찍어 먹지 않으면 씹기도 힘든 빵이었다.

“북쪽 사람들은 이가 강철로 만들어졌나 봐요. 어떻게 이런 맛없고 딱딱한 빵을 매일 먹지?”

“여긴 식문화가 남쪽만큼 발달하지 못했으니까. 그보다 이젠 노르투그어를 제법 잘 구사하는구나.”

“아가씨께서 잘 가르쳐 주신 덕분이죠.”

마샤가 쑥스럽게 웃었다. 페기는 담담하게 말했다.

“우리가 가는 곳은 아주 배타적이고 경계가 심한 곳이야. 그들의 언어를 사용한다면 최소한의 호의는 받을 수 있을 거란다.”

“명심하겠습니다.”

“그래….”

페기는 흐린 창밖으로 눈 덮인 허허벌판을 응시했다.

“이 지루한 여정도 곧 끝나겠구나.”

간소한 아침 식사를 마친 뒤, 상단은 간밤의 야영 흔적을 지우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맨살을 가르는 칼바람은 여전하나 햇빛만은 따사로웠다. 단단하게 얼어붙은 땅에서 나귀들은 느릿느릿 걸었고, 무거운 짐을 실은 수레들은 별 탈 없이 굴러갔다.

곧게 뻗은 지평선 위로 오스터캄프의 성벽이 보이기 시작한 것은 정오를 조금 남겨 둔 때였다. 길고 고달픈 여정에 지친 사람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북방의 뼈 시린 추위를 뚫고 와인 수백 병을 이고 가는 것은 빈말로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전염되는 기쁨의 도가니 속에 막시모마저 작은 미소를 머금었다.

“해 지기 전엔 족히 도착하겠군. 다들 마지막까지 정신 놓지 말고 똑바로들 움직이라고 해.”

잘 관리된 아리페르트 대로 위에서 수십 개의 수레와 수십 명의 사람들이 꾸물꾸물 움직였다. 목적지가 멀지 않았다.

문제는 성문에서 발생했다.

“허가증이 있지 않습니까! 여기, 가모브 총독님의 인장도 찍혀 있고요!”

“아, 글쎄. 나는 들은 바가 없다니까 그러네?”

“그럼 총독님께 사람을 보내 여쭙기라도 하십시오! 우리보고 이대로 성 밖에서 밤을 지새우란 말입니까? 네?!”

거듭된 성토에도 문지기는 못 들은 척 귀를 후비기 바빴다. 말씨름에 지친 막시모가 낙담한 얼굴로 돌아왔다.

“젠장, 말이 통해야 말이지….”

그의 중얼거림에 하인들은 설마 오늘도 노숙이냐며 불길함에 떨었다. 한 달이 넘는 고단한 여정 끝에 지칠 대로 지친 얼굴들이었다.

그러자 막시모는 욕지거리를 삼키며 이동 금고가 숨겨진 수레를 힐끔거렸다. 지난번에 분명 저 문지기에게 통상적인 통행세의 곱절에 달하는 금액을 찔러 주었다. 올 한 해 잘 부탁드린다는 말에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으면서, 고작 두어 달 만에 돌변할 줄이야.

그때, 그의 옆에 정차되어 있던 마차의 창문이 열리며 하얀 손이 불쑥 내밀어졌다.

“…아가씨?”

그가 얼결에 받아 든 것은 금반지였다. 무어라 대꾸할 틈도 없이 창문이 도로 닫혔다. 벙어리처럼 입술만 벙긋거리던 막시모는 공연히 투덜거리며 문지기에게 뇌물을 건네었다.

금반지를 삼킨 성문이 서서히 열렸다.

해 지기 전엔 성안으로 들겠거니 했던 낙관적인 예측이 무색하도록 해는 이미 서녘으로 다 넘어간 때였다. 대로 곳곳마다 횃불이 오르고, 그림자 위로 더욱 짙은 그림자가 덮였다.

페기는 창밖으로 저물어 가는 도시를 내다보았다. 길은 울퉁불퉁하고 거리는 너저분했다. 탐보프의 동부에서 제일가는 거점 도시임에도 불구하고 지나치게 어둡고 삭막한 분위기였다.

“왠지 유령 도시 같아요….”

마샤가 어깨를 움츠리며 속삭였다. 창밖으로 피골이 상접한 어느 아낙과 눈이 마주친 페기가 조용히 입술을 달싹였다.

“몰락한 왕국의 수도니까.”

오스터캄프.

이곳은 반백 년 전 멸망한 노르투그 왕국의 수도였다.

“멸망하기 전엔 이런 모습이 아니었나요?”

“당연하지. 한낱 북방의 소왕국이었던 탐보프를 제국으로 격상시킨 아리페르트 6세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와 복속시킨 곳이야. 지금은 이렇게 쇠락했지만, 당연히 이 땅도 번성하던 시절이 있었.”

노르투그는 북서부에서 오랫동안 뿌리내렸던 왕국. 그토록 한순간에 무너질 줄은 누구도 예상치 못했으리라.

“아리페르트 6세는 대단한 황제였나 봐요. 그렇게 쉽게 승리한 걸 보면.”

“그래 봤자 이 땅에선 무도한 침략자에 불과하지.”

페기가 생각났다는 듯 말을 덧붙였다.

“교황 성하의 친부이기도 하고.”

“어머나….”

마샤가 저도 모르게 입을 막았다. 페기는 냉소적으로 웃을 뿐이었다.

태어난 지 고작 백일 만에 사도로 각성하여 성도로 보내진 레오폴트는 자신의 친부모에 대해 애정을 담아 말한 적이 없었다. 하기야 어린 아들이 라발의 용병대 손아귀에서 치욕을 당할 때도 가만히 보고만 있던 자니, 그 냉정함이 어련할까 싶었다.

실제 이 땅에서도 가혹한 수탈이 있었다. 탐보프의 본토는 땅이 척박하여 농사에 적합하지 않은 반면, 옛 왕국의 땅에는 기름진 평야가 있었다. 만성적인 식량 부족에 시달리던 탐보프로선 눈이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막 수확한 곡식은 1년을 꼬박 공들여 길러 낸 농부의 입엔 한 톨도 들어가지 못하고 본토로 이송되었다. 심지어는 다음 해와 그다음 해의 수확량마저 저당 잡혔다. 본토에선 해마다 세금을 높였고, 이에 반항하는 이들은 모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로부터 수십 년. 폭압에 신음하는 옛 왕국민들의 분노를 엮어 한데로 분출시킨 인물이 있었다.

동부의 맹장이자, 노르투그 왕족의 정통을 이은 자.

이리니 페임하른.

“그녀의 목표는 독립이 아니었어. 본토를 집어삼킨 황제가 되는 것이었지.”

아리페르트 6세가 급사한 틈을 타 반란을 일으킨 그녀는 전광석화 같은 속도로 진군해 나갔다. 그녀의 매서운 창날 아래 본토의 군대는 덧없이 쓸려 나갔고, 오래전에 금지된 노르투그 왕국기가 곳곳에 꽂혔다.

그리고 아리페르트 6세의 장녀이자 가장 유력한 황위 계승자였던 빌헬미나 황녀가 어느덧 코앞에 있었다.

“거기서 패배했지.”

사로잡힌 페임하른 공작은 목숨을 부지하는 대신 코가 베였다. 신체에 결격이 있는 자는 북방의 왕좌에 오를 수 없다는 오래된 전통을 살린 것이었다.

그러나 빌헬미나의 자비는 거기까지였다.

페임하른 공작의 남편을 비롯한 오래된 수족들은 모두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끝까지 반항하는 자들은 그 씨족을 모두 멸하였고, 항복한 이들은 허울뿐인 이름만 살려 감금시켰다.

그렇게 무주공산이 된 옛 왕국령에는 빌헬미나가 직접 발탁한 총독들이 들어섰다. 황제에게 충성하는 그들은 옛 왕국민들의 입장에선 마귀나 다름없는 수탈자들이었다. 그들은 풍요로운 땅을 어떻게 쥐어짜야 하는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게 총독의 손에 동부가 조각조각 찢어지는 동안, 페임하른 공작은 성에 감금되어 오랜 시간 숨죽이고 있었다. 3년 전엔 하나뿐인 아들마저 원수의 손에 빼앗겼으나,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고작해야 오래전 등졌던 교황에게 탄원서를 제출하는 것뿐이었다.

짐작건대 그 속에 쌓인 분노가 어마어마하리라. 페기는 아직도 예후르가 페임하른 공작에게서 무엇을 뽑아내려는지 짐작할 수 없었다.

그때, 누군가 창문을 두드렸다. 창을 열자, 말을 탄 막시모가 고개를 숙여 시선을 맞추었다.

“예상보다 조금 늦어졌습니다만, 곧 페임하른 공작저에 도착합니다. 노르투그어를 잘 구사하시니 통역은 따로 붙여드리지 않아도 되겠죠. 다만….”

“…….”

“페임하른 공작이 어떤 상황인지는 아가씨께서도 잘 알고 계실 겁니다.”

막시모가 넌지시 속삭였다.

“성정이 불같으신 분입니다. 되도록 그분의 심기를 거스르지 마십시오.”

“명심하지.”

“그리고 엘피도 공작 전하도요.”

페기는 물끄러미 그를 쳐다보았다. 막시모는 고삐 쥔 손을 공연히 쥐었다 펴길 반복했다.

“그분이 저의 주인이시긴 합니다만, 입이 비뚤어져도 차마 자비로운 분이라곤 못 하겠습니다. 예, 괜한 오지랖인 걸 저도 압니다. 저도 제가 왜 이러는진 모르겠는데, 제발 조심하십시오. 큰 사달이라도 벌어질까 두렵습니다.”

막시모는 찡그린 얼굴로 그답지 않게 횡설수설했다. 페기가 입꼬리를 올려 살짝 웃었다.

“고맙네. 기억해 두지.”

“…그리해 주시면 감사하지요.”

그럼에도 걱정이 가시지 않는다는 듯 막시모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며 말을 몰아 나갔다.

페기는 짙은 어스름이 지는 하늘 아래, 우뚝 선 고성을 바라보았다. 수백 년 묵은 옛 왕국의 궁성이 목전이었다.

상단은 곧 공작저로 들어갔다. 옛 왕성이라며 고대하던 마샤는 오래지 않아 실망한 얼굴이 되었다.

기실 궁성이라기보단 요새에 가까운 곳이었다. 추운 북방의 성답게 성벽은 드높고 구조는 폐쇄적이었다. 창을 커다랗게 뚫어 아름답게 장식하는 것을 묘미로 아는 남쪽과 달리, 창문은 아주 좁은 데다 감옥처럼 두꺼운 창살까지 박혀 있었다.

“꼭 귀신의 성 같아요.”

고압적인 분위기에 짓눌린 마샤가 웅얼거렸다. 페기는 잡초가 무성한 정원과 산산조각 깨진 창문을 스쳐보았다. 확실히 일국의 공작이 사는 곳이라기엔 격에 맞지 않았다.

마차가 멈추었다.

페기는 마샤의 부축을 받아 마차에서 내렸다. 오랜만에 내딛는 땅은 단단하고 싸늘했다. 몰아치는 칼바람을 피해 망토를 여미는데, 어디선가 지긋한 시선이 느껴졌다. 낡은 예복을 차려입은 백발 노인이 그녀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하인들을 감독하던 막시모가 급히 달려와 소개했다.

“아, 이분은 엘피도 공작 전하의 손님이십니다.”

그제야 납득한 듯 노인이 천천히 허리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집사 하인리히라고 합니다.”

“하인리히 씨, 아가씨께서 머무실 방을 안내해 주시겠습니까? 워낙 고단한 여정이었던지라 많이 피곤해하십니다.”

그러자 집사는 별다른 대꾸 없이 성안 쪽으로 공손하게 몸을 틀었다. 멀리서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막시모는 눈짓만으로 페기에게 인사하곤 자리를 떴다. 그는 몹시 바빠 보였다.

페기는 집사를 따라 성안으로 들어갔다. 성밖과 한 점 다르지 않은 추위에 마샤가 오들오들 몸을 떨었다. 페기는 복도에 달린 빈 촛대와 바닥이 보이는 집사의 양초를 눈여겨보았다.

도착한 방은 낡았지만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장식을 최소한으로 제한한 것이 북방다웠다.

집사가 예의 바르게 허리를 숙였다.

“머무시는 동안 혹 불편함이 있으시면 저나 하녀들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성주는 어디 계신가? 인사를 드리고 싶은데.”

“시간이 늦었습니다. 인사는 내일 하시지요.”

“그럼 엘피도 공작 전하는?”

거듭된 물음에 집사는 가만히 미소를 지었다.

“…내일 하시지요, 아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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